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을 위한 이솝우화 원앤원북스 고전시리즈 - 원앤원클래식 5
이솝 지음, 이선미 옮김 / 소울메이트 / 2014년 1월
평점 :
품절


이솝(아이소프스)는 본래 동화작가가 아니었죠. 고대 그리스에 동화라는 문학 장르가 있었을 리도 없고, 이솝 자신의 창작 의도도 픽션을 통해 동시대인들을 계도하는 쪽에 있었을 테니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치열한 생존 경쟁의 장에서 자기계발과 원활한 처신의 한 수에 여념이 없는 우리 어른들을 위해 재조명, 재해석, 재편집을 한 책이 필요합니다. 이 책 <성인을 위한 이솝 우화>가 바로 그런 책입니다.


어 렸을 때는 개미나 베짱이가 말을 한다거나, 은혜를 반드시 갚는 동물들의 모습을 보고, 재미와 교훈을 정리하는 데에 주안이 맞춰져서, 이솝 우화의 밝고 건전한 모습만 머리에 남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책을 통해서 원형에 가까운, 그리고 성인들에게 제시되어도 큰 무리가 없는 내용까지 다 접한 느낌은, 이솝 시대에나 지금이나, 세상은 어리숙한 자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는 무서운 곳이며, 그런 정글 같은 세상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지혜와 판단력, 융통성을 날카롭게 가다듬어야겠다는 일종의 각성이었습니다.


며칠 전, 인터넷에서 "아기코끼리를 잡아 먹는 사자.", "(먹잇감인) 얼룩말에게 역습을 당해 부상당한 사자"의 동영상이 화제가 된 적이 있죠. 인터넷이 대중화된 이래 이런 동영상은 네티즌들에게 언제나 인기입니다만, 이런 컨텐츠가 대중의 관심을 모을 때마다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는 점은, 저런 약육강식의 법칙이 냉연히 전 공간, 전 시간을 지배하는 동물의 세계로부터, 인간들은 그 오래 전부터 지녔으나 문명화 과정에서 잊고 지낸, 동물적 생존 본능을 일깨우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약히고, 느리고, 둔한 자는 반드시 강자의 먹이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비록 약자로 태어났다 해도, 꾀와 슬기를 적절히 발휘하면 강자를 능가할 수도 있다는 이치도 우리에게 깨우칩니다.


먹 이사슬의 관계가 분명한 동물들 사이의 관계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깊은, 때로는 비정한 인간사의 교훈을 일깨우지만, 이 이솝 우화는 "너 자신을 알라"는 본연의 철학적, 윤리적 각성도 우리에게 던져 줍니다. "나 자신을 아는 것"은 성인군자에게도, 우리 같은 범속한 일상인에게도, 너무나 어려운 원초적 태스크입니다. 이 책의 겉날개에도 나와 있듯, 바로 저 근본적 과제를 우리에게 던져 준 철학자 소크라테스 역시, 감옥 안에서 이 이솝 우화를 운문화하는 작업을 하면서 무료함을 달랫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산문이 대체로 질이 떨어지는 포맷으로, 운문을 문학의 정수로 보는 게 보통의 관행이었으므로, 그의 동기를 어렴풋하게나마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 책에 실린 우화들도, 예컨대 남들의 멋져 보이는 모습만 따라하려다 제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말 울음 소리를 내는 솔개(15)", 뒷감당할 일은 생각하지도 않고 사자를 가두어 놓다가 가축과 위신을 상실한 농부의 이야기(11), 자신의 분수를 착각하다가 목숨의 위협까지 받게 된 어리석은 행태를 풍자한 "독수리와 갈까마귀와 목동(4)", 춤을 잘 추는 원숭이을 따라하다가 모두의 분노를 산 낙타(50), 일시적인 성과와 본질적인 능력을 혼동한 당나귀(71) 등 다양한 소재를 통해 우리의 각성을 유도합니다. 근래 행동경제학과 인지심리학의 발전으로 다시금 확인하게 된 사실은, 사람은 객관적으로 오류가 분명한데도 유독 자신에게만은 넉넉한 가능성과 후한 전망을 하는 함정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이솝은 이미 2천 년을 앞선 시점에, 인간 보편의 자기 합리화의 오류를 날카롭게 지적하며, 최우선에 놓여야 할 과제가 "주제 파악"임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이 솝은 어디까지나 인간 본성의 단면을 풍자하는 의도로 이 작품을 쓴 게 분명하지만, 동물의 생태에 대해서도 박식한 면이 있었나 봅니다. 우리가 흔히 나쁜 기억력의 상징처럼 간주하는 동물 까마귀는, 실제로는 대단히 영리한 동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우화에서도, 까마귀는 제법 똑똑한 속성으로 꾸며진 반면, 갈까마귀는 언제나 바보짓을 하는 단골 배역에 놓입니다. 이솝 우화를 통틀어서 가장 빛나는 처세의 챔피언이라 할 여우이지만, 때로는 제가 제 꾀에 넘어가거나(14. 덫에 꼬리가 잘린 여우), 영리한 사람 특유의 자기 합리화를 한다거나(신 포도. sour grape), 머리를 짜 내어도 극복할 수 없는 태생의 한계를 절망한다든가(3. 여우와 독수리)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여우가 보여 준 최고의 술수는, 자신을 모략한 늑대를 두고 역으로 죽음의 함정에 몰아넣는 임기응변의 진수가 표현된 "늑대와 사자와 여우(90)"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반 면, 여우는 동료들로부터, 아니면 자신의 실수로부터가 아니면 좀처럼 패자가 되지 않는 패턴인데, 다만 강자에 안이한 신뢰를 보낸 일화인 독수리 편에서 무력한 모습을 유일하게 드러냅니다. 이 경우에도 용케 나무에 일어난 화재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불에 그을린 독수리 새끼들을 잡아 먹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 결과가 자신의 능력이 아닌 우연의 기회를 놓치지 않은 숭발력 정도였다는 게 눈에 띕니다. 자신의 머리로만 이뤄낸 복수극 기획이 아닌, 잠시 동안 찾아온 행운에서 최대한 이익을 취하는 민첩성이 그 비결의 전부인데, 엄밀히 말하면 이는 당한 만큼 되갚아 준 복수는 아닙니다. 다만 독수리에게 최대한 감정의 상처를 깊게 했다는 점에서, 동양적 정서가 물씬 배어나는 소극적 앙갚음에 가깝다고 하겠습니다. 다른 이야기에서 정교하게 eye foe eye의 균형적 플롯을 설계한 이솝의 이야기 솜씨치고는 좀 예외에 속하는 편입니다.


