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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지 않아야 할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면 - 이정하 산문집
이정하 지음 / 마음시회 / 2025년 1월
평점 :
"25년 전 화제가 되었던 바로 그 책!" 이 책을 보여 주니 제 주변에도 알아 보는 이정하 작가님 팬들이 많으며, 저도 25년 전에는 그저 제목만 보고 지나쳤던 작품을 이번 기회에 다시 정독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시회의 기존 문학서들처럼 깔끔하고 예쁘게 만들어진 양장본입니다. 시대가 흘러도 빼어난 문필가의 감성은 여전히 빛나며 독자의 마음을 섬세히 터치합니다.
(*책좋사의 소개를 통해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사인본 감사합니다)
핸드폰을 바꾸면 주소록 바꾸는 게 또 예삿일이 아닙니다. 이정하 작가님은 솔직하게, 새 핸드폰에 누굴 옮기고 누굴 이참에 (버리는 폰에) 남겨놓을지 고민하는 자신을 드러냅니다. 만약 당사자들이, 내가 사람의 가치와 친밀도와 효용을 빠른 속도로 채점하여 생살부처럼 추린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착잡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작가님은 우리 속물들과 다른 태도를 보입니다. 아예 낯선 이름(p28)이 다 있는 걸 보면 그와 얼마나 격조했는지 새삼 느끼는데, 그래도 이 이름이 이 지경까지 오기 전에 내가 먼저 한번 불러 주었다면 어땠을까? 내가 비로소 불러 주어 꽃이 된 그의 이름(김춘수 시인의 <꽃>)처럼, 이정하 시인은 일단 나 자신을 먼저 돌아봅니다. 이게 시인과 우리들이 다른 점이지요.
"슬픔은 방황하는 사랑의 또다른 모습이었다." 저는 p38 이하에 실린 짧은 산문의 저 제목이 그닥 가슴을 후벼판다거나 하지 않고, 당연한 말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당연한 것 아닌가? 사랑이 제 갈 길을 못 찾고 누가 나 좀 저 안에 들여 주었으면 하며 지레(?) 방황하는 이들(나를 포함하여)은 그저 흔히 보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산문에서 정작 포인트는 그게 아니라, 성가대의 "그애"가 유독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는 "김 선생님"의 존재입니다. 사랑은 이처럼, 두 사람만 있을 때는 뭐 문제가 될 게 없습니다. 제3자가 끼어들기에 항상 아프고, 방황하고, 눈물짓고, 마침내 먼 어디로 가기까지 하는 사단이 터지는 거죠. 물론 문제는 저 김 선생님보다 불리한 위치에 놓인 내가 다 떠안습니다. 김선생님은 그냥 유유히 상황을 즐길 뿐이니 이보다 더 불공평한 세상이 어디 있겠습니까. 에휴.
그래서 시인은 절규합니다. 잠깐만이라도 그 중독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길!(p44) 마약 중독이나 기타 나 외의 무엇에 족쇄가 채워져 끌려다니며 괴로워하는 이들. 사랑이고 뭐고 내가 지금 이렇게 미치도록 괴로운데 소망이든 "너"이든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초라해도 별은 여튼 자신만의 빛을 낼 줄 안다지만, 내 안의 빛은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해 마치 스스로를 불태운 지귀(志鬼)의 신세처럼, 마지막 초라한 tantrum에 에너지를 모두 쏟고 티끌로 사멸할 뿐입니다. 해로운 중독의 끝은 모두 이와 같습니다. 그 대상이 사랑이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너를 사랑하지. 널 이렇게 보고 있는 동안에만(p73)." 바로 이것입니다. 이게 바로 이정하 시인께서 속한 그룹인 그시절 X세대의 사랑법입니다. 서로를 만질 때 용광로처럼 뜨겁게 사랑하다, 이제 시들하다 싶으면 delete 키를 눌러 삭제합니다. 이 세대에게는 이별할 "권리"가 있었고 그래서 자유로웠습니다. 그런데 과연 시인께서는 그시절 범상한 젊은이들과는 다른 빛깔의 영혼이셔서, 헌신, 몰입, 희생이라는 지난 시대의 가치를 잠시 살짝이라도 주시할 줄 압니다. 그게 바보스러움이라도 상관 없습니다. 이게 저 역겨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속물스러움과 무지와 무책임함과 천박함을 열심히 휘날리고 비호감을 적립하던 언필칭 포스트모던에 대한 준엄한 꾸짖음입니다.
아, 나한테도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허울 아래 나는 그녀를 새장(p159) 안에 가두려 하지 않았습니까? 의심이 있는 곳에 사랑이 깃들 수 없듯, 그녀 역시 나의 구속복과 수갑 아래 너무나도 답답해했을 수 있습니다. 정말 사랑한다면, 사랑했다면, 그녀의 마음이 딴 데 가 있어도(p166) 그대로 놓아 줄 줄 알아야 합니다. 시리우스처럼 내 눈을 부시게 하던 그 혹은 그녀가 마침내 평범(p168)해 보이기 시작할 때, 나 역시 비로소 자유를 찾고 중독에서 벗어나며 살아야 할 진짜 이유(p119)와 만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