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첩 클라우즈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17
애너벨 피처 지음, 한유주 옮김 / 내인생의책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아 름다운 소녀가 있습니다. 이 소녀는 어느 날, 아직도 사형 제도가 엄존하고 그 제도의 고수에 대해 가장 긍정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미국 텍사스 주의 어느 사형수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소녀는 이 사형수에 대해, 그저 우연한 경로로 웹을 통해 접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소녀는, 그 사형수가 capital punishment에 처해지게 된 경위(아내의 부정에 대한 격분 끝에 우발적 살인[고살. 故殺], 이에 부수하여 증인이 될 위험이 있는 이웃에 대한 모살[謀殺])를 알고, 그에 대해 깊은 공감을 갖게 됩니다. 공감이라니 무슨 일일까요? 사형수는 거의 자신의 아빠만큼이나 나이를 먹은 남자고,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사람의 목숨을 둘이나 앗은 흉악범인데요. 그 이유는 곧 자신의 입을 통해 밝혀집니다.

소 녀가 자기 입으로 아름답다고 말하는 대목은 없습니다. 하지만 소녀는, 학교 동급생 중 최고의 킹카인 맥스 모건이 자신에게 한 눈에 반하게 만들었죠. 여자애들이라면 누구나 친해지고 싶고, 가까운 거리에서 말이라도 한번 걸어봤으면 하는 선망의 대상이, 자신 때문에 아무 일도 못할 만큼 빠져들게 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이 소녀가 학교 제일의 퀸카냐면 또 그건 아닙니다. 맥스 모건이 제 입으로 "너 여태 어디 있었니?"라고 말할 정도니까, 아마 특별한 개인 사이의 상성(相性)처럼, 그저 자신이 부족하다 싶은 부분을 강렬하게 보충해 줄 것 같은 그 개성에 맥스가 그저 이끌렸을 수도 있습니다.

이 쯤에서 짐작하시겠지만, 소녀는 영특한 아이입니다. 그렇다고 아주 학업 성적이 뛰어난 것 같지는 않지만, 이것은 소위 "포텐"이 터지지 않아서입니다. 동성 친구 로렌이 헛갈려하는 어려운 어휘를 교정해 주며 웃기도 하고, 저 맥스 모건에게 (그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힘든) 농담을 던지며 상대를 측은하게 바라보기도 합니다. 텍사스의 사형수에게 쓰는 편지에서, 고살과 모살의 차이를 논하는("아저씨, 맨슬로터에 비해 머더가 더 중한 형으로 처리되죠. 하지만 아저씨가 진짜 후회하는 건 사랑하는 아내를 죽인 일이지, 무례한 이웃 아줌마에 대한 게 아니겠죠?") 걸로 봐서 또래에 비해 조숙한 아이임이 틀림 없습니다. 어쩌면 그저, 두 분 다 변호사인 양친의 영향을 받을 것일 수도 있습니다.

지 적인 여성은 보통 지적인 남성에게 끌리죠. 조이라는 익명을 소설(즉 사형수에게 보내는 편지) 안에서 계속 쓰고 있는 소녀는, 그래서인지 킹카 맥스에게 별로 마음이 안 갑니다. 맥스는 완전히 자신에게 홀딱 빠져 있고, 이런 맥스와 공인 커플이 되면 친구들 사이에서 위상이 한참 올라갈 거라는 속물적 기대가 들 만도 한데, 소녀의 내심은 정작 다른 데 있습니다. 그녀는 사실 애런이라는 똑똑한 상급생에게 마음이 팔려 있었는데, 알고 보니 애런은 맥스의 형이었던 겁니다.

소 녀 "조이"는 자기 입으로 아름답다고 말한 적이 없지만, 이 형제가 나란히 그녀에게 반한 걸로 봐서, 분명 평균을 훨씬 뛰어넘는 육제적 매력이 있는 아이입니다. 맥스는 잘생겼지만 아주 단순한 아이입니다. 사랑의 쟁취에 전략도 노림수도 없이 그저 좋아하는 아이를 두고 대뜸 고백부터 합니다. 그러면서도 순박한 데가 있어서, 찬스가 숱하게 있었지만 이를 악용하지는 않습니다(공교롭게도 그때마다 엄마 등 누군가의 방해를 받지만, 결정적인 건 아니었죠). 잘 이해가 안 되지만, 소녀 조이가 자신에게 완전히 마음을 안 주고 있다는 걸 눈치챕니다. 하지만 그저 기다리고, 틈이 날 때마다 자신이 그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전달하고 또 전달합니다.

조 이에게는 두 동생이 있습니다. 갓 취학한 여동생 소프와, 아직 부모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남동생 도트입니다. 소프는 언니와 동생 사이에 끼어 관심을 못 받는다고 불만이 대단하고, 도트는 안타깝게도 뇌막염 때문에 청각 장애가 있습니다. 하지만 피가 어디 안 가는지, 둘 다 지독하게 솔직하고 톡톡 튀는 개성을 도무지 주체하지 못합니다. 엄마 역시 아빠처럼 변호사였으나, 도트가 저렇게 된 이후에는 가사와 육아에만 전념합니다. 이 사연은 소설 후반부에 나오는데, 독자는 처음에 왜 엄마가 시댁 식구(즉 조이, 소프, 도트의 친조부모)들과 사이가 안 좋은지, 맞벌이가 많은 영국에서 왜 이 여성이 집에만 있으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될 수 있습니다.