동 물들을 굳이 끌어대지 않더라도, 사람들만을 등장시켜 강렬한 깨우침을 주는 일화는 많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39. 허풍쟁이를 보면, 증인과 증거가 없어 아쉬울 뿐, 왕년에 로도스에서 놀라운 기록을 수립한 적이 있다고 큰소리치는 자를 향해,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 당장 여기서 해 보시오!"라고 일갈해 주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능력의 증명은, 실제로 눈 앞에서 시연해 보이는 방법만큼 확실한 게 없죠. 여기서 나온 유명한 어구가 라틴어로 Hic Rhodos, Hic Saltus 라는 말입니다("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 봐라!"). 무덤에 묻힌 숱한 시체들 앞에 서서, "이 사람들이 과거에 다 나를 따르던 자들이다."라고 하니까, "그거 손쉬운 자랑이구나. 무덤에서 저들이 아니라며 일어날 일은 없을 테니."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생각나죠. "76. 위선자"를 보면, 네가 손에 그걸 쥐고 있으니 무슨 신탁이 나오건 네 입맛대로이겠구나."라는 신의 통박이 나옵니다. 헐리웃 영화 "300"에서도 잠시 인용되지만, 고 대의 신탁 담당자들이 정치와 사회 문제 해결 과정에서 부린 농간은 이루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죠. 이솝 우화는 이처럼 사회 고발의 모습을 보이는 면도 있습니다. 이 점에서, 일부 일본인 철학자가 비판했듯, 이솝 우화를 그저 "현실 체념의 노예 철학"이라고 폄하할 수만은 없는 것입니다.


해학적인 우화도 있습니다. 헤르메스 신이 자신의 신상(神像)의 시장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 보기 위해 내려갔더니, 다른 신의 조각을 사면 끼워 주는 덤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는 이야기, 치료비가 없어 곧 죽음을 맞이할 가난한 환자가, "목숨만 살려 준다면 소 백 마리를 제물로 바치겠다"며 신에게 기원하는 걸 보고 걱정하는 아내를 향해, "정말 내가 일어나기라도 해서, 공물을 못 바치는 나를 두고 신들이 항의라도 할 일이 생기기나 할까?"라고 하는 모습을 통해, 가난한 자는 의료 혜택도 받지 못하고 죽어야 하는 현실, 나아가 비용을 쓴다 한들 과연 치료의 효험이 들을지 의심스러운 의사들을 그저 믿어야 하는 사회의 어두운 측면까지 풍자하는 작가 정신을 엿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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