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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비사 - 은이 지배한 동서양 화폐전쟁의 역사
융이 지음, 류방승 옮김, 박한진 감수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이어령은 얼마 전에, '역전 앞' 같은 중복잉여 표현을 두고, 반드시 문법적 오류로 볼 필요 없고, 민족
정서의 일부가 반영된 수사로 파악하면 충분하다고 했다. 언어의 규범적 고찰을 두고 반드시 권위자의 언술을 인용할 필연적 이유는
없고, 건전한 어문학적 감각과 지식을 갖춘 이가 편견 없이 숙고하는 결과로 그 당부는 얼마든지 평가할 수 있다.
자
그렇다면, '은'은 그 속성이 본디 흰 것인데, 이를 두고 앞에 다시 '휠 백'이라는 한정어를 붙임은 문법적으로 타당한가?
아니라면, 더 널리 쓰이는 '황금'의 예는 어떠한가? 물론 금에는 '백금'이라는 다른 예가 존재하니 이와 나란히 둘 일만은
아니지만, 언어의 usage를 두고 정오를 가르는 일은, 바로 언어학의 기본 명제가 언어의 기능 중 하나로 '감성의 전달'을 꼽고
있기에, 도무지 그 언중의 감성적 코드와 분할해서 수행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실로 어려운 작업이다.
일개 단어, 기계적으로 거대 시스템 안의 한 부속으로 제 기능만 잘 수행하면 그만인 듯한 일개 단어의 경우에도, 그 작동의 바르고
그름을 가르는 일이 힘들다. 하물며, 정치-경제 복합체 내에서의 제도를 두고서 과연 그 최적 효율의 기준만으로 채택-폐기의
당-부당을 쉬이 결정하는 일은 어떠할까? 효율의 기준만을 내세우는 건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지상과제'에 가까우니, 말하는 자가
정치적 스탠스의 어느 편에 서 있건 처음에 내세운 약속이나마 충실히 이행하면, 이를 두고 딱히 타매할 근거는 마련되지 않는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애초에 내건 조건들을 모조리 가장행위로 전락시키는, 속내 시커먼 은닉행위가 따로 숨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효율을 빙자한 강자 이익만의 관철이라는 트로이의 목마는, 유사 이래 어느 집단, 어느 결제체제, 어느 생산 기제에서도
존재하는 게 보통이었으니, 최대 이익의 실현과 최고 수위의 거래 안전 도모라는 지극히 기계적인 미덕만 성취하면 그만일 것 같아도,
기실 그 내막에는 경제 패권과 동전의 앞뒤처럼 결부된 정치적 파워 게임의 복잡 다단한 사연이 숨어 있을 밖에.
은의 통화 지위는 생각 외로 공고하며, 깊기도 한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건륭제 말기를 기준으로 하더라도, 유럽의 경제력, 생산
스톡의 토털은 중국 일권역의 그것에 비겨, 초라하다 할 만큼 미치지 못했다. 산업 혁명의 극성기를 상당 기간 경과한 후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대체 수천 년 동안 진정한 의미의 자급자족이 가능했던 완결적 경제 단위였던 중국과 유럽은 경쟁 상대가
되지 않았다. 세계(정치/경제)사의 터닝 포인트이자 티핑 포인트였던 아편 전쟁을 거친 후라고 해도, 여전히 중국의 생산은 양적
질적으로 유럽에 떨어지는 바 크지 않았으니, 결국 중국의 정체와 몰락은 자체 모순의 누적과 병발이 아닌, 외부 무력의 강제에
기인했다는 분석이 자연스레 도출될 만하며, 이는 서양 제국주의의 폭력적 성격을 고발하는 면마저 겸한다. 대포와 폭약을 통한 침략,
살상 이후에야 양 진영의 우열이 역전되었으니, 로마 시절까지 소급해 가는 양 세계의 경제력 우열 비교란 새삼스러울 뿐이며, 그
장구한 기간의 대부분을 결제 수단으로 '우월한 세계에서' 사랑 받아온 은이, 다시금 세계 무역의 중심 수단으로 부활한다 한들
이상할 구석이란 조금도 없는 것이다. 이 책의 논지는 이 점을 납득시키는 데에 방점이 놓인다.
중국의 처절한 몰락 과정은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 되기보다, 그 유리한 초기 조건의 이점을 살리지 못한 채 나태와 방종, 무기력으로
일관하다 후발 주자에 추월당한 어리석음의 표본으로 인식되는 면이 강했었다. 정치사와 경제사를 분리 불가능한 일체로 파악할 때,
은의 경제사는 곧 세계무역사요, 한정수식어를 불요하는 world history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이 장구하고 사연 많은
역사에서, '중국'이란 주어를 '은'으로 바꾸기만 해도 이처럼이나 많은 분량이 효과적으로 전달, 이해되니 대체 인간이란 그 심성과
영혼의 어느 정도를 '경제'에 빛지고 있는 걸까? 과연 그 존재란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단일어 외 어떤 형용도 잉여로 돌릴
만한 타산적 존재일까? 은이 그 임잣말의 지위를 회복한 크로니클에서 이처럼이나 절실한 공감을 이끌어낸다면, '칙칙한 중국'의
테마가 여태 우리에 빚은 경멸감은 그저 근거 없는 승자편승, 비겁한 세컨 게스가 아니었던가! 은의 '복위'는 시대착오적인, 패권
찬탈의 거지떼가 음흉히 꾸미는 가망 없는 역적모의가 아닌, 그 오랜 상속권과 전통을 비로소 회복하려는 정당한 권리자의 침착한 소송
노력 이상이 아니었던 걸까? 빛나는 은의 리사이틀은 그저 금붙이 은의 초라한 넋두리가 아니라, 한 맺힌 중국 민족의 장엄한
공소장에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