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라이온즈 - 야구의 전설 한국시리즈
배정섭 지음 / 보누스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처음에 이 책을 펼쳤을 때는, 선진적이고 과학적,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세계 어디에 내 놓아도 빠질 것 없는 구단 운영을 하는 삼성 라이온즈 프런트에 대한 이야기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건 아니었고, 1982년 프로야구 출범 당시부터 한국 야구팬과 영욕, 고락을 함께해 온 삼성 라이온즈 구단에 대한 팩트북이었습니다. 삼성 라이온즈의 팬이 아닌 입장에서는 다소 아쉬웠지만, 그런 느낌도 잠시일 뿐, 340여 페이지가 언 제 다 넘어갔는지 모를 만큼, 어언 30여년에 달하는 한국 프로야구 역사의 가장 중요한 주역 중 하나인 이 구단의 갖가지 사연과 기록이 빼곡이 담겨 있어서, 그 출발이 미미했던(이 책에는 1982년 개막전이, 대통령이 시구를 하는 등 화제의 초점이 되어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되어 있으나, 현재 기록 영상이 남아 있는 걸 보면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물론 그 개막전의 극적인 승부를 기점으로, 한국 최고의 인기 스포츠로 자리잡았지만요) 한국야구가 이만큼이나 풍성하고 알찬 역사를 일궜는지에 대해 감회가 북받쳐 오르는 느낌에도 푹 젖을 만했구요. 일부 비뚤어진 팬들을 제외한다면, 최소한 야구만큼은 모든 팬들이 다 전체 구단의 팬입니다. 어느 팀만 광적으로 좋아하여 타 팀을 증오하는 한심하고 어리석은 행태(이런 자는 야구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제 열등감 좌절감을 해소하려고 야구를 이용하는 거죠)를 보이지 않고, 우선 순위에 따라 고루 애정을 분배하는 게 바로 우리 성숙한 야구팬들의 태도입니다. 그런 까닭에, 삼성 팬이 아닌 저도 이 책을 너무너무 재이있게 읽었습니다. 어떤 대목에서는 "맞아, 그랬었지." 하고 맞장구를 치기도 하고, 다른 대목에서는 "그런 일도 있었구나."하며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했습니다. 삼성 구간에 그렇게나 레전드가 많았구나, 하는 당연한 깨달음이 들기도 했고, 당시만 해도 우리의 감정을 그렇게나 뜨겁게 달구던 그 숱한 스타들, 알짜배기 조연들이 까맣게 잊혀진 걸 알고는 무상함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특정 구단에 대한 선호를 떠나, 야구팬이라면 페이지페이지마다의 공감을 안 보낼 수 없는, 빼곡한 팩트로 가득합니다. 대신, 시대순으로 정리되어 있다든가, 주제별로 촘촘히 목차가 짜여져있다든가 하는 점에서는, 아쉬운 면이 있습니다. 야구에 대해 웬만큼 아는 입장에서 봐야 책이 눈에 들어올 것이며, 잘 모르는 입장에서는 "이런 책도 있나?"하고 쉽사리 접근이 안 될 것 같다는 게 단점입니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씀 드렸듯, 웬만큼 아는 입장이라면 책이 정말 술술 넘어갑니다. 언제 다 읽었는지 모를 만큼요. 되풀이되는 이야기지만, 한국 프로야구의 팬이라면, 그 사람은 곧 9개 구단 모두의 팬입니다. 타팬이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팀도 아닌 삼성 이야기가 남 얘기처럼 낯설 수는 없습니다. 그 팀은 "나의 팀"과도 일 년에 17~19 게임을 치르면서, 지긋지긋하게 괴롭히거나 아주 압도를 해 버린 무적의 함대였습니다.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죠.


