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산도 하늘길
한승원 지음 / 문이당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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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전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며 다산 정약용의 형입니다. 흑산도 앞바다의 다양한 어류를 주제삼아 사전을 저술한 인물로 우리는 그의 이름을 국사 교과서에서 배웠습니다만 그런 명저가 어떤 배경에서 완성될 수 있었는지 깊이 있게 알지 못합니다. 이 소설은 전남 장흥 해산토굴에서 실거주하며 구도의 삶을 살다시피 한 한승원 선생의 역작입니다. 장흥은 남해안이고 흑산도는 서해안이므로 거리는 좀 떨어져 있습니다만 다도해로 이어진 두 고장의 정취가 적잖이 닮은 바도 있으므로, 이백년 전 외딴 섬에 유배 온 고독한 선비의 삶이 어떠했을지를 풍부한 상상력을 통해 실감나게 재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장성호는 손암(巽庵)에게 학문의 의의에 대한 질문을 듣고 제 나름의 생각한 바를 아룁니다. 남인 명가에 태어나서 우수한 두뇌로 평생을 학문에 정진한 그로서는 이 상민인 장가 녀석이 짧은 지식으로 주절주절 떠드는 품이 가소롭기도 했을 것입니다. 증광별시에서 일위로 합격(p64)한 그가 어떤 심경으로 아랫것의 변설을 들었을지야 우리 독자들도 짐작이 갑니다. 마치 음욕에 미친 노파가 방송 강좌 몇 줄 주워듣고 천하 이치를 통달했다는 듯 안하무인으로 설치는 꼴을 보는 듯 말입니다. 허나 장씨 성 가진 아랫것의 심성에 어떤 허세 따윈 없습니다. 이를 손암도 모르는 바 아니며, 자신의 현 처지가 워낙 불편하니 별의별 언사가 다 심경에 파란을 일으킬 뿐입니다. 

"간장은 신성함으로 돌돌 뭉쳐진 것이었다(p114)." 명가, 종가에서는 장 하나 김치 하나도 예로부터 소중히 전해 온 비결과 내력이 있습니다. 영양 성분의 문제라기보다, 식구들의 건강과 안녕을 생각하는 마음씀과 정성이 그 안에 담겨 전해 올 뿐입니다. 장 종지의 신성함이 후원 소재 사당에까지 비견됩니다. 그런 명문가에서 자란 손암이, 이곳 바람 차고 척박한 오지에서 거친 밥을 먹으며 얼마나 참담한 마음이 들었겠습니까. 뜬금없이 찾아와 "나리를 사모했다"며 시중을 드는 거무의 손길도 무덤덤하게 여겨졌을 만합니다. 그런데 현대 독자에게 이 장면은 다분히 남성 우월적 사고의 소산으로 비칠 수 있습니다. 

허적(虛寂). 손암은 마음이 답답하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머리가 터질 듯하다가도 선비다운 수양의 힘으로 자세를 다잡습니다. 충동대로 몸과 마음을 휘두르는 자는 배운 바가 짧고 천성이 비천해서 그런 행태를 보이는 것입니다. 간사하기 짝이 없는 이장 윤강순은 손암의 앞에서는 온갖 아첨을 하며 과장되이 악전의 수완을 칭찬하지만 뒤에서는 무슨 흉계를 꾸미는지 모릅니다. 아부 끝에 주역과 천주학의 이치에 대해 묻는데(p172), 약전은 벌써 이 작자가 말에 살을 찌워 윗선에 고해 바칠 심산인 걸 눈치챕니다. 태생부터가 악질의 종자를 타고났기에 입만 벌렸다 하면 거짓부렁이요 모함이며 남의 불행을 통쾌해하는 못된심사로 가득합니다. 이런 자는 그 손자에까지 앙화와 저주가 내릴 만합니다. 그런 걸 두고 천벌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어느 밤 훨훨 날아가서 강진의 아우를 만날 수 있을 텐데(p205)." 지느러미가 마치 날개처럼 발달하여, 익숙지 않은 눈에는 마치 물고기에 날개나 달린 듯 보일 수 있습니다. 옥문은 손암에게 고기의 이름이 날치라고 알려 주고, 거무는 저도 살려고 몸부림치는 것이니 살려 주라고 부탁합니다. 이 와중에 장성호는 대흑산도 모래마을 학동들을 모아 "좌랑어른"을 스승으로 모실 준비가 되었다고 전합니다. 배움은 역시 학문의 정수를 맛본 이를 통해야 제격이며, 다만 천성이 악하고 불성실하며 머리도 우둔한 천것은 반드시 제 자리를 찾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창대, 작은이, 삼돌이... 약전 주변에서 알게모르게 도움을 주며 손암 같은 지사가 못된 자들의 흉계에 빠져들지 않게 돕는 이들은 선량한 민초(民草)의 상징과도 같습니다. 이장 김부칠은 같은 직함이라도 저 악독한 윤강순과는 천지차이로 처신이 다릅니다. 험한 벽지 흑산도 자체를 권력자의 거대한 폭압 도구처럼 접했다가 이곳 자연의, 또 사람의 성정과 기어이 화합하여 대자연과 하나가 된 채 마침내 한 줌 흙으로 돌아간 정약전의 고요한 듯 치열한 삶을 보며, 섬이면서도 섬이 아닌 개인의 집념과 달관에 대해 깊이 상량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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