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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가 운다
안영실 지음 / 문이당 / 2024년 12월
평점 :
안영실 작가의 단편 여덟 작품이 실렸습니다. "소설은 이야기가 아니다!" 서문에 나오는 작가님의 말인데, 아니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도 아니고, 소설이 이야기가 아니면 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이에 대해서는 같은 서문 안에 안영실 작가 본인이, 답 아닌 것 같으면서도 답인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떠도는 존재다." 이건 또 무슨 동문서답입니까? 하지만 소설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보다 더 적실한 설명도 없을 것 같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한국 소설에는 왜 이렇게 가정을 책임지지 않고 떠도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역마살이라는 이름으로 좋게 포장하곤 하죠. 이게 여자 입장에서 나오는 말이라는 게 더 기가 찹니다. 든 정이 있어서(p22l 차마 사람을 미워하지는 못하겠고 그저 사주팔자에 무슨 마가 껴 저러는 거겠거니 합리화를 하는 심리인데, 아무튼 이게 지난시대 어른들이 세상사를 이해하던 한 방식이었습니다. <만전춘별사>까지 그 유래를 거슬러올라갈 수 있네요(그보다 훨씬 전이겠지만). 그리고 아일랜드의 봄, 갓 구운 스콘에까지 심상이 옮아옵니다. 극과 극의 전환이며, 에밀리를 위한 왈츠(?)를 말로 표정으로 연주하는 "그"와 함께 금지, 아니 지금의 밤이 깊어갑니다. 원심력은 그저 겉보기로 구색을 맞춘, 힘의 평형을 이루는 장식에불과하니 결국은 이 왈츠가 돌림노래로 반복되는 것입니다.
저는 예전에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이 비지땀의 뜻을, 비지를 먹으면서 흘리는 땀이라고 의도적으로 제시한 오답 선지를 읽으면서 웃음을 참지 못하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물론 문제은행의 그 출제자는 사람들더러 웃으라고 그런 선지를 고안한 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진지하고 심각한 학력평가에 그런 문장이 나오니 웃음보가 터질 수밖에 없었겠는데... p58(<늑대가 운다> 中)을 보면 비지는 날콩을 갈아넣어야 제맛이 난다는 문장이 있습니다. 요즘 K푸드가 세계를 휩쓰는 세상이라지만 날콩과 익힌 콩의 그 미묘한 차이를 외국인들이 비지(혹시 이걸 먹는다면)에서 알아챌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비지는 그 비릿한 맛 때문에 한국인도 잘 못 먹는 이들이 많죠.
지금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외교 방침(한때 기업 화웨이의 영업전략이기도 한)을 전랑의 그것이라 불렀는데, 이런 걸 보면 그들의 유전자 안에 몽골인의 그것이 적잖이 들어갔나 봅니다. p61에 보면 몽골 전통의 연주 가락을 "흐미"라 부른다고 나오는데, 이게 그들이 좋아하는 늑대 울음소리와 닮았습니다. 개들의 하울링, 숙희(이 작품에서 개 이름입니다)의 울음... 사람들도 이에 익숙해지면 뭔가 속으로 감정이 통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이나 늑대나 그 깊은 본성은 닮은데가 있고 둘 다 사회적 동물이기도 하니. "마니 녜드 이녜드(네 이름은 웃음이란다)."
"늙음은 미(美)가 아니라 추(醜)다." 이건 죽은 움베르토 에코 같은 사람한테 물어 보면 책 두 권으로 답을 내놓을 것 같습니다. 이 작품 <매미>에서 화자는 한자를 파자(破字)하며 그 깊은 뜻을 파고들려 합니다. 술 유(酉)에 귀신 신(神)이 붙은 글자라는 건데, 그럼 모습이 보기 싫어지는 건가요? 여튼 상관없습니다. 전라도 사투리를 걸쭉하게 쓰는 화자가 "미만 따지는 시상(세상)이 덜 되야먹은 겨!"라고 바로 일갈하시니 말입니다. 경(經)을 읽으면 절로 눈물이 난다...(p84) 전 도저히 그 경지를 짐작할 수 없습니다. 개수대도 깨끗하고 젊은 양반 기억도 싹 사라진 치매의 부작용, 아니 특효까지도 말입니다.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p105(<여자가 짓는 집> 中)에 인용되는 카를로 로벨리의 책 제목입니다. 사랑에 빠지면 확실히 그 눈에 콩깍지가 씌는지 엄마 눈에는 딸 인생 망칠 작자(J라는 분)라는 게 훤히 보이는데도... 이 사위라는 자는 학벌이 아깝고 인물이 아까운데(그 장모님의 평가입니다) 방구석에 처박혀 게임만 합니다. J가 멋진 양복을 입고 첫출근을 하던 날 전철에서 유도선수들에게 맞아 크게 다친 적이 있었다고 하네요. 물론 같은 회사 직원들이 손쓸새 없이 그런 일이 터졌겠다고 짐작은 되지만, 전 솔직히 요즘도 대기업에서 직원들에게 그런 걸 일부러 시키는지 좀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설정상 요즘 일은 아닙니다). 약은 인간은 전철에서 설령 시비가 붙어도 상대 약만 올려놓고 적정 단계에서 빠져나오는데 J는 고수한테 아직 배울 게 많은 듯합니다. 아, 아무튼 지금 숨이 가뿐 건 내가 아니고, 이 수치스러운 감정도 내가 아니며 나는 어딘가에 상처없이 온전히 남아있다는 그 여성분의 생각, 너무 슬픕니다.
냉장고 정리를 평소에 잘 해둬야 합니다. 안 그러면 p218(<바람벽에 흰 당나귀> 中)에서처럼 가뜩이나 내성발톱으로 아픈 발가락을 더 크게 다칠 수 있기 때문이죠. 전 가끔 소설가분들이 마치 AI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소설이라는 게 이런이런 효과를 노리고 치밀하게 설계된 소산이 아니라 그저 이야기를 꺼내시는 중 기막히게 떠오른 온갖 이미지와 주제가 희한한 조화를 이루며 작품 하나가 만들어지니 말입니다. 내성발톱 이야기가 나왔다고 진짜 작가분이 내성발톱으로 고생하는 건 아닐건데, 또 물리학 전공하고 졸업 후 재벌사에 입사한 남친이 정말 있었던 것도 아닐텐데 이야기가 이렇게 신기하게 잘 이어지니 말입니다. 아무튼 <갈릴레이 갈릴레오(순서가 바뀐 건 이유가 있습니다)>에서 희수와 함께 망원경을 들고 다니는 J는 앞의 그사람과는 또다른 인물이겠습니다. 옷 벗은 마야(p167)가 사실 진짜 아름다운 데가 어딘지 정확히 아는 그는 망원경도 필요 없는 인물이며, 유도선수들에게 맞은 곳도 이제 멀쩡히 다 나았으리라 믿습니다(아니, 애초에 다른 사람이었지만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