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브 바이 나이트 : 밤에 살다 커글린 가문 3부작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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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역시 데니스 루헤인입니다. 베스트셀러 작가라고 해도, 대중에게 잘 먹히는 스타일 하나만 개발해서 몇 번이고 우리고 재탕하는 이들도 있지만, 데니스 루헤인은 언제나 다양한 시도를 벌이고, 그 때마다 독자에게 신선한 방식으로 흥미를 주며, 어 떻게 된 일인지 완독 후에는 마음 한 구석이 아려 오는 듯 감동까지 선사합니다. 매번 참신한 형식으로, 자신의 재능이 빚는 소산에 식상함이란 메뉴는 첨가되지 않음을 강조라도 하듯, 같은 작가의 솜씨가 맞나 싶게 변신을 꾀하지만, 언제나 그의 문장은 - 예컨대 이 작품처럼 수식과 내면 묘사가 최소한으로 절제된. 페이지터너를 의도한 철저한 스토리텔링에 치중한 작품 속에서도- 인생과 인간성의 본질을 꿰뚫는 "한 방의 문장"들이 촘촘히 막간을 수놓습니다.


"너를 위해 내가 죽을 수는 있지만, 명분 없이 살인을 할 수는 없다."

"매 순간 살아 있다는 게 운이며, 운이 곧 삶이다."

"사람이란 끊임 없이 변하는 존재 같지만, 오히려 어떤 경우에도 변하지 않는 게 인간인 법이다."


이 런 잠언에 가까운 멋진 명제들이, 딱 적소 적시에 등장하여 플롯의 밀도를 배가한다는 게 그의 일관된 성취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처럼이나 다양하게 스타일 변신을 꾀하면서도, 1/3 읽다 보면, 이름을 가려 놓은 채로도, "데니스 루헤인이군!"하며 느낌이 오는 것입니다. 다 읽고 나면 "역시, 이 작가의 솜씨에선 뭘 건져도 건지는 게 있군!" 하며 언젠가는 다시 한 번 정독을 하려니 마음을 정리하게 됩니다. 제가 언제나 그의 작품이, 그저 장르물에 그치지 않고 본격 문학의 완성도를 지니고 있다며 고개를 주억이게 되는 게 다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았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금 주법 시대 깡패들의 활극을 소재로, 또 뭘 짜내고 음유할 여지가 남아 있을까요? 이런 닳고닳은 테마를 고른 이상, 제아무리 날고 기는 루헤인이라고 해도, 이번에야말로 구태의연이라는 익숙하고 강력한 늪에 드디어 날렵한 다리를 떨구고야 말 공산이 컸습니다. 소설이 그 배경으로 삼은 미 동부의 번화한 거리는 "빠른 자(the quick)"와 "죽은 자(the dead)"로 그 신분과 운명이 나뉠 뿐이라는 점에서, 지난 세기 개척 시대의 와일드 웨스트와 다를 바 없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총집에서 총을 꺼내는 그 팔동작의 민첩도만이 "빠름"을 판단하는 잣대였던 시절과는 달리, 20세기 초반의 뉴욕, 보스턴, 그리고 그의 지배를 받는 하부 구조의 거리들(예컨대 먼 남쪽의, 쿠바, 푸에르토리코와 가깝고, 가까운 만큼 그 범죄적 운명과도 친근한, 플로리다의 템파 같은 곳)에서는, 머리의 회전도와 판단의 정확성이 더 핵심적인 중요도를 차지한다는 점 정도겠습니다.


조지프 커글린은 고위 경찰 간부의 귀한 막내아들로 자라났습니다. 물질적으로 부족함 없는 환경에서, 가장 좋은 교육을 받았고, 이는 그의 손위 두 형도 마찬가지였죠. 비록 키가 작긴 해도, 잘생긴 얼굴에 배짱도 좋고, 두뇌 회전도 비상했던 데다 본디 심성도 착한 아이였습니다. 이런 아이가 왜 범죄자의 운명, 그것도 가장 보잘것없는 강도질이나 하는 신세로 떨어졌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루헤인은 언제나 그러했듯 이 의문을 푸는 숙제를 독자에게 맡기지만, 힌트는 아주 공정하게 주고 있습니다. 얼핏 보아 부모의 불화라든가(양친은, 이 소설을 읽어나가는 독자 모두 알 수 있듯, 자식에 대한 사랑이 지나쳤으면 지나쳤지 모자랄 게 조금도 없는 유형이죠), 어린 눈에도 포찰될 수 있었던 직권 남용, 부패의 모습에 환멸을 느껴서라든가 하는 피상적인 이유는 아닙니다. 아버지 토마스는, "나는 문명인들과만 거래한다."며, 별 힘도 들지 않을 것 같은 이탈리안 마피아의 지시 청탁을 단호히 거부하는, 건강한 영혼을 간직한 사람입니다. 


