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 - 태양과 청춘의 찬가
김영래 엮음 / 토담미디어(빵봉투) / 2013년 5월
평점 :
품절


어떤 점에서는, 작가는 오로지 작품으로만 말하는 존재이므로, "이 사람이 모년 모월에 무엇을 했고, 하는 식의 서술은, 오히려 평전의 포맷으로 부적합할 수도 있습니다. 이 작가(혹은 시인), 이 연도에 이런 작품을 썼는데, 그 중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문인에게는, 그를 두고 평전을 써도 이런 형식으로 쓰는 게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도 듭니다.


알베르 카뮈는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져 있지만, 고전의 운명이 흔히 그렇듯 안다고 착각하기에, 의외로 잘 안 읽히는 면도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최근 고전 르네상스 바람이 나름 불고 있고, 최근 문학동네에서 이기언 교수의 번역으로 (제목도 색다르게) <異人>으로 번역되어 나온, 그리고 호세 무뇨스가 작업한 일러스트판이 나오기도 한 <L'Étranger>의 경우에서 보듯, 카뮈의 인기는 한국에서 여전합니다.


좀 나이 든 세대에게 여쭤 보면, "카뮈는 시원찮고, 사르트르가 더 천재고 더 화끈하다."며 그를 평가절하하는 입장도 있습니다. 사실 아주 유치한, 이념의 스펙트럼을 무식하게 짜 보자면, 말로가 맨 오른쪽(나중에 드골에게 '부역'했으니까요), 카뮈가 중간 쯤(그는 여튼 노벨상도 기분 좋게 받고, 부르주아지에 대해 어느 정도 타협적인 스탠스였죠), 그리고 완전 과격파를 일단 잊자면, 사르트르가 왼쪽에 놓이는 게 맞긴 하죠. 실제로 (이 책에도 나오지만) 카뮈는 가난한 집안(게다가 알제리라는 식민지) 출신에다 학교 교육도 변변히 못 받은 사람이지만, 사르트르는 '빠히' 고등사범 수석인데다 확실한 좌파였으니까요. 근데 지금 우리나라에서 사르트르 책은 보는 분이 잘 없던데, 카뮈는 이처럼이나 여전히 읽힙니다. 이는 어느 정도, 시대를 초월하여 카뮈가 더 큰 보편성을 획득했다는 증거 아닐까 합니다.


책은 1부, 2부, 3부로 나뉘어 있습니다. 1부는 10개의 키워드(라고 썼다가 카페 분위기가 생각나서 열쇳말로 고칩니다)를 먼저 제시하고, 그 각각의 키워드에 맞는 다양한 출처의 카뮈 어록, 인용을 배치하고 있습니다. 키워드는 임의적인 게 아니라, 카뮈 자신이 어느 인터뷰에서 직접 거론한 것이랍니다(어느 인터뷰인지는 저자 김영래님도 모르시고, 심지어 카뮈 자신도 모릅니다. 인터뷰라고 해서 매체와의 인터뷰를 꼭 지칭한다는 법도 없고, 누가 그냥 지나가다 물은 것일수도 있습니다! ). 하지만 이 열 개의 주제어가, 카뮈 자신의 정신과 영혼을 관통하는 개념, 이데아임은 분명합니다.


1부, 열 개의 거울에 비춰 본 카뮈는 이런 인용문을 제시하고, 그 출처를 각각 말미에 밝혀 놓습니다(대부분 <작가수첩>이 출처입니다). 어떤 구절, 잠언은 그 말을 한 연도만 표시되어 있고, 출처가 없는데요. 이런 경우는 앞의 것과 출처가 같다는 뜻입니다. 계속 같은 출처가 이어지다가 바뀌기 직전에는, 다시 문헌이나 작품 제목을 명기해 주는 작가님의 센스가 돋보입니다. 빠짐 없이 같은 말을 다 적으면 독자도 괜히 피곤해지거나 산만해지죠.


