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이저가 빌리를 만났을 때 - 자폐증 아이와 길고양이의 특별한 우정
루이스 부스 지음, 김혜원 옮김 / 영림카디널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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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부스, 그리고 루이스 부스는 특별한 데 없는, 평균적인 소시민으로서의 삶을 사는 영국인 부부였습니다. 이 두 분에게 특별한 데가 혹시 있다면, 그것은 서로가 서로를 끔찍히도 사랑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부부가 서로를 넘치도록 사랑하는 게 그다지 당연하게만은 여겨지지 않는, 참 묘한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이기에, 겉보기에 평범해 보이는 이 부부는 , 그 사실 하나만으로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들 중 한 쌍이었던 셈이었어요.

그러한 사랑의 결실로, 부인 루이스는 어느 날, 한 남자의 아내가 접할 수 있는 가장 기쁜 소식을 듣게 됩니다. 첫아이의 임신 소식이고, 뱃속의 아이는 아들인 것으로 추측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 남편의 사랑을 듬뿍 받아 온 아내였고, 첫 아이를 출산한 후 세상 어느 어머니가 다 그러하듯, 자신이 낳은 아이를 품에 안고 최상의 행복을 누릴 기대에만 부풀어 있던 루이스. 그런데 왠지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달이 차서 산부인과에 입원했지만, 난산도 그런 난산이 없는 것입니다. 사흘이 되어도 쉽게 정상적인 출산(자연 분만)에의 가망이 보이지 않자, 의료진은 루이스에 대해 전신 마취 끝에 제왕절개 시술 쪽으로 결단을 내립니다.

루이스는 기진맥진, 출산 후에도 하루 정도 정신을 차리질 못합니다. 기억과 주변의 증언에 의하면, 마구 웃으며 엉뚱한 말도 했다고 합니다. 갓 세상에 나온 아이는 이 때문에, 엄마가 아닌 간호사의 품에 안겨 며칠을 보내야 했습니다. 루이스가 기력을 회복하고 정상적인 심리를 회복하고 보니, 이번에는 아이가 뭔가 예사롭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갓 태어난 아이가 울어대는 건,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당연한 모습이긴 합니다. 그런데 루이스와 남편 크리스 사이에서 난 이 아이(4kg가 넘엇다고 하니 대단한 우량아였죠)는, 그냥 우는 게 아니라 고통 때문에, 불안한 마음 때문에 거의 울부짖는 듯한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엄마가 안아 줘도, 혹은 혼자서 실컷 울다 지쳐서라도, 아이는 울음을 그치는 게 보통인데, 이 아이는 도통 울음, 그것도 아주 성난 듯한 울음을, 그칠 생각을 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아직 젊은 나이인데다 경험도 없고, 주위의 의료진이나 시부모님, 친정 부모님 등도 적절한 도움을 줄 수 없었으니, 루이스가 얼마나 불안해했을지는 짐작이 갑니다. 우리는 모든 어머니들이, 처음부터 어머니로 태어난 양 아이를 능숙하게 돌보는 줄만 알지만, 사실은 많은 초보 엄마들이, 다양한 이유에서 그리 매끄러운 육아를 행하지 못합니다. 하물며 루이스처럼 특수한 아이를 맞은 엄마는 말할 것도 없이, 큰 패닉에 빠지게 되죠.

하지만 루이스 부스라는 이 여인, 어머니, 아내의 위대함은 여기서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그녀는 부족한 대로 자신의 힘과 의지, 지력을 총동원하여, 대체 엄마와 친해지려 들지 않고 이처럼 무서워하는(혹은, 그렇게 보이는) 아이의 증상을 먼저 알아 보려 합니다. 아이는, 우리가 흔히 자폐증이라고 알고 있는 정신적 특질을 안고 태어났고, 이 병을 가진 아이가 흔히 그러하듯, 주위 환경에 전혀 적응할 줄을 모르고, 자신의 불안과 두려움, 감정의 격동에만 사로잡혀 있다는 걸, 엄마 루이스는 알게 되었습니다.

루이스가 절망한 건 아이가 장애아라서만은 아닙니다. 내가 내 속으로 낳은 이 아이를 그리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닌가, 결국 엄마로서 자격이 부족한 것 아닌가, 그렇다면 그런 엄마에게서 태어난 이 아이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너무도 무서워집니다. 그러나 그녀는, 두려움에 매몰되지 않고, 아이를 위해, 그리고 자신의 인간적인 책무와 그를 통한 존엄을 회복하기 위해, 이 시련에 당당히 맞서고자 합니다.