흔히 범죄를 소재로 다루는 문예물에서 저지르곤 하는 과오가, 바로 범죄를 미화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유명한 <대부> 시지를 감독한 코폴라도, 연작 2편에서 공연히 피델 카스트로라는 코드를 슬쩍 끌어들임으로써 터무니없이 조직 범죄에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패착을 저질렀지만(이 루헤인의 작품에서도 아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듯, 카스트로의 사회주의 혁명은 오히려 미국발 조직범죄를 그 섬에서 일소하려는 흐름에 강한 민중적 지원을 얻을 수 있었기에 성공 가능했죠. 스페인의 봉건적 압제로부터 미국이 전재을 통해 카리브 해 일대를 해방한 건, 바로 이처럼 장애 없이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서였고, 이는 대부분 폭력 조직의 힘을 빌려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루 헤인은 느와르를 연출하면서도 그 주역을 맡은 캐릭터들의 배후에, 죄의식, 양심, 영혼이라는 견제자, 최후의 심판자를 고안, 삽입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본-말, 주-객의 원위치가 무엇인지, 극의 재미와 역의 매력에 홀려 망각하는 일이 없도록 세심한 배려를 베풉니다.


이 소설에는 명언이 참 많이 나오는데요. 커글린은 그의 출신 배경에 어울리게 가장 고급의 아일랜드식 교육을 받습니다만, 그 중에는 카톨릭 신앙이라는 배경이 빠지질 않습니다. 아버지 토 마스 재비어 경정은 그 살아온 깊은 고뇌의 흔적을 길지도 않은 말 몇 마디로, 비극성과 장려함을 가득 담아, 아들이 아니라 차라리 우리 독자들을 향해 간증하듯, 유언하듯, 존재를 털어 내듯 전달하고 있습니다. "신은 불의의 순간 선의의 경찰처럼 현장에 개입하여 잔손을 쓰지도 않고, 악의의 경찰처럼 뇌물을 받고 방관하지도 않는다. 단지 죄인의 가슴 속에 영혼이라는 형틀을 주조하여 장착한 후, 그 자가 일생을 두고 회한과 모멸감. 영혼의 잠식과 함께 살아가도록 형벌을 내린다." 읽다 보면, "아, 그런 거였구나.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이 부당한 고통을 겪는 현실로, 바로 신의 부재를 증명하는 손쉬운 억단은 삼가야 하겠구나." 같은 (뜬금 없는) 깨달음이 밀려 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죄인이 일말의 죄의식도 없고, 오히려 동물적인 본능이 빚은 못난 감정에의 매몰을 무기로 터무니없는 무고를 하려 든다면? 그때는 이 소설에 나오는 몇몇 묘사처럼. 개처럼 두들겨 맞고 형체도 못 알아 보게 만든 채 차디찬 대양의 심저에 가라앉게 하는 수밖에 없겠죠.


주 인공이, 신분 태생상의 유리점이야 어찌 되었든 초심자의 위태위태한 지점에 세워져서, 도무지 퇴로가 보이지 않는 절망의 한 복판, 생사의 기로에 서서 꼼짝 없이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절체절명의 위기를 천성의 재치와 배짱으로 타개하여 도리어 정상으로 향하는 발판으로 삼는 멋진 곡예의 모습은, 성공하는 스릴러가 빼놓을 수 없는 필수의 장치입니다. 루헤인은 스릴러의 본분을 망각하지 않고, 요 양념을 독창적으로 고안하여 독자가 주인공의 거듭된 전락과 파멸 수렴 행보에 서서히 피로감을 느껴갈 즈음에 적실히 삽입, 소설의 "흥행성"을 높이고 있습니다. 이른바 "인지(적 착각)"과 "사물의 진상" 간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넘나들며 스토리텔링을 하느냐도 오락적 성패를 가름하는 요소인데, 과연 에마가 그토록 매력적인, 멋진 사내놈 하나의 인생을 뒤집어 놓을 수 있는 여자였는지에 대한 해답 역시, 주인공 조 커글린의 시점과 (당연히 우리 독자로는 편향되어 보이는) 아버지 토마스의 시점, 그리고 중반 이후에 재등장하는 디온 바르톨로의 시점을 통해 각각 달리 전달함으로써, 독자에게 정확한 실상을 자체 추론을 통해 재구성하는 쾌감까지 주고 있습니다.