이 책은 영욕의 역사를 빠지지 않고 다 담았다는 점에서, 삼성 라이온즈 구단이 펴 내는 공식 홍보 책자와 크게 다릅니다. 우리도 다 알다시피, 삼성은 초창기부터 강자였을 뿐 어느 한 시기도 언더독으로 떨어져 본 적이 없는 무서운 팀이었으나, 야구 출범 20년이 지나도록 한국시리즈 우승을 해 본 적이 없는 아픔을 갖고 있었죠. 이 책은 프로야구 첫 10년기, 20년기에 이 팀이 가졌던 해태 트라우마, 20년기의 말에 겪었던 현대 유니콘즈 징크스에 대해, 제법 긴 분량을 두고 서술해 줍니다. 나이 든 삼팬들 이야기를 들어 보면,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 녀석들은 정신상태가 썩어서 안 돼!"하는 (애정어린) 개탄이 여기저기서 나왔다고 합니다. 야구팬들은 이리 신사적이라서 좋습니다. 결코 남을 탓하지 않고, 자신의 팀을 질타(말이 그렇다뿐, 거의 자식을 향하다시피한 애정입니다)하는 쪽으로 그 열정을 발산합니다. 팀이 졸전을 펼치다 지면 자기 팀 홈페이지에 몰려가 성토를 하고, 때로는 자기 팀 감독 가는 길 막아서고 청문회를 하자고 덤비는 게 한국 야구팬들입니다. 이 책에도 다분히 반성의 의도에서 실려 있긴 하지만, 해태 구단 버스 방화 사건 같은 것은 그 예전에나 일어났던 사건일 뿐입니다. 되풀이하지만, 일부 몰지각한 자들을 제외한다면, 어느 스포츠보다 신사적이고 이지적이며, 그러면서도 열정적인 태도로 경기를 즐길 줄 아는 분들이 한국야구팬들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은 응원팀을 떠나 누가 읽어도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책입니다.


이 책에 자세히 나와 있지는 않으나, 사실 삼성 라이온즈 구단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1987년(박영길 감독) 최강 전력을 구비하고도(이 책에 나와 있는 바를 인용하자면, 전무후무-지금까지도 없습니다-의 팀타율 3할을 기록한 시즌이었죠), 우승에 실패한 이래, 또 시즌 4위에 그쳤으나 빙그레, 해태를 연파하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여 돌풍(삼성 같은 강팀에 이 단어는 사실 어울리지 않습니다. 돌풍은, 약팀이 예상치 못하게 일으키는 거니까요)을 일으켰던 1990년시즌의 또다른 실패(이건희 당시 구단주는 이 충격으로, 정동진 감독을 바로 해임해 버립니다. 상대가 당시만 해도 재계 라이벌이었던 LG였다는 팩터가 크게 작용했습니다)를 거친, 그 직후였습니다. 1991~92년은, 지금은 야신으로까지 추앙받는 김성근 감독 지휘 하에 팀이 놓였던 시기인데, 이때 삼성은 최악의 시기를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책은 이 시기를 자주 다루고 있진 않은데, 다만 재일동포 에이스 김성길(김성근 감독이 영입한 선수입니다)의 활약에서 짧게 언급되곤 있습니다. 1991년 준플레이오프에서 너무 혹사를 당 한 탓에, 이 선수는 다음해부터 재기불능의 부상으로 결국 은퇴하게 되죠. 예의상 언급은 안 하지만, 김성근에게도 이런 흑역사는 존재했던 것입니다. 이 책에도 이후 삼성에서 톡톡히 제 몫을 해 준 김현욱 같은 선수가 잠시 나오는데요, 김성근 감독은 저 김성길 운용의 실패를 거울삼아. 혹사를 시키되 선수에 최소한으로 무리가 가는 방법을 개발하여, 이 김현욱을 탑 레벨의 투수로 키우는 일(1996년 이후 쌍방울 시절)에 성공합니다. 야신도 처음부터 야신이었던 게 아니라, 이런 시련과 시행착오의 시절이 다 있었던 거죠. 이 책은 김성근의 삼성 시절은 그리 길게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나이 어린 팬들이라면, 야신과 최고의 팀이 한솥밥을 먹던 시절이 다 있었나 하는 생각에 깜짝 놀랄 만합니다. 그 역사가 그리 자랑스럽지 못한 탓에 쉽게 잊혀졌을 뿐이죠.


