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문학 필독서 50 - 셰익스피어에서 하루키까지 세계 문학 명저 50권을 한 권에 필독서 시리즈 14
박균호 지음 / 센시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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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영혼과 인성을 풍요롭게 가꿀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는, 어린이에게 어려서부터 고전 문학 작품을 읽히는 것입니다. <레미제라블>에서 미리엘 주교는 자신에게 도움을 받은 부랑자 전과자가 배은망덕하게도 성당의 은촛대를 훔쳐 달아나다 경찰관에게 잡혔을 때, 너그럽게도 자신이 선물로 주었다며 거짓말까지 하며 재수감(누범가중 때문에 당시 법제로 종신형이 될 수도 있죠)을 막아 줍니다(이 책 p18 이하). 너무도 감동한 부랑자는 그순간 인간쓰레기에서 완전히 새사람으로 거듭나는데 기적이란 사실 이런 걸 두고 진정한 기적이라 일컬을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감동적인 사연을 보고 어린이는 인간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개과천선의 바탕에 대해, 또 선한 영향력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위고의 인간적 깊이가 고전을 낳았고, 그 고전은 수백만 수억을 감화시키니 과연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자 박균호 선생께서도 고전 베스트 50 첫머리에 과연 이 명작을 배치하신 게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분노의 포도>(p82)는 원래 기독교 신약 요한계시록에 그 출전을 둡니다. 오클라호마는 비교적 늦게 정착민들이 들어선 곳이라 농업 인프라가 미비하여 한번 흉작이라도 닥치면 주민 대다수가 빈곤에 허덕이는 지역이었습니다. 히틀러는 이 소설을 읽고 "미국의 멸망이 머지 않았다!"며 쾌재를 불렀다는 설도 있는데 그만큼 미국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생생한 필치로 고발한 역작이었습니다. 작중에서, 또 실생활에서 "오우키"라며 멸시되던 이들이 그들의 잘못보다는 경제 구조의 폐단 때문에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된다는 신랄한 서술이, 경제공황으로 파탄에 빠진 (다름아닌) 미국 시민들, 독자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얻으니 정부 당국에서도 마냥 불온시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이 작품은 문학(가)의 사회적 참여 문제에 대해서도 깊은 생각을 하게 돕는 좋은 예입니다. 

보헤미아의 섬세하고 예리한 정신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 <변신>도 누구의 어떤 리스트에서건 빠지지 않는 명작입니다. 어제까지 가족의 사랑과 존중을 받던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날 갑자기 벌레로 모습이 바뀝니다. 왜 사람이 벌레로 바뀌었는지 작품은 그에 대해 아무 설명이 없습니다. 하지만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인격이나 품성이 아닌 그저 경제적 기능으로만 평가받으며 소모품처럼 사라져가는 불쌍한 잠자의 운명은 우리 독자 모두가 공감할 만합니다. 저자는 "몇 번을 읽어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거대한 성채와 같은 소설(p133)"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 카프카의 다른 소설 <성채>가 있기도 합니다. 

