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롯 - “예수는 정치적 혁명가였다” 20년간의 연구로 복원한 인간 예수를 만나다
레자 아슬란 지음, 민경식 옮김 / 와이즈베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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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아마 기독교 신자라면 "열심당원"이라는 말에 익숙할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서에서 "열심당원"이라면 12사도 중 한 명인 시몬을 이야기합니다. 이 "열심당원'이라는 용어는, 문자 그대로의 해석이라면 다소 시대착오의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왜냐 하면 "열심당"이라는 단체는, (이 책에 잘 나와 있는 것처럼) 예수의 사후 몇 십 년 후에 비로소 생긴 단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살아 생전에 예수를 따르고 모신 제자가, 예수 사후에 생긴 단체의 구성원일 수는 없기 때문이죠.

그러나 공식적인 단체 결성 이전에도, 그런 이념을 막연하게나마 공유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 피 끓는 열정으로 의기투합했던 무리들은 아마 있었을 겁니다. 비단 고대의 팔레스타인이 아니라도, 역사의 격변기, 시대의 모순이 극에 달한 혼란스러운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면, 동과 서를 떠나 언제, 어디서도 볼 수 있는 것이, 젊은 혁명가들의 결사입니다. 이런 결사가 반드시 공식적인 절차를 밟기 전이라도, 문자 그대로의 동지(同志)란 보편적인 실체, 현상입니다. 따라서 "열심당원"이란 고유명사일 뿐 아니라,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보편명사이기도 합니다.


복음서를 글자 그대로 읽고 이해한다면, 구태여 시몬 한 명에게만 붙여진 칭호가, 그렇지 않은 나머지 11인의 사도에도 해당할 가능성은 적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열심당원이라면 이 "시몬" 한 사람에게 고유한 신분으로 생각합니다. 바로 이런 태도가, 성경의 기록을 "역사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종교적으로 받아들이는 "교의적 시각"입니다. "교의적 시각"에 의해 바라본 예수가 바로 "교의적 예수"입니다.


반면, 성경이라는 기록을 문자 그대로 믿지 않고, 성경 외 다른 기록의 정확성, 신빙성에 의해 교차 검토를 행하거나, 보편 역사과학적 방법론에 의해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기준을 적용하여, "비판적으로. 과학적으로" 구성하는 과정을 "역사적 시각"이라고 하며, 이런 관점에서 바라본 "예수"를 "역사적 예수"라고 부릅니다. "교의적 예수"가 교파의 관점에 따라 다른 내용과 색채, 함의를 지니듯, "역사적 예수" 역시 논자에 따라 천차만별의 스토리를 지닙니다.




이제 이 책의 저자 레자 아슬란을 보십시오. "레자'란 이름은 페르시아계, 이란계에 흔합니다(우리는 지난 세기 팔레비 왕조의 이란에서 유독 레자라는 이름의 "샤"를 많이 접한 바도 있습니다). 그는 이름에서 드러나듯 이란 계 혈통이며, 몇 번의 개종을 거쳐 지금은 다시 무슬림 신앙을 간직하고 있으며, 다만 이란 이슬람 혁명의 기조와는 상충하는 가풍을 지닌 가문을 배경으로 둔 인사입니다. 학문적 커리어는 녹록지 않습니다. 자신이 학위를 마친 코스에서 우등 성적으로 졸업한 실력이며, 인문 분야의 여러 학위를 손에 넣고 있습니다. 재능도 열의도 비상한, 활기와 창의력으로 충만한 정신의 소유자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정신적 배경을 가진 분이, 그리고 아직 학자로서는 다소 젊은 축으로 여겨지는 분이, 자신의 버전으로 "역사적 예수"를 논하겠다며 쓴 작품이 바로 이 책입니다. 이슬람 신앙을 아직도 진지한 정신적 축으로 간직한 사람, 그리고 (비록 망명자의 혈통이지만) 현재 미국과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적성 국가인 이란을 육적(肉的)인 조국으로 간직한 그가, 예수에 대해, 그것도 백인 기독교 신자들의 정통 주류와 크게 벗어나는 톤으로, "나만의 역사적 예수"론을 전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찬성이든 반대든, 여기에 첨예한 관심이 쏠릴 수밖에요. 특히 남부 보수 기독교 벨트를 애청자의 거대 셰어로 보유한 팍스 TV가, 이 분을 끌어들여 적대적이고 직설적인 인터뷰를 시도하고 그 결과가 전미(全美) 지역에 퍼져 나가자, 여론도 들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평가에 대해서는, 대체로 이성적이고 차분한 어조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상대의 공격에 대응한 아슬란 박사의 손을 들어 주는 이가 많았습니다.

물론 그가 이 논쟁적인 책에서 펼친 역사적 예수론의 타당성은 또 별개의 논의를 거쳐야 합니다. 자, 여기까지 오도록 많은 우회적 논의를 거쳐야만 했지만, 다시 저 위에서 제가 말한 "열심당원"이란 개념을 떠올려 보죠. 열심당원이란, 기독교의 신조와 주의와는 상당히 대조적인, 폭력 혁명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행동파 젊은이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는 "당시 그런 사람들이 있었나 보다" 하는 정도로 사도 시몬을 연상하는 정도지만, 이 저자 레자 아슬란은 그 단계를 훨씬 넘어, 12사도의 상당수, 나아가 예수 자신부터가 사실상의 젤롯, 열심당원이었다는 데까지 논의를 확장합니다! 그가 끌어 대는 논거도 다채롭습니다. 1세기 초 팔레스타인의 정세, 사회 분위기("변방의 구멍'이라는 멋진 표현을 보십시오), 성경 안에서 발견되는 숱한 기술들("성전 정화" 등)을, 대단히 설득력 있게, 소설식으로 재구성하면서, 그는 "불의를 보고 참지를 못하며" "뜻한 바는 반드시 실행에 옮겨야 하는" 열혈 혁명가 예수의 초상을 핍진하게 그려냅니다. 박력 있게 그려지는 건 예수 뿐 아니라, 주변 인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성경 본문,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꾸려진 소설과 영화에서, 마치 무기력의 상징처럼 묘사되어 온 빌라도 총독까지, 저자 아슬란은 냉철하고 설득력 가득한 어조로 마치 새로운 사실주의 결정판 픽션을 하나 꾸려내듯, 1세기 초반의 근동 세계를 생생히 묘사합니다.

비판하는 이들은 단지 근본주의 진영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종래 "역사적 예수"를 그리느라 많은 수고와 열정을 바쳐 왔던 역사학자들도, 레자 아슬란의 시도에 대해 "학문적으로는 새로운 게 없음"을 지적합니다. 다만 모두가 입을 모아 칭찬하는 미덕이 있죠. 그것은, "읽다 보면 너무도 재미있고, 이 서사의 활력이 마치 역사적 신빙성을 대신이라도 하는 듯하다"는 공감입니다. 진실은 시간 여행의 기술이 발견되기까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중요한 건, 예수의 아이덴티티를 어떻게 잡건 간에, 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용납지 않은 그의 신념과 이상만은 불변이라는 점입니다. 이 결론은 어느 누구의 입과 귀를 통해서도, 이천 년이 넘게 유지되어 왔습니다. 기적이라면, 신비라면, 바로 거기에 있을 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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