엄마라고 해서 아이를 당연히 사랑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아무리 충실한 엄마라고 해도, 몇몇 순간에서는 지고지순의 모성애를 높치는 때도 있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읽은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에서는, 헤이즐이 극심한 고통(폐암)을 겪을 때, 그 어머니가 이런 대사를 하는 게 나옵니다. "여보, 난 이제 어머니 노릇을 더 이상 못할 것 같아요." 모성애가 위대한 것은, 이런 지극히 인간적인 존재로부터, 가장 신적인 존엄이 도출된다는 점입니다. 평범한 이들이 위대한 일을 하는 게 대단한 것이지, 처음부터 대단한 사람이 그 가치를 발하는 건 사실 칭찬할 일이 못 됩니다. 여성이 위대한 건, 바로 어머니가 됨과 동시에 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로 탈바꿈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아 이 프레이저는 어느덧 몸이 훌쩍 자랍니다. 겉으로 봐서는 아역 탤런트를 해도 될 만큼 사랑스러운 외모입니다. 그런데 말만 몇 마디 나눠 보려 하면, 아이는 이상 반응, 부적응 행태를 보인 후, 자기만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입니다. 머리 속에 어떤 명철한 사고와 숭고한 감정이 오가는지는 모르지만, 프레이저를 지켜 보는 제 3자는 "아이가 좀 부족하군." 같은 판단을 쉬이 내릴 만큼 표현과 말이 어눌하기 짝이 없습니다. 게다가 프레이저는 근육 발달 장애로 잘 걷거나 서지를 못합니다.

기적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찾아 왔습니다. 부스 부부는 신혼 시절부터 좀 이상한 고양이(먹고 자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를 길러 왔는데, 부모님과도 잘 소통하려 들지 않는 프레이저가 유독 이 고양이와는 친해지려 들더라는 거죠. 다만 이 고양이 녀석이 나이도 많은 데가 성격이 비협조적이어서, 프레이저를 멀리하고, 따라서 프레이저를 도와 줄 유익한 기회를 살리질 못합니다. 루이스와 크리스 부부는, 우연히 고양이(임대 주택에서 유기된) 입양에 관한 소식을 듣고 관계자와 의사 타진을 하기에 이릅니다. 프레이저는 신통하게, 누가 봐도 닮아 보이는 두 고양이 빌리와 베어를, 실물이 아닌 사진만 보고도 귀신 같이 구별해 냅니다. 부부는 이에 큰 희망을 갖고, 두 고양이 중 빌리를 입양하기에 이릅니다.

기적은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빌리와 프레이저는, 종(種)이 다른 두 영혼이 어떻게 이처럼 친밀하게 교감할 수 있을까 싶은 경탄을 자아내며, 둘도 없는 친한 사이로 발전합니다. 프레이저는 본디 고양이라는 동물 전체에 애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이 빌리라는 애가 (고양이의 통성에 반하게도) 프레이저라는 아이한테 각별한 관심을 보인 덕에, 프레이저는 본격적으로 나 아닌 다른 존재와 소통이란 걸 하게 됩니다. 소통이란 첫 걸음이 힘들 뿐, 한번 물꼬가 트이고 나면 다음 단계는 그리 어려운 게 아닐 수 있습니다.

고양이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이 책에서 묘사된 빌리의 일거수일투족에 열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빌리를 어둠에서 구해 낸 건, 고양이 빌리 외에도, 빌리를 만나기까지 아무와도 교감을 나누지 않던 프레이저를 잘  다독이고 극한 상태에 빠지지 않게 도와 준 여러 은인들의 기여를 빼 놓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간호사 헬렌은, 제 개인적 판단으로는, 부모님을 제외하고는 프레이저에게 가장 고마운 봉사를 해 준 사람입니다. 세상에는 제 직분을 그저 건성건성, 시간만 때우고 급여만 챙기는 자가 있는가 하면, 직업의 본분에 충실하여 인간으로서 발휘 가능한 최상의 존엄을 실현하는 위대한 이도 있습니다.

과연 생명체에는, 종을 초월하여 오가는 어떤 공통된 영혼의 교류가 존재하는 것인가. 자폐아에 아무 관심도 주지 않고, 한 영혼이 온전한 성장을 하건 말건 방관하는 인간이란, 일개 고양이만도 못한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랑스러운 외모를 가진 아이, 그리고 귀여운 생김 못지 않게 그 마음이 참 예쁜 고양이 빌리를 보며, 약하고 가냘픈 존재가 서로를 돕고 보완해 가며 이 거친 생존의 장을 헤쳐 나가는 모습, 인간과 자연의 섭리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은 성찰을 하게 되는 계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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