1987년 장예모 감독의 영화판으로도 잘 알려진 <붉은 수수밭>은 p156에 나오듯 원래는 소설가 모옌의 원작이 있었습니다. 개인의 사생활은 물론 어느 나라에서라도 100% 보장될 수 없고 어느 정도는 희생이 불가피합니다. 그러나 일생을 통해 그 생육, 노동, 경력 축적 등이 국가에 의해 결정된다면 그 불가피성, 옳고그름을 떠나 그 개인의 입장에서 너무도 슬픈 일 아니겠습니까. 모옌은 <개구리>를 통해 숨막힐 듯 옥죄어 오는 통제, 감시의 구조를 고발합니다. 저자는 그의 소설 세계에서 이런 비판 정신도 정신이지만 치밀한 서사 구조, 빈틈없고 생생한 인물 묘사 등이 단연 빼어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올리버 트위스트>를 쓴 찰스 디킨스는 그 문학성도 문학성이지만 대중적으로도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당대 영국들인, 또 미국인들이나 번역본을 통해 이 작품을 접한 타국 독자들도 악당 페이긴이나 빌 사이크스 같은 캐릭터들의 그 실감나는 묘사에 열광하며 대체 누구를 모델로 이런 인물들을 만들었냐며 열광했습니다. "가장 숭고한 선은 가장 저열한 악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p215)." 빅토리아 시대의 형식적 위선과 엄숙주의에 대한 과감한 도전으로서도 이 작품은 큰 의의가 있습니다. p214에서는 윌리엄 새커리의 <허영의 시장>에 대해서도 저자께서 짧은 소개를 하는데 이 작품도 읽어 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p260에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외국인(러시아인)으로서의 한계 때문에 영어 사전을 옆에 끼고 작품을 짓는 엄청난 고충이 있었다고 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영어로 쓴 작품들은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흐르는 아름다움"이 묻어난다고 평가 받습니다. 해당 챕터 앞에도 나오듯이 나보코프 본인이 러시아 귀족 태생이므로 어려서부터 영어 등 외국어 교육을 잘 받은 결과이기도 합니다. 사실 <롤리타>는 이 작품에서 심리학 용어가 하나 탄생했을 만큼 소재 자체가 소아성애라서 큰 논란을 불렀는데, 그를 떠나 작품 자체의 포맷상 성취, 시점의 자유로운 전환 등 그전에는 없던 여러 실험적 시도들 때문에라도 높은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고 합니다.  

에밀리 브론테가 쓴 <워더링 하이츠>는 역시 빌런인 히스클리프 캐릭터의 너무도 실감나는 묘사와 이에 대응하는 캐서린 등 린턴 가 사람들의 처량한 사연 등이, 일평생을 별다른 외부 교류 없이 지낸 어느 여성 작가의 손끝에서 나왔다고 보기에 너무도 촘촘하게 구축된(그 정도로 잘 쓰인) 명작입니다. 이 책에는 "폭풍의 언덕"이 아니라 작중에 나오는 고유명사인 만큼 그대로 옮긴다는 취지에서 원어 그대로 이름이 붙었습니다. 어떤 관점에서 읽어도 소설 속의 몹시도 거칠고 처절한 사연에 그대로 빨려들어갈 만큼 완성도가 높은 대작임이 분명합니다.  

개인적으로 토머스 하디의 작품들은 <더버빌가의 테스>뿐 아니라 <비운의 주드(주드 디 옵스큐어)>까지 해서 너무도 우울하고 암담하다고 느껴 그리 자주 읽게 되진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린이 독자에게라면 이게 과연 읽혀서 좋은 내용인지도 의문입니다. 종교는 일각에서 "인민의 아편"이라 불릴 만큼 때로는 현실을 적극적으로 개척하려는 의지를 꺾어버리는 부작용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 작품 역시 빅토리아 시대에 나왔는데 저자는 당시 기독교의 공허한 위선을 신랄하게 풍자하려는 의도가 깃들었다고 해석합니다. 그런 해석이라면 비로소 저도(?) 납득이 됩니다.  

체호프 하면 이른바 그의 4대 희곡이란 것도 있고, 근대 단편의 완성자로까지 꼽히는 위대한 작가입니다. 책에도 나오듯이 이 작품은 그 스피츠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과 주인공 드미트리 구로프 사이의 불륜 이야기인데 사실 구로프가 바람을 피우게 된 건 그 아내가 배우자에 대한 존중이 너무도 결여되었다는 이유도 적지 않습니다. 작품을 읽어 보면 나오지만 심지어 아내는 남편의 이름도 언제나 잘못 발음합니다. 러시아어에는 대부분의 자음이 경음, 연음 쌍으로 존재하는데, 드미트리(Дмитрий)의 [d]는 그저 경음으로 읽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언제나 연음으로 읽습니다. 그래서 "지미트리"처럼 불리는데(무슨 중세인도 아니고) 구로프는 이걸 너무도 싫어하죠. 아무튼 작가는 이 모호한 불륜 이야기에서 불륜 역시도 사랑의 일종이며 선과 악 중 어느 하나로 재단할 수 없는 인간다움의 한 국면에 대해 성찰할 수 있다고 해석합니다. 

50편의 걸작을 일별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흥미로우며 독자에게 어떤 해석의 표준을 제시하는 것 같아서 유익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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