이 책은 삼성의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들에 대해, 드라이하면서도 그때의 감동이 잘 살아난 서술을 하고 있습니다. 삼성 팬들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만한, 이승엽의 동점 스리런과 마해영의 끝내기로 삼성이 최초 한국시리즈 패권을 잡았던 그 시즌에 대해, 자세하고 정확한 서술이 실려 있습니다. 또, 비록 기록에 남지는 않았으나 우리 모두가 기억해 줄만한, 배영수 선수의 사실상 퍼펙트 게임, 그리고 1993년 한국시리즈 3차전 박충식의 15이닝 완투 무승부 같은 큰 이벤트가, 역시 감동적으로 잘 서술되어 있습니다. 박충식은 광주일고 출신의 고졸 에이스였는데, 고향팀 해태의 그 기라성 같은 에이스(문희수, 선동렬)를 상대로 그만큼 놀라운 투혼을 보인 모습, 아직도 많은 삼팬들께서 기억하실 겁니다. 삼팬들이 또 잊을 수 없는 선수가 강동우입니다. 외야 수비 중 펜스에 부딪혀 이후 몇 년을 뛸 수 없었던 상 에 시달렸으나, 삼성 구단은 그를 냉혹하게 버립니다. 삼성은 이만수, 김시진, 장효조에 대해서도 말년에 후한 대접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는 과거의 일이고, 현재 모든 면에서 최고의 레벨로 자리한 이 구단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책에는, 근세 삼성의 레전드이자 걸출의 슈퍼스타인 양준혁에 대해(그는 진정 천부의 조건을 타고난 "신적인" 선수였습니다) 후한 은퇴식을 베풀어 준 일도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중고신인 이동수의 기억도 많은 분들이 잊었을 수 있는데, 이 책에 다정다감한 서술로 우리에게 환기를 해 주고 있습니다. 웃지 못할 해프닝 중에 최초 몰수게임사건, 부정 배트 의혹 사건 둘이 나와 있는데요, 전자는 MBC 청룡, 후자는 LG 트윈스(전자를 승계한)가 상대팀이었습니다. 이 두 팀이 거의 10년을 두고 좀처럼  보기 드문 사건으로 악연을 이어 갔고, 두 사건 모두에 백인천 감독이 그 주역(?)이었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책에는 간혹 오류가 있습니다. 배영수 투수는 지역 명문 경북고 출신인데, 서울의 경복고로 잘못 쓰여진 대목이 있고요. p45 중간쯤에 보면 "배영섭는" "배영섭은" 같은 오타가 있습니다. p85에 보면 김용철 감독이라고 나와 있으나 , 당시 김용철씨는 김명성 감독의 급서(急逝)로 감독대행직에 올랐을 뿐, 이후에도 감독직을 맡은 적이 없습니다. 배영수 선수가 빈볼 투척으로 인해 "배열사"라는 별명을 얻은 일은 책 전체에 두 번이나 다뤄지는데, 지면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한 번으로 충분합니다. p58에서, 전기, 후기 리그를 두고 "양대 리그"라는 표현을 쓴 건 어색합니다. 삼성의 원년에 가장 두드러진 유격수(이 때문에 서정환이 트레이드를 요청한 사실은 이 책에 잘 나와 있죠)로 활약한 오대석의, 한국 프로야구 최초 사이클링히트 기록 사실이 이 책에 보이지 않는 것도 좀 의외였습니다. 당시로서는 대단한 화제였던 자잘한 에피소드들이 깨알처럼 소개된 건 이 책만의 매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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