불타는 투혼
이나모리 가즈오 지음, 양준호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투혼을 불태우다"라는 말은 일상에서 흔히 쓰는 표현입니다. 실제로 한국인들은, 웬만큼 게으르거나 사회의 낙오자, 부적응자,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이가 아닌 이상에는 자신의 일에 열과 성을 다하면서 전념하는 편입니다. 경제적 성공을 거두기 위한 목적도 있고, 같은 조직에 몸 담고 있는 타인들의 눈치를 보는 데에도 그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투혼을 발휘하다"라는 말은, 그보다는 좀 더 강한 표현입니다. 이 책의 주제이자 제목이고, 이 책에서 시도때도 없이 등장하는 어구이기도 합니다. 책은 그 저자의 인격, 개성, 가치관을 잘 드러내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겉으로 예쁘게 그 형식을 가다듬고 치장하기보다는, 자신의 격정(그러나 "진정"이기도 합니다)을 드러내며 독자에게 "대체 왜 당신들은 이렇게 하지 않는가?"를 외치며 독려하는 그의 어투에, 어떤 이들은 살짝 불쾌해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경제활동의 최전선에서, "내가 오늘 부린 게으름은 반드시 다른 성원에게 부담으로 돌아간다."는 점을 피부로 깨달으며 일하는 이들에게는, 이 "유능하고 부지런한 사장님"의 채근에 별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는 아직 나이도 젊은데, 왜 저 사장님처럼 더 열심히 뛰지 못하는 걸까?" 같은 작은 자책감마저 듭니다.

 

일본 재계 인사들 중에는 반한, 혐한, 심지어 증한 성향을 가진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양식과 이성을 갖춘 이들, 현실을 어설픈 색안경을 끼고 제 식대로 왜곡하려 들지 않는 이들이 훨씬 많습니다. 현실을 외면하는 자는, 치열한 생존 경쟁의 장에서 아무 소득을 올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저자 이나모리 가즈오 전 교세라 회장은, 책의 서두부터 대뜸 "망국의 위기를 맞아 개인 재산을 국가에 기부하며 난국을 타개한 국민"이라며 한국을 치켜세우고 듭니다. 이 양반이 무슨 지한파니 친한파니 하는 범주에 들어서가 아닙니다. 누가 봐도 타당하고 객관적인 현실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죠.

 

이나모리 가즈오 회장은 현재의 일본이 처한 상황이, 결코 희망적이거나 생산적이지 않다고 진단합니다. 애는 쓰지만 여러 한계 때문에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다는 인식은 아닙니다. (우리로선 그 근거에 대해 다소 회의가 가는 바 없지 않지만) 이나모리 씨는, 일본은 지금의 모습이 달성 가능한 최선의 상태가 아니며, 앞으로 얼마든지 더 발전하고, 더 번영할 수 있다고 아주 확신을 하고 있습니다.

 

이나모리 회장은, 미국의 원폭 투하로 인해 전쟁에서 패배, 폐허가 된 일본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세대입니다. 그가 성년이 되어 경제 활동을 막 시작했을 무렵은, 일본 전역이 재건을 위한 몸부림으로 한창 들썩일 시기였습니다. 한국전쟁이라는 (그들에게 있어) 뜻하지 않은 호기도 찾아 왔고, 미 군정 당국의 너그러운 처사와 상공인들의 성실하고 부지런한 태도 덕택에, 일본은 비교적 짧은 시기에 전쟁의 피해를 다 복구하고, 세계적 경제 대국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했습니다. 일종의 기적이었고, 이런 놀라운 성취를 이룬 대열에 본인이 한 주역을 담당하기까지 한 사람으로서, 그는 "왜 지금의 일본은, 훨씬 유리한 여건에서 그저 무기력하게 퇴보만 하고 있는가?"를 개탄합니다.