2부 카뮈를 읽다라는 제목입니다. <이방인>과 <페스트>, 그리고 그 주옥 같은 명편인 <시지프의 신화>에서 핵심 부분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이방인>은 몰라도, <페스트>는 사실 굉장히 깁니다. 저 같은 게으른 독자는 아무리 카뮈와 이 작품이 위대하다 해도, 중학교 그 시절은 물론 지금도 끝까지 꼼꼼히 읽어 낼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 독자에게, 이런 편집과 구성은 사실 아주 고마운 서비스입니다. 마치 공부 안 한 수험생에게 은밀히 건네지는 족보처럼요. 책 이름은 프랑스식으로 <시지프..>이고, 그 안의 장 이름은 그리스식으로 <시시포스..>인지 저는 이 책을 읽고 처음 알았습니다.


3부카뮈를 만나다입니다. 그 가 행한 노벨상 수락 연설, 가난한 소년을 세계적인 문호로 키운 은사 장 그르니에에게 보낸 서신과 답장(아것들만 뽑아 펴 낸 책도 국내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저자 김영래 시인께서 많이 참고하신, 이 분야 대가  김화영 선생의 번역으로 도서출판 책세상에서 나왔죠) 끝에는 김영래 님이 적은 간단한 연대기도 있습니다.


읽어 보면 "이게 정말 다 한 사람의 입과 머리에서 나옴?" 같은 놀라움이 절로 일게, 진심 주옥 같은 명언으로 가득가득합니다. 정말 놀랄 만큼이죠. 뭐 물론 하나하나 다 전폭 공감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불교에 대한 그의 입장 같은 것입니다.... 제가 요즘 헤세의 <싯다르타>를 다시 읽어 보면, 서양인이 바라보는 부디즘, 불교란, 정말 "허무주의" + "기 수련 모임" 그 이상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카뮈도 마찬가집니다. 불교를 두고 "종교로 변한 무신론"이라고 합니다만, 사실 동양의 불교는 유신론/무신론의  이분법을 멀리 초월해 있는 종교죠. 그 심원함은, 기독교가 자체적으로 규정하는 "종교"의 협소한 틀을 훨씬 초월합니다. 서양인의 관점에서는 불교가 종교도 아닌 것 같고, 무신론의 변형으로 보이겠지만, 불교는 기독교보다 더 오픈된 구조를 가지고 있고, 일견 무신론이기도 하면서 더 큰 섭리/진리를 긍정하므로 유신론이기도 합니다. 카뮈의 이런 해석은 역시 이 문제에 한해, 서양인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뭐 이런 걸 읽으면, 좀 깬다 싶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알던 모든 문호들, 사상가들은 지금 성숙한 눈, 메타적 시각으로 보아 어렸을 때 그 경외의 눈으로 대하던 그만큼의 크기는 아닙니다. 마치 <큰바위얼굴>에서 어네스트가 느끼는 그런 감정과도 비슷하게요. 시인 김영래 선생은, 그러나 영혼의 큰 비중을 이 카뮈로 채우고 일생을 살아 온 분 같습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렇게, 인용으로 재구성한 연대기 앤솔로지를 지을 엄두가 나지 않을 테니까요. 덕분에 우리도, 다른 사람의 평가나 해석이 개입되지 않은 채의, 순전히 카뮈 자신의 입으로만 말하는 생각들의 크로니클을 이렇게 편한 포맷으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저는 언제나 사태의 발전, 경과를 파악함에 있어서, 그 시계열적 배열이 대단히 중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해 왔는데요. 연대순으로 이렇게 짜여진 구성 덕분에 "요약된 한 편의 전기나 평전을 읽는 기회"를 정말 멋지게 가져 본 것 같습니다. 시인께 감사를 드리고요. 하지만 어려서 읽던 그 숱한 대문호의 고전문학을, 여전히 순수 경모의 스탠스로 바라지 못 하는 게 순수성의 상실, 혹은 영적 타락의 탓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카뮈와 잠시 거리를 두고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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