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게 - 어느 은둔자의 고백
리즈 무어 지음, 이순영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어떤 평면 위에 최소한의 숫자만으로, 흔들리지 않는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구조는 삼발이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삼위일체의 교의를 가르쳐 왔고, 우리의 단군 신화에도 환인, 환웅, 단군의 3대가 등장합니다. 둘만으로도 외롭고, 셋이 있어 줘야 최소의 틀이 생깁니다. 1인 가구가 늘어나고 있다는 요즘이지만, 커플만으로도 왠지 허전하고, 가족이란 모름지기 자식이라는 한 명의 성원이 더 있어 줘야 하죠. 이 중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그 원심- 구심의 상호 균형이 깨어져, 각각의 안정된 삶도 자칫 붕괴할 수 있는 위험이 생깁니다.


은둔자의 고백이라는 부제 때문에, 저는 상당히 (본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무거운 내용의 소설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더군다나 그 은둔자는, 주로 절제 못 하는 식욕 때문에, 거동도 불편하고 수치심으로 밖에도 못 나가는 딱한 처지입니다. 이런 분들은 보통 성격에 문제가 있는 수가 많고, 특히나 그간 많은 소설(특히 스릴러)에서라면, 처참하게 희생당하는 처지나, 아니면 그 반대로 가해자에 놓이는 걸 종종 봤습니다. 아니라고 해도, 결국 자기 혐오와 연민을 이기지 못하고 파멸로 치닫는다든가 하는 설정을요.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담담하게 전개됩니다. 은둔자는 성격 이상자는 아니고, 빼어난 지성을 지니지는 못했으나, 평균을 상회하는 지성과 자기 성찰력, 교직 경력, 그리고 넉넉한 재산을 가진 중년의 캐릭터입니다. 다만 그가 굴하는 건 식욕쪽입니다. 식욕의 문제에 이르러서는, 그의 건전한 판단력과 통제가 미치지 못하는 영역입니다. 그는 대인 접촉을 대단히 꺼리는 편이나, 이에는 대체로 자신의 감정에 대한 우려 못지 않게 타인의 감정에 대한 배려가 더 크게 작용합니다. 돈을 지불하고 가사 정리를 맡기는 출장 홈메이드 인력에조차, 그는 별스럽다 싶을 정도의 조심과 유의를 기울입니다.


그는 비대한 체구 때문에 상당한 열등감을 가지는 듯도 보이입니다. 예컨대 켈의 사진을 보고 홈메이드 욜란다가 "누구에요?"라고 묻자, "아들"이라고 대답하려는 걸 억지로 누르고 조카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있죠(물론 이 장면은 중반 이후로 가면서 대단한 반전의 복선이 됩니다만). "아들"이라고 말하고 싶었다는 건 본능적 친밀감과 관계 회복에의 욕구, "조카"라고 타협적으로 수위를 낮춰 대답하는 건 상대 욜란다에 대한 배려("네 선입견을 굳이 배반하고 싶지 않아.")의 산물입니다. 욜란다는 켈보다 두 살이 많은,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는 (아마도) 불법 이민자 출신의 혈혈단신 처녀입니다. 청소는 잘할지 모르지만, 그 외의 서비스 매너는 미숙련 인력의 그것에 지나지 않는 취약 계층입니다. 이런 사람에까지 주인공(아서)이 순진한 애착을 보이는 건, 순전히 관계(relationship)에의 욕구, 가족 회귀 본능에 기인합니다. 그 는 욜란다를 볼 때마다, "저 아이를 입양하면 어떨까?"같은 생각을 끊임 없이 떠올립니다. 관계의 본격적 상실 이전에도 그는 비만의 징후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재앙으로 귀결한 건 사람들과의 유리가 결정적 계기였습니다. 그는 무엇보다, 가족, 가족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한편 저 멀리, 아서와 오래 전 잠시의 인연을 맺었으나 타향에서 살고 있는 모자가 있습니다. 어머니는 많은 교육을 받지 못했고, 무슨 이유에서인지(외국은 우리 나라와 달리 이런 예가 드문데도) 하나뿐인 아들의 교육에 강박적으로 집착합니다. 아들은 선천적으로 머리가 둔하다기보다, 이런 어머니에 대한 반작용 때문인지 공부를 싫어합니다. 대신 그는, 어린 시절부터 지역에서 촉망 받는 야구 선수였습니다. 이미 14세부터 로컬지에 이름이 나서, 인터넷에 그를 검색하면 사진이 나올 정도입니다. 결정적 시함에서 트리플 플레이(플라이아웃-3루 주자 태그아웃- 2루 주자 아웃)의 짜릿한 경험은, 내면 깊숙한 곳에서 절대 긍지를 놓지 않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합니다. 그는 언제나 스타였고, 동급 여학생들의 시선을 한몸에 모으는 주목 받는 인생이었습니다. 엄마는 이런 아들의 진학(엄마의 관심사는, 정확히 말하면 "교육"보다 "진학, 학벌"에 가깝습니다)을 위해 없는 돈을 들여 (우리식으로 말하면) 학군이 나은 동네로 이사 오지만, 그는 순탄히 적응하지 못합니다. 소년 켈(아빠 이름을 땄다는)은 언제나 어머니에 대한 불안과 불만에서 벗어날 줄 모르는데, 이는 엄마에 대한 정면의 반감이라기보다, 아버지의 부재에 대한 허기가 더 크게 작용한 듯합니다.


소년의 엄마는, 존재 깊은 곳의 근원적 불안을 떨치지 못합니다. 살아오면서 받은 많은 상처와, 태생적으로 보유한 성격적 결함이, 일종의 네크로필리아로 수렴하는 모습입니다. 엄마는 납득할 수 없는 이유를 대며 아서(은둔자 주인공)에게 오랜 인연을 환기하며 아들의 사교육을 촉탁하고, 그저 가족관계가 그리웠을 뿐이었던 아서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수락합니다. 사진을 보니 잘생겼고("나 같은 이에게서 이런 아들이 나올 수야 없지!"), 자동응답기에 남겨진 음성을 살짝 들어보니 생각보다 더 앳된 목소리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만나서,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봉사나 배려를 베풀고 싶습니다.


이 소설은 은둔자의 고백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으나, 시점의 전환은 장마다 교차되고, 마지막 장에서 드디어 두 화자가 만나면서 그 통일이 이뤄집니다. 아서의 독백, 그리고 소년 켈의 독백이 번갈아 등장하는 식입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분명히 ㅗ속 집단으로부터 경원될 소지를 안고 있으면서도, 결정적 이유 하나 때문에 이른바 "왕따" 신세로 추락하지는 않는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둘은 지향하는 바도 같습니다. 아서는 아들(혹은 자식)을 원하고, 켈은 아버지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소년의 어머니는? 그녀가 원하는 건 무엇이었을까요? 자식의 출세, 학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소설의 주제입니다. 소설은 일종의 비극적 결말을 예비하지만, 남은 인물들은 새로운 출발과 희망의 맹아를 보게 됩니다. 그 과실은 거저 다가오지 않고, 우리에게 나름의 부담, 즉 무게(heft)로 다가옵니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이것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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