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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으로 읽는 삼국지 - 개정판
이동연 지음 / 평단(평단문화사) / 2024년 12월
평점 :
삼국지(연의)는 동아시아 어느 나라에서건 남자의 로망과도 같습니다. 공교롭게도 이걸 영어로 번역한 제목이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인데, 물론 일차 의미는 소설이란 뜻이긴 하나 여튼 워딩 자체에도 공통점이 있다는 게 재미있습니다. 삼국지 몇 번을 읽지 않은 이와는 말을 섞지 말고(말을 나눌 가치가 없으므로), 삼국지 몇 번 이상 읽은 이와도 말을 섞지 말라(처세에 달통한 자이므로 그에게 이용당할 위험이 있어서, 아니면 내 속셈을 빤히 꿰뚫어보는 자이므로)는 오래된 격언도 있지만, 사실 다 번거로운 언사일 뿐입니다. 삼국지의 가치는 읽어 본 사람만이 알며, 수백 년 전(나관중 시대 기준)이나 지금이나 사람 심리의 본질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는 점도 깨닫게 됩니다. 처세 심리의 택틱스에 있어 삼국지만큼 생생한 교과서도 드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p120을 보면 조조의 "흔들리지 않는 자신감"을 저자는 지적합니다. 진림이 조조를 토벌하는 격문을 작성할 때, 비천한 환관의 자식이라는 문구를 일부러 집어넣어 상대의 감정적 격동을 유발합니다. 그러나 조조는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게 자신의 선결 과제에만 집중하며, 이런 현명한 처신의 연속이 결국 그의 승리로 연결됩니다. 조조는 그런 모욕적인 도발이 자신의 감정에 일으키는 교란이라는 게, 결국 현실적 이익과 아무 관계도 없는, 일시적이고 유치한 전기적 파동에 지나지 않음을 이미 알고 있었겠습니다(물론 패러데이와 맥스웰이 전자기학 기초를 놓기 1700년 전이긴 합니다만). 어떤 분노, 짜증, 복수 욕구 분출 등이 자신의 이익 관철에는 하등의 도움이 안 되며, 사람인 이상 감정이 일어나지 않을 수야 없겠으나 이를 메타적으로 잘 관리하여 빨리 평정심을 찾고 필요한 과업 수행에 집중하는 게 최상의 선택일 뿐입니다.
저자는 책 여러 대목에서 손견을 비판합니다. 손견은 <연의> 초반 그 활약상이 두드러지는 "강동의 호랑이"이므로 독자들에게 대체로 호평을 받습니다만 저자는 p117에서 "열등감, 인적 구성의 획일화"를, p136에서 "부족한 신중함"을 들어 그를 비판합니다. 그의 둘째 아들 손권은 소설에서는 그 실책이 딱히 부각되지 않고 대개는 "수성(守城)의 달인"으로 평가받지만, 요즘은 정사(正史)까지를 내처 읽는 독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그가 말년에 저지른 여러 실책이 지적되고 평판이 많이 내려갔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p106에는 원술을 두고 "남양의 꿩"이라는 평가가 있는데 원소나 원술이나 가문의 어드밴티지를 제대로 활용 못 하고 모든 것을 날려버린 어리석은 자들이므로 뭘 봐 줄 만한 데가 없습니다. 책에서도 당연히 부정적인 평가뿐입니다.
"과거 성인(聖人)들의 가공된 스토리에 허우적대는 구강 수동적 성격(p199)" 저자가 유요(劉繇)를 두고 내린 평가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원영적 사고"가 있는데, 10대 소녀가 세상을 마냥 낙천적으로 보는 거야 누가 뭐랄 일이 아닙니다만 한 지역을 책임지고 다스려야 할 유지, 소군주가 그 현실 인식이 미숙하다면 본인에게나 백성들에게나 여간 큰일이 아니며 당장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합니다. 저자의 심리학 이론 원용에 의하면 이런 사람은 마냥 현실을 낙천적으로 보고 경우에 맞지도 않은 레퍼런스에 현실을 왜곡시켜 투영하는 경향이 있는데, 유년기 부모 보살핌으로 정신적으로 아직 독립을 못한 탓이라고 합니다. 보통 연의 독자들이 무능한 유요를 두고 비웃기는 해도 그의 심적 게슈탈트를 두고 oral-passive로 규정하는 건 처음 보는데 예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p169를 보면 여포의 패인 중 하나로 "자신과 똑같은 맹장(孟將)들만 밑에 둔 선택"을 저자는 들고 있습니다. 지도자는 큰 그릇으로 휘하에 다양한 유형을 두루 포진시켜야 하는데 한고조 유계라든가 제(齊) 맹상군 같은 인물들은 본인부터가 그릇이 크니 온갖 사람을 곁에 두었습니다. 반면 협량한 소인배들은 사람을 잘 믿지 못하고 열등감에 사로잡히거나, 저자가 지적하는 대로 본인과 비슷한 유형만을 곁에 두기에 상황 발생시 다양한 방안을 강구하지 못하므로(이른바 에코 체임버 효과) 실패하는 정치세력으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진궁(p314)은 조조가 궁벽하던 시절 그의 역량을 높이 평가했으나 너무도 비인간적인 모습에 크게 실망하여 조조가 방심한 틈을 타 그를 죽이려고도 했습니다. 이때문에 삼국지 독자 중 촉(蜀)을 응원하는 이들에게 인기가 많고, 능력도 뛰어난데다 최후도 지사답게 비장하여 널리 인구에 회자됩니다. 여포도 그의 태도가 불손하다 하여 마냥 멀리할 게 아니라 그의 좋은 충언을 들었으면 정치적으로도 성공했을 텐데, 자신의 단점을 커버하려 들지 않는 자의 말로가 다 이러합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 설정과 처세에 대해 생각해 볼 만한 점이 많이 정리되었으며, 삼국지를 설령 안 접해 봤다 해도 인용된 스토리와 저자의 심리학적 해석이 재미있기 때문에 읽어 볼 만한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