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공쿠르상 수상작입니다. 과연 듣던 대로 미셸 오스트의 개성과 깊이가 물씬 묻어나는, 페이지를 쉬이 넘기기가 삼가지는, 축축하면서도 속이 꽉 찬 내러티브네요. 이름만 보고 착각을 하시는 분들도 있던데, 이분은 이 작품을 쓸 때 44세였고, 지금은 인생의 황혼에 접어든 할아버지입니다. 최근에는 작품 활동이 뜸해진 걸로 압니다.
내용은 다들 아시는 대로입니다. 주인공은 자신도 여러 차례 강조하듯, 유한 계급 출신의 사실상 기생 생활자입니다. 스 스로에 대해 확신이 결여되었고, 가족과 친지들과의 관계도 원만치 못합니다. 비전도 희망도 먼 과거에 버려둔지 오래이며, 다만 자신이 보유한 다양한 종류의 결핍에 대한 모호한 보상심리, 혹은 모친과의 껄끄러운 관계에 대한 일종의 타협안으로, 폴라라는 여인(시를 쓴다고는 하나 재능도 충분치 않고 대외적으로 확고히 인정 받은 직업이 못 됩니다)과 교제하는 게 유일한 타인과의 소통 창구입니다. 거리의 지나가는 여인들을 두고, 마치 자신의 의지가 작용이라도 해서 거리가 멀어지는 양 자발적 착각을 통해 모종의 쾌감을 느낄 만큼, 염세적이고 퇴행적인 자아의 소유자죠.
주인공은 유년기의 교육, 정서의 건전한 발달, 성취감정, 자아통합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장애성 결핍에 시달리는 유형이지만, 이에는 중요한 세 가지 원인이 작용한 바 있습니다. 1) 부친 상실(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처음엔요) 2) 모친으로부터의 애정 거부 경험 3) 별 가치 없는 불장난으로서 맞이한 첫사랑의 (그나마) 좌절, 이 세 가지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트라우마로 작용하는 듯합니다. 자기중심적인 말투만 들어서 청소년이나 미숙한 청년 정도인가 했으나, 어느 자리에서건 경칭을 들을 만한 장년의 나이입니다. 외부에서 보아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인생이며, 다행인 것은 그 자신도 이걸 잘 안다는 점입니다.
그가 아버지의 소식을 알고, 상봉을 원한 건 딱히 현실 타개의 의욕이 있어서는 아닙니다. 배가 고프면 음식을 찾듯, 모든 문제가 거기서부터 잘못되었겠거니 하는 막연한 치유 욕구에서이죠. 주인공의 자아는 그만큼 병든 상태이며, 우리 독자는 이런 매력 없는 캐릭터로부터 멀찌감치 거리를 유지하게 됩니다. 동정할 건 없습니다. 그도 그걸 원할 테니까요. 아무튼 이 점에서, 저는 역자의 이른바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 그리고 미궁에의 유비"에는 격하게 반대하는 편입니다(역자 후기 참조). 테세우스는 이 필립과 정반대의 스탠스라고 봐야죠. 신화에서의 그 demigod는, 고귀한 출생이었으나 나면서부터 그 모든 세속의 혜택을 상실했고, 모든 것을 회복하는 그 순간 죽음으로부터의 도전장을 받았으며, 자신의 존재 증명을 위해 가망없는 모험에 모든 것을 건 말 그대로의 영웅이었습니다. 반면 필립은 뭡니까. 길게 이야기할 것도 없이 테세우스의 사항별 대척형이라고 봐도 되죠. 그가 아버지를 찾아 떠난 건 자아의 환골 탈태나 주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게 아니라, 그저 찌질하게 응석을 부리고 싶은 이유밖에 없었습니다. 부친을 찾아 떠나는 여행도 그 가망이 없었던 게, 이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 형성에 원초적 장애가 있는 유형이니까요. 대상이 친부라고 해서 결과가 크게 다르지도 않았을 테며 그 결말도 과연, 끝까지 읽은 우리가 아는 대로입니다.