미 궁에 빠진, 혹은 흑막에 가려 있던 진실을 캐치하는 작업은 우리의 주인공 조도 열심히 액자 안에서 벌이고 있습니다. 그는 과연 누가, 앨버트 화이트에게 자신을 팔았는지 알아 내어, "빚을 갚을" 필요가 있습니다. 감옥 안에서 그의 수완과 배짱, 영혼 안에서 들끓는 열정을 제대로 알아 본 대부 토마스 페스카토레는, "조가 가장 믿을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배신자로 가장 바짝 염두에 두고 있는" 디온을 멀리 몬트리올에서 플로리다까지 빼 내어, 조의 영혼 그 작은 교란을 해소하게 돕습니다. 첫눈에 만난 옛 친구는, 너무도 반가운 목소리로 조를 맞는데, 이어 저녁 무렵에 긴 침묵을 거치고 나온 고백은 "그래, 내가 배신자였어."라는 침통한 한 마디죠. 하지만 진짜 반전은 지금부터인데요. 사태의 정리를 친구의 해석으로 정리하고 돌아온 조는, 대부와의 통화에서 정반대의 결론으로 낙착을 봅니다. 이는 마치, 영화 <대부 1>에서 돈 코를레오네가 뉴욕의 5대 패밀리와 간만의 회동을 마치고, "범인은 (그간 알려져 있던 바, 혹은 장본인들이 공언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바르시티였다."며 충격적인 선포를 하는 장면과 비슷합니다. 모르긴 해도 루헤인 역시 이 멋진 플롯을 짜내며 그 고전 영화의 명장면에 크게 영향 받았으리라 저는 짐작하고 있어요.


루헤인이 이처럼 플롯의 트위스팅에 능한 줄도 처음 알았습니다. 처음에 아버지 토마스가 시계 하나를 초라하게 구겨진 아들에게 건 네 줄 때, "대체 뭔 속셈인가?" 하고 궁금했습니다. 대부는 바로 그 물품의 가치를 알아 보죠. "내 집 한 채보다 가격이 비싼 아이템이군." 주머니에 챙겨 넣은 후 페스카토레는 세상 누구도 그 눈빛 하나에 다 녹여 낼 것 같은 다정한 분위기로 조에게 말을 건넵니다. "나한테 아들 셋이 있다는 걸 알고 있냐?" "네.""그런 나인데, 네 아버지가 이걸 나한테 건네라며 너를 바라보았을 그 순간의 애틋함, 부정을 어찌 내가 모를까? 자식을 키워 봐야 그 마음을 아는 법니다." 아마 여기까지에서 우리 독자뿐 아니라 조 역시, "이젠 살았구나."하는 안도가 온 몸을 감싸고 돌았을 텝니다. 그러나 심해의 포식자처럼 냉혹하고 가차없었기에 그 바닥에서 그 위치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페스카토레는, 결국 이 말 한 마디로 그 모든 가련한 기대를 뒤집는군요. "네 아버지한테, 까불지 말고 시킨 일이나 똑바로 하라고 해라, 응?" 이쯤 되면 시드니 셀던이 아마 무덤 안에서 전율할 만도 한 수완 아닐까 싶더군요. 우리의 루헤인은 정말 못하는 게 없습니다.


이렇게 잔재미로 소설이 끝나냐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장르 소설이란 설사 한 순간을 진하게 즐겼다고 해도, 마치 작렬하는 햇살 안에 혼을 던져 버리듯 재밌게 즐긴 바다의 한 구석에, 이제는 은밀히 내다 버린 나의 배설물도 그 본체의 성분을 이루고 있겠거니 하는 꺼림칙함으로 두번 몸을 담그고는 싶지 않은 느낌과도 흡사합니다. 그런데 루헤인의 작품들은, 마치 러시아의 고전명작을 대할 때만큼이나, 쉽게 읽고 서재 한 구석에 처박아 두는 불경을 피하고 싶은, 모종의 존숭감이 들게 하는 마력을 공톨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배경에는 그의 작품 세부 장치나 개별 문장이 담고 있는, 만만찮은 무게감과 내공이 그 큰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인간 쓰레기들의 불꽃 같은 처절한 생존 경쟁의 뒤안에는, 우리 모두가 그 업보처럼 공유하는 죄의식과 영혼 구원의 문제가, 불길한 탄트라의 자수처럼 수놓아져 우리를 응시하고 있었다고나 할까요. 루헤인은 이번에도 실망시키지 않고, 우리에게 "인간 근원"의 문제에 대해 깊은 통찰을 할 시간을, "스릴러를 통해" 마련해 주었습니다. 남들이 뭐라건, 저는 이 볼륨을 그런 용도로 사용할 작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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