 

흔히, 한창 일할 나이의 남성들이, 직장에서 너무 많은 에너지를 다 쏟아 붓고, 정작 가정과 일상에서 원기 충전이 힘들거나 개인적 삶의 지향점을 잘 찾지 못할 경우, 극심한 무기력 상태에 빠지곤 합니다. 이를 두고 "번아웃 증후군"이란 말도 씁니다. 그런데 이나모리 회장은, 오히려 정반대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직장에서 일이 잘 안 풀리는 것은, 당신의 에너지를 남김 없이 태워 없애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끼지 말고 망설이지 말고 겁내지도 말며, 하나 남김 없이 불태워 버려라!" 이것이 그가 주장하는 바 "투혼"의 내용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언제나 마음에 새기고, 또 주위에도 권하는 모토가 바로 "목표는 약간 높게 설정하라"는 것입니다. 이나모리 회장 역시, 다소 높게 설정한 목표치야말로 정신에 바람직한 긴장을 주고, 단기에서건 장기 계획에서건 조직 구조와 그 비전에 긍정적인 견인을 미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실 제 경험에 의하면, 대단히 의욕적이고 활력이 넘치는 스타일이라야, 이런 모토가 제 효과를 낼 수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좌절감과 슬럼프 때문에 의욕이 떨어져 있는 이에게는, 역효과를 낼 수도 있죠. 그러나 이나모리 회장이 염두에 두고 있는 "행위자"는, 딴 생각이란 조금도 없이 "난 내 분야에서 최고의 일꾼이 되겠다!"는 결의로 가득찬 타입입니다. 용장 밑에 약졸 없다고, 이런 무시무시한 정력을 지닌 회장 밑에서 일하는 직원들 역시, 그 긍정의 기운을 이어받아 눈부신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자신이 창업한 교세라 등에서 그가 이룬 업적도 업적이지만, 다 망해가던 일본항공의 경영진에 취임하여, 불과 1년여 만에 회사를 흑자로 돌려 놓았다든가, 전통적으로 저(低)수익 기조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항공업계(평균치가 1%라고 하는군요)에서 이례적으로 높은 17%라는 실적을 올린 그의 성과야말로, 한 경영자의 능력 진가를 보여 주는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그는 어느 회동에서, GE 회장 잭 웰치와 만나, "세라믹 필드에서 우리를 파리 쫓듯 내몰아 버린 회장님의 솜씨를 잘 기억합니다."라며 씁쓸한 미소를 짓던 그를 회고하고 있습니다. 세계적 거인이 막강한 자본력을 무기로 삼아, 신생 유망 시장에서 단번에 판도를 장악하려던 그 기세를 보기 좋게 꺾어 버린 그의 솜씨에, 자신도 무척이나 자부심을 느끼나 봅니다. 그럴 만도 합니다.

 

얼마 전 저는 모 신문 기사에서, "대기업이 철수해 버린 시장에서 중소 기업 몇만 남아 버티다가, 결국 국제경쟁력을 잃고 모두가 패자가 되고 말았다"는 르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기사 내용의 정확성, 논리 전개의 치밀성, 의도의 공정성 면에서 적지않은 의심이 드는 컨텐츠였지만, 한 가지 사실만큼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호조건이 회사를 에워싸고 있다 해도, 그에 안이하게 머무를 게 아니라, 불 같은 투혼과 근성, "살아남는 데 필요한 수준으로 적당히 하고 그칠 게 아니라, 무조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 최상의 노력을 다하고 본다."는 자세로 임해야만, 결국 장기 생존을 도모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나모리 회장은 일본 역사에서 언제나 빛났던 장인 정신을 다시 환기합니다. 사무라이들이 세계 수준에서도 최상의 전투력을 뽐낼 수 있었던 건, 무사 개인의 기량도 기량이지만, 그 무사가 실전에서 휘두르고 부리는 칼의 완성도가 뛰어나서라고 합니다. 칼 뿐 아니라, 도자기, 공예품 등의 미적, 실용적 가치도, 동시대의 그 어느 지역에서 생산되던 제품에 못 미칠 바 없었다는 게 회장의 일관된 주장입니다. 일본이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건 돈이나 화려한 경제적 번영상이 아닌, 바로 어느 순간에도 최선을 다한다는 분투의 정신, 불굴의 의지라고 강조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일본의 평균적인 직장보다야 우리 한국의 업무 강도가, 개별 기업에 따라 차이는 있겠으나 조금이라도 높으면 높았지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평균적인 일본의 경제활동 인력보다 우리 한국인들의 의지와 능력, 의욕이 높은 것 역시 사실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 책의 주장은 사실 특별히 새로울 것은 없습니다. 다만, 이나모리 회장의 개인 이력과 성취는, 전 세계를 통틀어 놓고 봐도 그에 필적할 만한 것이 드문 초인적 수준입니다. 행여 직장에서 회의와 의욕 부진이 나를 엄습해 올 때, 이 책을 펼쳐 놓고 재기의 각오를 다진다면, 보다 일찍 본연의 나 자신 모습으로 복귀할 수 있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