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언어 - 하 - 논어와 함께 노자, 열자, 장자 읽기 고전 아틀리에 4
최기재 지음 / 인간사랑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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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2024) 2월에 최기재 선생의 <치유의 언어> 상권을 읽고 리뷰를 올렸었습니다. 또 재작년(2023) 2월에는 같은 저자의 <일리아스의 거의 모든 것>에 대한 독후감도 썼었습니다. 이 하권은 2024년 6월에 발간되었으며 제 개인적 사정으로 인해 지금에서야 후기를 등록합니다. 또 이 책은 인간사랑에서 펴내는 고전아틀리에 시리즈 제4권이기도 합니다. 

상권에서 저자가 공자를 잠시 분석한 후 <도덕경>과 <열자>를 심층적으로 해설했다면 이 하권은 <장자>에 집중적으로 분량을 할애하며 전개됩니다. 노장 사상, 도가의 개조가 이이, 즉 노자이긴 하지만 후세 사람들에게 더 그 사조의 깊이를 더하고 더 친숙한 이미지로 어필한 사상가는 장자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최기재 박사님은 <장자> 원문을 병기하여 독자의 이해를 돕고, 특유의 시원시원한 어조로 일관된 관점으로부터의 해석을 자구 하나하나에 적용하십니다. 

무용의 용(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쓸모없다고 신세를 서러워할 게 아니라, "쓸모 없는 그늘에 누워 쉴 수 있으니 이 또한 쓸모이다(p30)"라는, 잘 알려진 교훈입니다. 혜자(惠子)는 이 대목에서 쓸모 없는 박을 쪼개 버린 이야기를 들려 주는데, 이에 장자는 답하여 말하길, 손등을 치료하는 약을 어떤 이는 돈 몇 푼을 받고 솜 트는 일꾼에게 팔 뿐이지만 어떤 이는 전쟁에 참여한 군사들을 돌보는 데 요긴히 활용하여 한 나라의 운명을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박의 쓸모를 졸렬하게 파악하여 기어이 쓰레기로 만든 혜자의 협량을 할난하는 데서 이야기는 마무리되는데, 소요(遡遙)가 곧 지락(至樂)이라는 장자 사상의 요체가 저자의 입으로 되풀이됩니다. 최 박사님의 지적대로 이 대목은 춘추전국시대 지사들의 유세(遊說)의 한 예화인데, 장자에게서 우리 독자들이 의외로 실용적이고 현실참여적인 면모를 엿보게도 됩니다. 

내편(內篇)에 보면 진인(眞人)에 대한 장자의 긴 논변이 있습니다. 도인, 신선 등을 소재로 삼은 민담을 보면 자주 나오는 단어이기도 한데 간혹 사이비종교의 경전에서도 접하는 말입니다. p158에서 장자는 이로움과 해로움을 초월하여 하나로 볼 줄 모르면 군자라고 할 수 없다고 설파하는데 여기서 진인과 군자(君子)는 서로 통하는 개념이라 하겠습니다. 발뒤꿈치로 호흡한다는 구절이 인상적인데 수행의 한 방법으로써 "인도의 요가 수행이 중국에까지 영향을 끼친 흔적이라는 학설이 있다"고 최 박사님이 각주에서 짚습니다. "부지런히 걸어간 사람"이란 뜻의 근행자(勤行者)란 언명도 우리 독자들이 곰곰 새길 만합니다. 

백락(伯樂)은 말을 잘 다스린 사람이었으며, 목수와 도공은 나무와 흙을 잘 다스리는 직분(p226)이라는 게 세상의 평가입니다. 그러나 장자는 이 역시 많이 부족한 말들일 뿐이며, 천하가 어울려 돌아가는 이치가 어떻게 한두 사람의 재주로 가능하겠냐고 반문합니다. 도공이 고운 흙을 놀려 가마에 넣고 그릇을 빚는 게 기실 그 전 수많은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노고, 나아가 불어오는 바람과 음양의 이치인들 그에 기여하지 않았겠냐는 것입니다. 대동(大同)의 큰 의미를 새길 때, 자연 안에서 결국 모두가 하나임을 깨닫는 사람만이 진실로 하늘과 교통한다 할 수 있겠습니다. 또 상권에서도 그러했지만, 저자는 수시로 유가(儒家)의 경전 <논어(論語)>에서 여러 구절을 뽑아 "필사하기" 코너에 배치하여 독자의 학습을 돕는데, 여기서는 자로(子路)편의 화이부동(和而不同)을 발췌하여 제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습니다. 선행은 남들이 모르게 완수해야 그게 참된 선행이며, 남들 다 보란 듯이 크게 목소리를 높이면 그게 어디 선행이겠냐는 뜻입니다. p283을 보면 송나라의 탕(蕩)이 장자에게 인(仁)에 대해 묻는 대목이 있습니다. 장자는 과연 그답게 "인은, 이리와 호랑이가 곧 인이다."라고 답합니다. 이는 유가의 가르침 중 인(仁)을 비판하는 의도이며, 범이나 이리도 부자(父子)간에 서로 친하니 그를 어질다 못할 바가 어디 있겠냐는 반어입니다. 소위 삼강(三綱)이라 하여 상하간의 서열이 분명히 정해져 있고 위에서 아래에게 선심이나 쓰듯 어짊을 작위하는 건 전혀 어짊이라 할 수 없다는 호된 꾸짖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p363에는 서무귀(徐無鬼)가 여상(女商)을 따라 위(魏)나라의 무후(武候)를 찾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개의 관상, 고양이의 관상을 논하며 진실로 세상사에 달통한 사람은 그 어느 것에도 치우침이 없다는 게 결론이었는데 무후는 서무귀와의 회견을 마치고 크게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여상은, 자신이 시, 서, 예, 악을 논하고 육도삼략을 설파했을 때도 주군이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 어찌 그같은 하찮은 변설로 높은 이의 마음을 살 수 있었는지에 대해 거듭 묻습니다. 서무귀(가상의 인물)는 무후가 진인의 기침 소리조차 듣지 못한 지 오래였으나 이제 비로소 참된 인간의 담론을 접하고 기뻐하지 않을 리 있겠냐며 답을 대신합니다. 뛰어난 사람은 사실 언어의 상론이 문제가 아니라 그 태도와 눈빛, 처신 자체가 모두 뜻이 깊은 가르침이며, 이를 알아본 무후 역시 예사로운 군주는 아니었다 하겠습니다. 

책 곳곳에 독자로 하여금 생각해 볼 만한 문제를 던지고 있으며, 실제로 서강대에서 출제되었던 논술 기출 문제들도 수록되었으니 수험생들이 심화 학습 교재로 활용할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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