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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말씀만 하소서 - 출간 20주년 특별 개정판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4년 12월
평점 :
자녀를 먼저 떠나보내는 부모의 아픈 경험을 참척(慘慽. p10, p75, p133)이라고 부릅니다. 고 박완서 선생은 1988년, 57세 때에 당시 25세였던 맏아들 서울대 의대생 호원태씨를 먼저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박완서 선생은 둘째 아드님도 의사로 키우신 분인데, 그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 최고 엘리트로 자라나야 마땅했을 금쪽같은(문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장남을 불의의 교통사고로 먼저 떠나보내셨으니 그 아픔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박완서 선생은 작가로서의 데뷔가 당시 기준으로는 다소 늦은 편이었는데, 1981년 <엄마의 말뚝 2>의 이상문학상 수상으로 문단과 독자들 앞에 완전히 그 존재를 각인시켰습니다. 이후로는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탄탄대로를 걸었는데, 그 와중에 저런 큰일을 겪으신 겁니다. 이 책은 초판이 2004년에 나왔고 올해 출간 20주년을 맞습니다. 아드님이 돌아가신 후 16년이 지나서야 관련 글들을 모아 책을 내셨다는 사실도 우리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하죠.
이 책엔 평소 선생의 글쓰기 스타일이나 주제와는 크게 다른 글들이 많아 독자를 처음에 약간 당황하게도 합니다. 하지만 글들의 모티브가 무엇이었는지를 먼저 생각해 보면 당연히 저런 문장과 생각들이 나올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선생은 팬들이 다 알듯이 가톨릭신자이며, 1980년대 전반 혹심한 군사독재의 칼날이 번득일 때 용감하게 정치(그리고 사회의 병든 세태)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작품 안에 띄우기도 한 분입니다(물론 통속 소설도 잘 쓴 분입니다). 저는 그걸 천주교인으로서의 양심 그 발로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독실한 신자분이 아무 잘못도 없이 성실히 삶을 산 엘리트 아드님을 갑자기 데려간 신에 대해 이처럼이니 격한 분노와 원망을 표현하니, 얼마나 그 참척의 아픔이 크셨을지 짐작이 되고도 남습니다. p62를 보면 다섯 아이를 젖먹여 기르던 당시에 영세를 받으셨다고 하는데, 책 곳곳에 나오듯 선생은 평소에 여러 목사님의 설교집, 불교의 법구경 등도 깊이 읽으시던 분입니다.
p55를 보면 생전에 호원태씨가 마취과로 인턴 진로(p63)를 정하면서 그 이유에 대해 차분하게 어머님 앞에서 설명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 마음과 태도가 얼마나 당당하면서도 합리적인 의욕으로 가득한지 모릅니다. 어머니들이란 본래 아들에 대해 객관화가 안 되는 법인데, 이처럼이나 태생부터가 잘나고 똑똑하며 도덕적으로도 흠 잡을 구석이 하나 없는 아드님의 의젓한 말씀을 들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자긍심으로 가득차셨겠습니까. 세상에 이런 아들이 또 있을 수 있나, 전세계 그 어느 귀공자들을 트럭으로 데려와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셨을 만합니다. 자 그런데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런 아들을 뺏어간 신이라니? 이건 신이 아니라 살인강도의 악독한 범죄와도 비겨 마땅하다고, 기존의 모든 신앙을 폐기할 만하다고 여기지 않았겠습니까.
세상에는 도무지 이유를 댈 수 없는 부조리와 비합리가 많습니다. 기독교 구약의 욥기(p30)를 보면 한때 남부러울 것 없이 살던 욥이라는 장자에게 불행이란 불행은 모두 닥칩니다. 이 이유는 그저 신과 악마가 내기를 했다는 사실뿐이었는데, 욥 본인보다도 기록 밖에서 이 모든 사정을 다 관찰하는 독자가 더 화가 날 정도입니다. 대체 욥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저런 사람을 상대로 저 장난을 친단 말인가? 악마야 본래 악마라고 쳐도, 신이 이 저열한 장난에 동조한다는 게 너무 한심하지 않은가? 그래서 선생은 욥기를 읽어 위로가 되는 게 아니라 도리어 분노를 돋운다고까지 솔직히 말합니다. 독자들이 선생의 글을 좋아하는 것도 이같은 솔직함이 잘 드러나서입니다.
그런데 참척의 가장 교과서적인 예는 바로 신약의 복음서에 잘 나옵니다. 바로 예수의 모친인 마리아의 경우(p70)인데, 이분은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는 걸 눈앞에서 지켜본 분입니다. 십자가형은 반역자, 살인자, 강도 들이나 받던 형벌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대체 무슨 죄를 지어 그런 상황에 처해야 했겠습니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그 모든 분노와 불만과 부정의 감정이 다 정화(p172)될 수 있습니다(제가 그렇다는 게 아니고 박완서 선생의 경지를 추측건대 그렇겠다는 생각입니다. 전 그렇게 착해질 자신도, 의도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