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마지막 순간 - 삶의 끝, 당신이 내게 말한 것
브렌던 라일리 지음, 이선혜 옮김 / 시공사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처음에는 임종을 앞둔 환자 여러 사람을 치료하고 그들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본 어느 의사의 경험담인 줄 알았습니다. 보통 이런 책에는 감동적이고 뭉클한 사연이 담겨 있어서, 읽는 이들은 한바탕 눈물을 쏟을 각오를 하고 있어야 하죠. 그런데 이 책은... 물론 그런 사연도 안 나오는 건 아니지만, 한 분의 베테랑 의사가 아무 권위 의식, 거품 없이, 100퍼센트 자신을 다 드러내며 의사로서의 고충을 털어 놓고, 이를 살짝 사회 문제로까지 시선을 연장하여, 사회 전체적인 일정 합의를 유도하는 동기도 은근 풍기는 그런 구성이었습니다. 영어 원제도 그래서 그저 <One Doctor>입니다.

저자는 내과전문의이고, 이름 높다는 뉴욕 프래즈비태리언 병원의 부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분이라고 합니다. 한국에서 이런 직위에 있는 분이면, 솔직히 의사로서의 양심이나 본분을 염두에 두기보다, 사업주체로서의 경영진 눈치를 보기가 쉽죠. 그 정도 직위에 못 오른 채 자리보전만 하고 있는 사람도, 되지 못한 권위의식에 젖어 환자와 손아래 직원에게 함부로 구는 사람을 종종 봅니다. 그러나 저자는, 어디까지나 의사의 본분은 아픈 사람을 낫게 하는 데에 그 일차적 비중이 있으며, 지위와 나이를 불문하고 의사란 현장에서 환자를 돕는 데 최우선의 성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요 위의 "주장합니다."라는 표현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이 책에는, 좀 기이하게도 딱부러지게 저자 자신의 주장을 하는 대목이 없기 때문입니다. 책은 주로 저자가 직접 겪은 경험담과, 그 경험 중에 자신이 가졌던 느낌, 떠오른 생각, 그 중에서도 반성의 토로가 대부분입니다. 영화처럼 눈 앞에 그려지는 생생한 묘사를 읽으며 "원 별 소동이 다 있군." ," 햐, 이렇게 진상 환자나 비정상 멘털 케이스가 맨날 찾아온다면 의사 이거 정말 할 짓이 아니겠군." 같은 가벼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 읽을 때는 말입니다. 그런데, 두 번 세 번 읽어 보니(이야기가 생생해서 넘기다 보면 자연스럽게 거듭 읽게 됩니다), 그게 아니었습니다. "맙소사, 그래서 결국 뭐라는 거지? 이 의사선생님(저자), 이 분 완전 부처님이시구먼!" 같은 놀라움이었네요.

미국은 세계 최고의 의료 수준을 자랑하는 선진국입니다. 미국 의사를 못 믿으면, 세상 어느 나라 의사도 못 믿을 겁니다. 그런데, 사람 몸이란 게 지극히 복잡하고, 증상이라는 게 이를 유발하는 원인이 한둘이 아닌데다, 아직은 의학 발달이라는 게 만족할 만한 레벨로 나아가질 못한 탓에, 여간 능숙한 의사라도 오진이 그렇게 많답니다. 서투른 의사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최고 수준의 민완 의사라도 그렇다는군요. 여기에 시스템상의 문제, 개인 레벨에서의 경솔함과 불순한 동기까지 곁들여지면 문제는 더욱 꼬이고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문제가 악화될 대로 악화된 후 이 저자를 찾아 온 환자들은, 오히려 "내가 존경하는 모 선생님은 그렇게 말씀 안 하셨는데, 왜 당신신이 내 남편을 이꼴로 만들어 놓은 거죠?"라며 저자 같은 정직한 의사를 곤경에 몰아 넣습니다. 저자는 이런 상황에서, 진정 부처님 같은 인내를 발휘하여, 상황을 설명하고 대안을 제시합니다. 읽다 보면 보는 사람 입에서 다 욕이 나오는데, 저자는 그저 초인적인 참을성으로 이 모든 난장판을 수습합니다.

현장에서 유능한 의사되기도 지극히 힘든 판에, 인격적 완성까지 기대하는 건 물론 무리입니다. 아니, 명의보다 더 드문 게 오히려 인격자입니다. 진정 명의라고 하면 그에 합당한 보수는 금전으로 책정할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의료 체계라는 게 평범한 의사들의 노고에조차 제대로 된 수가를 지불하는 구조가 아니죠. 이런 마당에 의사들한테만 무리하고 이상적인, 교과서적인 서비스를 강요하는 건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처사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 의사들 개인 차원에서도 개선해 나갈 여지가 있습니다. 엉터리 의사들이 상황을 망치지만 않는다면, 바로 이 브랜든 라일리 같은 분이 헛된 수고에 자신의 고귀한 정력을 낭비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의료 현실의 지적 뿐 아니라, 진료를 통해 만나게 된 다양한 인생들로부터 얻은 잔잔한 깨달음도 많이 나와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지역과 계층, 인종을 떠나 인간 보편에 통하는 어떤 진리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저자는 또한, 의료인들에게 자신이 인간 일반 우위에 군림하는 우월자가 아니고, 모든 문제를 의료 문제로 환원하여 보는 고압적인 습관을 고치고, 약물과 생리학적 치료를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주제넘게 나서지 말 것을 권합니다. 의료인은 어디까지나 보건 섹터의 한 부분을 관할하는 기술자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하고는 있으나, 그 어조가 단정투가 아닌 권유의 목소리이며, 자신이 겪은 어려움도 마치 당연한 직무 수행이라는 듯 겸손한 톤으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자칫 독자는 그 요지를 놓칠 수도 있습니다. 의료 문제는, 우리가 질병이나 사고의 잠재적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는 한 우리 모두의 문제이기에 이 책은 누구나 한 번 읽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또, 이 책은 "의술은 인술"이라는 오랜 원칙을 나중에 가서 잊기 쉬울, 의예과 학생이나 이제 입학을 앞두고 있을 어린 졸업생이, 아직은 순수할 그 영혼에 좀 새겼으면 하는 좋은 가르침으로 가득합니다. 좋은 의사가 많은 사회가, 분명 살기 좋은 사회이기도 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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