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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역하는 말들 - 황석희 에세이
황석희 지음 / 북다 / 2025년 5월
평점 :
<Lost in translation>이라는, 빌 머리 - 스칼렛 조핸슨 주연의 영화가 있었는데 이게 우리 나라 상영관에 걸릴 때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라는 제목이었습니다. 오역이라는 지적도 있었으나 여튼 좋은 센스로 많은 관객들에게 어필했다면 그 역시도 괜찮은 작명이 아니었을까 생각도 해 봅니다. translation이라는 영단어에는 사실 "번역, 통역"이라는 뜻만 있는 게 아니라는 데서 저 원제의 맛이 나는데, 마찬가지로 지금 이 책의 "오역"이라는 말 안에도 저자 황석희 번역가가 다양한 뜻을 담았기에, 다 읽고 나서 독자로서 여러 생각을 하게도 되었습니다.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1+1=2처럼 고지식하게 바른 코스로만 뚜벅뚜벅 밟아가는 삶이 초라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옹색하게 사느니 어디 가서 큰 사고라도 한 번 치고, 부정적인 시선이라도 남들의 주목을 확 끌어 보는 편이 훨씬 화려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건 대단히 어리석은 생각일 뿐입니다. 저자는 p48에서 프랭크 시나트라가 불러(원곡은 프랑스곡이며 시나트라는 번안해서 불렀죠) 유명해진 <마이 웨이> 중에서 the record shows I took the blows라는 구절을 인용합니다. 번역가로서 정역(正譯)의 길은 그만큼 고달프고 번거로우며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뒤안의 길이지만 그래도 지킬 걸 지켜 가며 고지식하게 쌓아가는 바른 실적의 보람에 흐뭇하다는 말씀이 인상적이었어요.
"그러니 제발 날 좀 가만히 내버려 두시오!"를 외친 좀머 씨. 그를 창조한 파트릭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p80)>를 보면 정말로 깊이 있는 뭘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다 죽음을 택한 화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쥐스킨트가 독일 사람이다 보니 이때 Zwang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이 단어의 첫째 뜻은 "의무"입니다. 강요, 강박 말고 의무를 떠올리면 저 화가의 자살이 전혀 다르게 다가오는데, 이런 것만 봐도 번역자가 어떤 단어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꽤나 다른 방향의 해석이 가능해지는 것 같네요. 술술 잘 읽히기만 하면 좋은 글인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 술술 잘 읽힌다고 거짓말을 할 만큼 뻔뻔스러운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듯한데, 잘 안 읽힌다고 감히 도스토옙스키의 글이 나쁜 글이라고 단언할 만큼 멍청한 사람도 별로 없지 싶습니다. 요즘 세상은, 최소한의 깊이에 대한 강박도 없이 사는 이들이 너무 많아서 문제가 아닐까라고도 생각해 봅니다.
p183을 보면 이제 유치원에 다니는 자녀를 둔 저자의 행복한 푸념이 담겨 독자의 부러움을 삽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며 She is an amazing kid라고 할 때 "얘는 놀라운 아이야."라는 말이 왜 오역이라고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우리 주변에 있는 애들이 다 놀라운 애들은 아니고 그럴 수도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칭찬할 때 그게 일일이 다 빈말은 아닐 테고, 어차피 그 부모가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해 주는 건데 그걸 하나하나 의심할 필요도 없습니다(아주 배배 꼬인 사람 아니라면). great이 매번 "위대한"이 아니고 때로는 반어일 수도 있겠지만, amazing은 제 생각에 그냥 amazing, wonderful로 받아들이면 될 듯합니다.
이 책을 보면 누군가의 명언이라고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게 사실은 과연 그 사람의 말인지 명확한 게 없다는 지적이 곧잘 나옵니다. p222의 "가난하게 죽는 건..."에 대해 누군가는 빌 게이츠, 누군가는 마윈을 출처로 댄다고 하며, p96을 보면 체게바라의 말로 알려진 이른바 리얼리스트와 임파서블 드림에 대한 쿼트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무튼 저자는, 아무리 힙해도 오역은 오역이며 초라한 정역에 비할 바가 결코 아니라고 합니다. 남들이 알아주든 말든 바른 정석과 논리에 따른 고지식한 걸음걸음이 이 세상에는 훨씬 더 필요하며, 가뜩이나 더욱 거리가 가까워져 오해와 불신이 싹트기 쉬운 요즘이니 다른 언어를 괜한 분쟁의 불씨 없이 옮기는 일의 가치란 더욱 커진 게 아닐까 싶기도 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