과연 이 소설에서 폴라의 역할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리아드네는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영웅 테세우스의 자아 완결, 세상의 구원 오디세이에 동참한 순교자였습니다. 저는 이 소설에서 폴라가 맡은 역할은, 유혹적이지도 않으면서 안온한 중독으로 사람을 꾀어서는, 결국 극한의 회의와 환멸을 부르는 현실 절충적 키르케에 가깝다고 봅니다. 아니, 필립에게는 오뒷세우스를 억류했던 바로 그 고혹적 마녀로 다가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치 키하나 노인의 눈에 푸줏간 딸 둘시네아가 공주처럼 보였듯이요. 가망 없는 난관을 타개하게 도와주는 마돈나는커녕, 그나마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던 낙오자의 삶에 최종의 관 뚜껑을 덮어 못질해 주는 악질의 마녀라고나 해야 합당하겠습니다.
아무런 생기도 존재 이유도 없는 잉여의 인생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다시 말해 소설의 주인공 필립은 과연 뭘 상징하고 있는 걸까요? 저는 2차 대전 이후 자존감의 근원, 재생의 활기, 하다못해 유구한 역사의 상속자로서의 긍지, 이 모든 걸 상실한 프랑스 자체라고 봅니다. 이런 소설에 왜 그토록 자주, "게르만"에 대한 적대감이 등장하며, 또 "유태인"이라는 민감한 코드와 "배경"이 자주 제시되어야 했던 걸까요? 제가 생각하는 답은, 2차 대전 이후 외부의 도움을 받아 침략자의 점령으로부터 벗어나긴 했으나, "위대한 조국"의 이상상에 걸맞는 정체감을 여전히 회복 못 하고 표류하는, 프랑스 자체를 표상하는 캐릭터가 바로 이 필립이라고 봅니다. 소설에서 우울한 나르시즘의 보조관념으로 자주 쓰이는 여성화된 도시 파리의 무게가 바로 그 예증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이 Grand Nation의 심장 노릇을 했던 그 고색창연한 수도, 그 사소한 풍경이나 개성 하나도 거주자, 시민, 국민인 그(필립보다는 차라리 작가 오스트라고 하겠습니다. 이 소설에서 화자는 분명 "나", 즉 필립이지만, 그 자학적이고 음울한 말투는 제 3의 전지적 존재로부터 일종의 필터링을 거치는 듯만 합니다)의 눈에 허투루 지나칠 수 없습니다. 파리가 당하는 굴욕은 프랑스의 굴욕이고, 그녀의 조신하지 못한 거동은 곧 육각형 조국이 내비치는 부정함입니다. 이 소설을 읽으며 짙은 우수와 비관으로 묘사되는 파리의 정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만, 바로 그 점 역시 작품의 전 설정이 프랑스 역사의 대유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부분이기도 하죠. 본디 프랑스어에서 valet은, "노예"같은 강한 뜻이 아닙니다(호텔 등에서의 "발렛 파킹"이 뭐라고 생각하세요?).그저 "시종"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이 작품에서는, 말 그대로 "노예"의 의미가 실감납니다. "밤la nuit"이란 무엇인가. 치욕과 모멸을 원인으로 한 자폐의 대유겠죠.
현실이 못마땅하고, 먹고 살 만한 여유는 있으나 왠지 수치심이 느껴집니다. 살아 있다는 느낌이 없고, 바로 응보의 파멸이 자신의 운명을 방문할 것만 같은 불안을 못 떨칩니다. 내가 지금은 이처럼 초라한 존재지만, 나의 부친은 멋지고 존경 받을 만한 위인이 아니었을까? 못난 후손은 과거의 (가상적) 영광에 기대며 힘들고 지친 자아을 지탱합니다. 그냥 그대로 덮어도 좋은데, 현실이 못 견딜 만큼 괴로운지라 막판에 몰린 선택을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 안 보느니만도 못한 환멸입니다. 나의 근원, 나의 과거 역시, 현재의 자아와 하나 다를 바 없이 초라하고 추악했습니다. 폴라의 부친은 파티 석상에서, 서로 속이고 불신하는 모세와 아브라함의 농담을 들려 주죠. 폴라의 부친이 필립에게 들려 주는 그 자랑스러운 (부친의)무용담에는, 이미 사기와 과장의 복선이 깔려 있었던 겁니다. 그는 말 중에 이런 의미심장한 한 자락을 깔아 둡니다. "저항도 좋지만,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 지나 정확히 알고 살았어야 했는데,..." 레지스탕스의 신화는, 샤를 에바리스테라는 거창한 이름(수학자 갈로아의 이름에서 땄다고 하죠?)을 단 아버지의 그 처참한 몰골에서 역력히 붕괴하고 맙니다. 레지스탕스는 무슨. 처음부터 우세한 전력과 부(富)를 두고 마지노선에서 패퇴하질 말았어야죠. 이 엉큼한 유태인 족속들은, 그 모든 사정을 알고도 더 참담한 침잠을 유발하느라고, 가증스런 극적 장치를 마련하고 있었던 거죠. 물론 유태인을 그리 노골적으로 악하게 묘사하면 "법"에 걸리므로, 그 정도로 돌리고 또 돌려 말합니다.
