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클래식 리이매진드
루이스 캐럴 지음, 안드레아 다퀴노 그림, 윤영 옮김 / 소소의책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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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캐럴이라는 필명을 썼던 옥스포드 출신의 수학자가 쓴 이 판타지 소설은, 알고보면 치밀하게 구성된 구조 안에 인생의 쓰디쓴 진실, 시사를 반영한 언어 유희, 수학-논리학적 패러독스의 우화적 설명 등이 촘촘히 녹아들어간 이지적인 고전입니다. 정확하고 꼼꼼하게 이뤄진 번역이 뒷받침되어야 이런 원작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데, 이 책은 게다가 현대적이고 아름다운 일러스트까지 포함되었기 때문에 재미는 재미대로 느껴 가면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혹시나 머리가 들어가도 어깨에서 걸릴거야. 어깨 없이 머리만 있으면 무슨 소용이야? 아, 차라리 망원경처럼 몸이 접힐 수 있다면!(p29)" 앨리스답게 천진스러우면서도 재치있는 대사입니다. 누가 생각해도, 어깨 없이 머리만 있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어떤 소용을 따지기 전에 그런 상태가 물리적으로 가능이나 할지가 걱정이지만 말입니다. 저는 망원경처럼 몸이 접힐 수 있는 엄청난 편익을 망상하면서 그 앞에 "차라리"라는 불만, 양보의 부사를 붙이는 게 더 재미있고 엉뚱했습니다(영어 원문도 대체로 비슷합니다). 앨리스는 아마 그런 기능이 생긴다면, 몸은 아마 보기에 좀 볼품없어질 것이며 그런 큰 희생(!)은 감수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 듯합니다. 어린 소녀다운 생각입니다. 

학습이 아직 불충분하게 이뤄진 어린 나이이지만 앨리스는 지금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자신의 주변 상황이 매우 황당하다는 정도는 충분히 압니다. 말도안된다, 터무니없다 같은 말을 수시로 내뱉으면서도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의 룰과 한계를 정확히 파악하려 들고, 최선을 다해 적응하고 역경을 극복하려 애쓰는데, 어떤 현실 도피 같은 건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상한 현실에 너무나 열심히 적응하는 나머지, 이상한 나라의 네이티브들이 얘를 더 신기하게 여길 정도입니다. 외국어인 영어를 열심히 공부하는 우리들도 느끼는 거지만, tale과 tail처럼 발음만 같을 뿐인 이의어가 때로는 기묘한 상황에서 서로 만나 희한한 어이러니를 빚는 걸 보고 놀라거나 우스워할 때가 있습니다. p63에 그 유명한 대목이 나오며, 적절하게 역주가 삽입되어 독자의 이해를 돕습니다. 이 고전은 이런 맛에 읽는 것입니다. 

아, 성장, 성장이란 무엇인가? 때로는 아프고 괴롭지만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겪고 치러내야 할 통과의례입니다. 아직 어린 앨리스는, 자신처럼 성장이 한참 남은 애벌레에게 묻습니다. "아직 겪어보지 못하셨겠지만, 언젠가는 번데기가 되고 언젠가는 나비가 되실 거잖아요. 그때가 되면 뭔가 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겠어요?(p94)" 이렇게 말하는 앨리스 자신은 (지금) 아마 그런가 봅니다. 그런데 본인도 더 자란 틴에이저가 되고 처녀가 되고 누군가의 신부가 되고 어머니가 될 때 조금도 뭔가가 이상하다고 안 느낄 거면서 지금 어린 소녀로서의 기분만 갖고 이런 말을 하는 게 무책임하네요!(ㅋ) 이런 앨리스의 질문이 가당치않다는 듯 "전혀!"라고 망설임없이, 단호하게 부정하는 애벌레의 말투도 웃깁니다. 얘는 애벌레답지 않게 무슨 낭만이라는 게 없네요. 

예수 그리스도도 남을 평가하지(judging)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너 역시도 평가받을 것이라면서 말입니다. 사실 모자 장수도 무슨 나쁜 뜻이 있어서는 아니고, 그냥 지가 이상한 나라에 살다보니 미감이 이상해져서 앨리스가 그리 보여 "너 머리 좀 잘라야겠다?"라고 한 것일 뿐이겠습니다. 그런데 빅토리아 시대에 살다 온 앨리스는 "처음 본 사람한테 대뜸 인물평부터 하는 게 대단히 무례하네요!"라며 모자 장수한테 쏘아붙입니다(p134). 모자 장수는 모자 장수답게 앨리스의 이 말에 뜬금없는 수수께끼로 응수합니다. "큰까마귀랑 책상이 닮은 이유는?" 큰까마귀와 책상이 닮았는지도 우선 동의 못 하겠는데 그 이유를 대라니? 아마 질문의 의도는 닮은 점을 찾아보라는 것이겠습니다. 

이 다음 말이 정말 재미있는데 앨리스는 "적어도 나는 내가 의미하는 걸 말하며, 의미하는 걸 말하니, 말하는 것과 의미하는 것은 같은 거에요."라고 합니다. 저도 어렸을 때의 영어 공부 중에서, mean이 어떤 때에는 곧 say, tell의 뜻과 같아진다고 느꼈는데, 영어의 mean은 진정으로 발화자가 의도하는 바이며, say, tell 등은 어쩌다 삐끗해서 말이 잘못 나온 것까지 다 포함입니다. 법학에서 말하는 표현주의와 의사주의의 대립과도 비슷합니다. 앨리스의 대사 중에 "적어도"라는 한정어가 붙은 걸 보십시오. 자기는 표현과 내심이 언제나 같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압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어른들은 그렇지 못하죠. 

찰스 도지슨(=루이스 캐럴)은 명백히 에르빈 슈뢰딩거보다 앞선 시대의 사람입니다. 생전에 슈뢰딩거는 자신의 고양이 비유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캐릭터 중 하나인 체셔 고양이에 영향 받았다고 명확히 밝힌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p172에 나오는, "머리가 차츰차츰 희미해지다가 마침내 사형집행인이 들어오자 완전히 사라진 고양이"를 묘사한 대목은, 누가 뭐라해도 슈뢰딩거가 든 그 비유의 세밀화 버전입니다. 읽을 때마다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며 도지슨 역시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확률분포상의 존재"에 대해 양자역학을 전혀 모르면서도(택도 없죠), 뭔가 천재답게 일찍부터 영감이 왔던 건 아닌지 저 혼자서 추측해 봅니다. 고전은 이처럼 읽을 때마다 새로우며, 독자를 신기하고 이상한 나라로 이끕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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