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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보다 재미있는 디자인
최경원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5년 1월
평점 :
감각적이면서도 심오한 필치와 내용의 머리말을 읽기만 해도 우리 독자들은 이 책이 담은 멋진 내용과 주제를 미리 파악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미술과 디자인은 둘이 아닌 하나였다.(p5)" 그러던 것이 20세기 들어서 실용적이고 산업적인 용도를 충족시키기 위해 (이른바 순수미술로부터) 디자인이 분화했다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20세기에 태어나 자란 이들은 이런 비정상적인 양상을 정상인 양 착각할 만한 환경에서 자라고 살아 왔던 거죠.
(*북뉴스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저자 최경원 교수님은 최근 들어 "대중의 엘리트화"가 두드러진 트렌드로 부상한다고 진단합니다. 대중의 기호를 만족시키려 실용적으로 분화했던 디자인은, 이제 다시금 고도의 예술성을 추구하게끔 변모를 시도합니다. 책 제목은 저렇게 "미술보다 재미있는 디자인"으로 붙었으나, 사실은 작금의 디자인이 미술과의 일체였던 본래 자리로 돌아오는 중이니 디자인이나 미술이나 똑같이 재밌어지는 분야라고 하겠습니다. 현대인이란, 무릇 재미를 놓치면 현대에 살 자격이 없어집니다.
화랑 LUMINEO. 저는 가 보지 못했지만 이 임대 화랑은 신주쿠역 서쪽에 위치했다고 합니다(p45). 전시의 컨셉에 맞게 날카롭고 세련되면서 고급진 외관을 연출해야 하는데, 저자의 시각으로는 "조형 요소를 모두 제거하여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듯하나 주변들과 역동적 관계를 이루며 공간을 꽉 채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앙상한 골격(과 텍스트)만 남아 허공을 배회하는 모양인데도 공간을 최대한으로 채운다니 대단한 역설입니다. 비결이 뭘까요? 나의 공간이 비었으니 그 틈을 타(他)가 촘촘히 밀고들어오는 이치입니다. 디자인의 효과와 원리를 통해 세상사의 새로운 이치까지를 배우는 듯합니다.
p201을 보면 행사 포스터 1점이 소개됩니다. 한눈에 봐도 "뜨거운 한국 희곡 일본 초연!!!(느낌표가 세 개입니다)", "인류 최초의 키스(공연 제목)" 등의 한글이 들어옵니다. 저자의 해설에 의하면 이 연극에 실제 키스 장면은 없고, 감호소를 배경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블랙을 통해 어두움과 두려움을 (압도적으로) 부각하면서도 화이트를 통해 일말의 희망을 남겨 두었다는 게 저자의 해석입니다. 왜 사람의 얼굴 옆모습이 저렇게 크게 배치되었나. 디자인의 기본 테크닉 중 하나이지만 (실제로는 극중에 안 나오는) 키스를 암시하려는 의도라고 저자는 설명을 덧붙입니다. 디자인의 문법을 독자들은 이런 실례를 통해 귀납적으로 배울 수도 있습니다.
p100을 보면 소프트방크에서 내놓은 트로피칼이라는 휴대폰 광고가 있습니다. 휴대폰 광고로서뿐만 아니라 광고 일반의 관점에서도 대단히 파격적이고 관찰자을 당혹하게도 만드는 도안입니다. 다소 산만한 듯도 하나, 누구 눈에도 유쾌하고 즐거워 보이는 인상인 건 분명합니다. 또 정신없는 와중 이 핸드폰이 방수(防水) 기능을 갖추었음도 분명히 다가옵니다. 효과적인 디자인은 그 기능성에 대해서도 남김없이 유감없이 정보를 전달해야 하는데 이 점에서도 성공적입니다. 저자는 "딱딱하고 기술집약적인 게 보통인 전자제품 광고에서 이런 자유분방한 광고가 주는 효과"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내립니다.
p237에는 의류브랜드 Dean M의 포스터 하나가 나옵니다. 해체주의라고 하면 한국에서는 대뜸 자크 데리다를 떠올릴 텐데, 등을 돌린 채 뒤를 돌아보는 여인의 모습을 잡았는데 얼굴의 일부가 흰색으로 지워졌고 그것도 구도의 중심부가 그리 처리되어 충격을 줍니다. 이 기획에서 해당 브랜드는 일관되게 deconstruction, 즉 "해체"를 메인 컨셉으로 잡았는데, 그 "해체"의 액션이 화면 안에서 불규칙합니다. 저자는 바로 이를 두고 동아시아 고유의 여백의 미, 혼돈 속의 역동성이 잘 표현되어, 서양인 모델의 외모 개성과 팽팽한 긴장 속에 조화를 이룬다고 평가합니다. 저자의 시원시원한 해석과 해설을 따라가다 보면 디자인이 얼마나 재미있고 영감을 자극하는 분야인지 독자들도 자연스럽게 공감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