오스트의 문장은 파리 최고의 멋쟁이가 부리는 세련의 극치요, 동시에 데카당스의 퇴폐 그 극한입니다. p192의 "주름살이 여자를 절단하듯 물결은 도시의 동체를 절단한다." 같은 걸 보세요. 대단히 감각적인 표현이죠. 일단 저 문장의 전단에서, 여자를 "절단"하는 게 주름살이란 언사에 정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자의 경우,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룬 신분의 남자의 얼굴에 설득력있게 이리 저리 획을 그은 주름살이란 정말 멋져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성의 주름살은, 가장 화사한 미소를 지을 때 눈가, 입가에 살짝 생기는 것만으로도 보는 이에게 연민과 비애(최소한 그렇다는 겁니다. 대부분은 불쾌감과 역겨움을 자아낼 때도 있습니다)를 유발합니다. 그 타당성은 그렇다치고, 후단의 "도시 동체 절단" 운운은 뭘까요? 원문을 찾아 보지는 않았으나, 여기서의 물결이란 도시에 생명력을 공급하는 강줄기가 아니라, 마치 채만식의 맥락에서 그 "탁류" 같은 걸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바로 그 뒤에 작가의 의도가 더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심상 간의 비례식이 확실히 완성되죠.
이처럼 문장이란, 단지 기계적 의미를 전달함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로 인해 파생되는 무수한 심상의 연속이요, 나아가 자아와 세계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는 도구이며, 어쩌면 문학의 본체적 요소일지도 모릅니다. 어리석고 둔한 머리에서 생산되는 그 생각이 짧으면 말도 덩달아 짧을수밖에 없고, 말이 짧다고 해서 허위와 군더더기가 없는 정신의 건강성을 보증하는 건 전혀 아니라고 봐야 겠죠. 이를 간결한 표현으로 절제된 의지와 정갈한 상념을 전달하는 양 호도, 위장하는 것은 오히려 (예컨대 헤밍웨이 같은) 간결체를 즐겨 구사한 대문호를 모독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미셸 오스트의 예에서, 산문이 시가 되고, 화사한 문장이 깊이 있는 사색으로 전화하는 좋은 예를 얼마든지 볼 수 있어요. 어리석고 열등감에 가득찬 낙오의 인생은, 극히 제한된 자신만의 오타쿠적 미니어처 밀실에서 세상이 시작하고 끝나는 줄 알지만, 아니 우기는 중이지만, 그런 자에게도 잔혹한 각성의 순간은 찾아 오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펜을 향하고 펜을 통하여 우주를 제한된 수단으로 포착하려는 문필에의 꿈을 그 하찮은 정신으로도 꿈꾼 적이야 있겠으나, 이에 성공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냉연한 현실에서 문득문득 마무치는 자신의 모습이란, 밀가루푸대마냥 밋밋하고 초점 없이 흔해빠진 그 얼굴만큼이나 가망 없이 역력한 시궁창임을 확인할 뿐이겠죠. 풋.
p238 핑크 플로이드의 "디 아더 사이드 오브 더 문" 언급은 시대상의 반영이고, 동시에 청각 매체를 동원할 수 없는 소설의 한계상 우리가 최대한 협조하며 떠올려야 할 미장센입니다. 소설의 분위기가 잘 감이 안 잡히는 분은, 이 곡을 듣고 책을 다시 읽어 보세요. 오스트와 바로 페친 먹고 싶으실 겁니다(이 할아버지는 아마 SNS를 안 하시겠습니다만).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리고요? 차라리 "병태와 영자"라고 하시는 게 어땠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