조이도 가정에 문제가 있었고, 아빠가 로펌에서 정리해고를 당하는 바람에 이제 더 큰 문제가 생기려 하는 참이지만, 맥스 네(즉 애런 네)는 더 심각합니다. 맥스의 엄마(곧 애런의 엄마이기도 한) 샌드라는 착하고 열린 마음을 지닌 분이지만, 남편을 잃은 후에는 거의 알콜 의존증이라고 해도 될 만큼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맥스의 아빠는 새 애인과 눈이 맞아 집을 떠난 상태이며, 다만 수입이 넉넉하여 자신의 전처 소생 두 아이에게 거액을 지원할 능력이 됩니다. 애런은 영리한 아이답게 현실을 인정하고 공부에만 몰두하지만, 착하고 단순한 맥스는 자기 분노를 참을 수 없습니다. 이런 두 가정의 소생이, 둘로서만 만나도 보는 이가 위태위태한 마음인데, 지독한 비극인 게 셋으로서 만났다는 사실이죠.

자 이제 다시 처음에 꺼낸 화제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조이는 이런 이야기를, 사람을 죽이고 사형 선고를 받은 어느 중년 남자에게, 지극히 다정다감한 어조로 편지를 통해 털어놓고 있습니다. 대체 이유가 뭘까요? 부모에게도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그것도 사람의 목숨을 앗은 범죄자에게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다니요. 이 점은 아마 소설을 끝까지 다 읽고 나서도 이해 못할 독자가 많을 줄 압니다. 모티브는 다름 아닌 죄책감입니다. 대외적으로는 이미 정리된 일이고, 무덤까지 갖고 갈 가능성이 큰 비밀, 그러나 "그 일"로 인해 상처입고 훼손된 양심은 여전히 두 눈 크게 뜨고 행위자를 응시합니다. 어린 나이의 조이는,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보속을 갈구합니다. 하지만 사제를 찾아갈 마음의 용기는 나지 않습니다. 죄책감이 크긴 하지만, 그런 무서운 죄를 저지른 자신을 이해할 수 있을 사람이라야 그에게 죄를 털어 놓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텍사스의 사형수를 고른 이유는 이것이 답니다. 실제로 사형수는 소설 속에서 한 번도 제 목소리로 등장하지 않는, 그저 풍경보다도 낮은 비중이고, 과연 실존인물이기나 한지도 의문스럽습니다. 중요한 건 소녀 조이가 이 사람에게 철저히 자신을 투영하고 있다는 점이죠.

왜 소녀가 이 자에게 자신을 투영할까요? 그것은... 바로 이 소설의 핵심 이벤트이기도 하지만... 소녀가 "누구"를 죽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과연 "살인"이 무엇인지, 인과관계의 연쇄를 어느 범위까지 잡아야 하는지, 그 책임 귀속은 어느 원칙에서 이뤄져야 하는지는 아주 어려운 문제로서 현생 인류의 지혜로는 그 해결이 아직도 불가능합니다. 아무튼 소녀의 여린 양심은, 고해의 대상을 찾아야 할 만큼 사정이 절박합니다. 1996년 작 영화 <슬리퍼스>에는, 고해실에 몰래 숨어 든 동네 문제아 소년들이, 자신들을 사제로 착각한 어느 아주머니로부터 뜻하지 않게 그 사연을 듣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고해(?)를 다 마치고 이 아주머니는 한 마디를 남기죠. "들어줘서 고마웠다. 얘들아." 사정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아주머니는 자신의 일을 그냥 진행했던 겁니다. 상대의 나이, 신분, 성숙도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한 영혼과 다른 영혼이 교감, 소통한다는 그 사실이 중요하다는 걸 이분이 아셨던 까닭일 겝니다.

애 런은 소설 마지막에 자기 목소리로, 1인칭 시점으로 등장하더군요. "사랑에는 반드시 희생이 따르는 법이야." 이 대사는 왠지, 매컬로 여사의 <가시나무새>가 떠오릅니다. 그 작품엔 이런 말도 나오죠. "증오는 그냥 받아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사랑은 대체 어떻게 다뤄야 할지 갈피가 안 잡힌다. 증오는 때가 되면 잦아들고 멈춘다. 그러나 사랑은 도무지 그칠 줄은 모른다. " 이 소설은, 한창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세상 번뇌와 추악함을 몰라야 할 소년소녀들이 겪는, 가장 비극적인 꼬임과 얽힘의 사연입니다. 독자는 "아니 대체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라며 미스테리를 푸는자세로 계속 일어나가지만, 사실 딱히 쇼킹한 반전은 없습니다(그런 건 있어서도 안 되죠). 푸른 하늘은 석양을 맞이하여 케첩처럼 붉은 빛을 띱니다. 하늘에 뜬 케첩은 구름을 물들이고, 끈적한 질감으로 시야에 위화감을 더합니다. 그 위화감은 곧 내 영혼에 침투하여, 옷에 묻어 잘 지지 않는 케첩 자국처럼 상처를 돋웁니다. 우리는 글러나 이 상처를 딛고, 달래고, 새 살을 키워 제 삶을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Life Goes on. 그게 바로 앞서 간 망자의 희구이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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