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이야기 전달자 - 2022년 뉴베리상 100주년 대상 수상작 오늘의 클래식
도나 바르바 이게라 지음, 김선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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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예나 지금이나 열광하는 건 단순한 지식이나 팩트가 아니라 공감하고 몰입할 수 있으며 듣다 보면 어떤 영감까지를 선물하는 "이야기"입니다. 왜 이렇게 이야기를 좋아들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려서부터 할머니나 엄마가 들려 주는 이야기에 포근히 감싸안기는 건 동양과 서양이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 문명이 마침내 어리석은 물욕이나 호승심을 버리지 못하고 핵전쟁으로 멸망한다 해도, 행여 재기의 희망이 조금이라도 남아 가냘픈 싹을 틔운다면 그건 바로 이야기를 통해서일 것입니다. 

십여 년 전 <더 기버>라는 베스트셀러가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는데 그 소설의 내용도 이야기의 어떤 전달을 제재로 삼았더랬습니다. 2022년, 즉 올해 뉴베리 대상을 받은 놀라운 아동문학(소설)이, <더 기버>의 주제를 다분히 닮은, 그러면서도 사연이 해리포터 연작처럼 더 발랄하고 더 경쾌하게 진행되는 바로 이 작품입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스케일도 크고 세계관도 촘촘해서 앞으로도 계속 연작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도 들었습니다. 소속 장르도 SF라서 보다 지적인 독서를 좋아하는 성인층도 얼마든지 푹 빠져가며 책을 읽어갈 수 있겠네요.  

"우리는 아름다운 것들을 너무 많이 남겨놓고 떠나야 해. 이처럼 강력한 힘과 복원력을 지닌...(p42)" 사람이 죽을 때 서러운 이유는 그간 벌어놓은 돈을 싸짊어들고 갈 수가 없어서도 아니고, 살아서 누린 그 모든 쾌락을 더 이상 누릴 수 없어서도 아니며(어차피 육신이 늙으면 기회가 있어도 못 즐깁니다), 바로 그토록 애정하고 애착하던 것들을, 사람들을 이 세상에 놔두고 먼저 가는 서러움 때문입니다. 아침에 사랑하는 아내를 집에 두고 출근할 때조차(어차피 몇 시간 뒤면 다시 보는 데도) 다소의 슬픔이 밀려옵니다. 갓 친해진 친구들을 고향에 두고 잠시 타지에 연수를 떠날 때도 아쉬워서 눈물이 맺히는 게 아이들의 마음입니다. 

하물며 세상이 멸망의 위기에 처했고 내가 각별한 사명을 띤 채 모처로 떠나야 한다면, 이 안타까운 감정은 무엇과도 비길 수 없이 강렬하게 당사자(아직 너무도 어린 소녀 페트라. 이 소설의 1인칭 주인공)에게 닥쳐 옵니다. 내러티브는 차분하고 명랑하기까지 하지만 그 뒤에 숨은 마음은 우리 독자에게 절절히 전해지죠. 그 작은 두 어깨가 얼마나 묵직하게 짓눌려 왔겠습니까. 

페트라의 이름 어원은 p104에 나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기독교 사도 베드로와 같습니다. 여기서 주인공 페트라는 다소 자신 없고 떨어지는 자긍심이 서린 태도로 답을 합니다. 그러나 엄마는 이런 순간에도 페트라를 격려하며 그 이름에 담긴 아름다움에 대해 다시금 강조, 환기합니다. 고전 라틴어 직계인 스페인어의 아름다운 향연이 펼쳐지는 이 작품에서 이름부터가 "금발"이란 뜻인 루비오도 역주를 통해 p114에 그 뜻이 독자에게 소개됩니다.  

"엔 코그니토의 다운로드 가능한 지식은 장기와 뇌가 즉각 잠들게 합니다.(p48)" 아빠, 엄마, 벤, 하비에르... 모두가 어린 페트라의 긴 여정을 응원하며 또한 다정하게 힘을 불어넣어 주려 애씁니다. 세상이 얼마나 발전했으면 이처럼 기계적 프로세스를 거쳐 간단하게 지식의 마이그레이션이 가능해졌겠습니까. 그러나 사람의 영혼에다 그 모든 벅찬 감정, 아름다운 추억, 밀려오는 행복감, 촉촉한 슬픔 등을 함께 불어넣는 건 오로지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전달자의 정말로 특별한 능력과 포근한 공감을 통해서만 말이죠. "이게 바로 그거야. 넌 이걸 과학으로만 보지 않을 거야(p87)." 따뜻한 아빠의 말입니다. 이 말이 그대로 실현되리라는 걸 우리 독자들 모두 알고 있기도 하고요. 

"산소가 폐로 쏟아져 들어왔다(p96)." "나는 바이저를 벗었다. 따뜻하고 습한 공기가 콧구멍으로 훅 밀려왔다(p195)." 맞습니다. 그토록 잘 통제된 위생적 환경에서 아무리 잘 관리를 받았다고 해도 자연의 순일한 자양이 끼치는 선한 영향만큼 달콤한 건 또 없습니다. p93의 페트리코와도 비교해 보십시오. 이 역시 페트라에 지소사(diminutive)가 붙어 만들어진 단어죠. 

"다음에 올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위험을 모두 제거하는 게 좋다. 설령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 온다고 해도(p304). " 이게 인간입니다. 내 당대의 쾌락과 이익만을 위해 자원과 환경을 소진, 낭비하자는 마음가짐이라면 나와 내 이웃, 내 후손까지를 모두 망치는 원흉입니다. 콜렉티브, 콜렉티브... 단합, 동지애. "콜렉티브를 위하여(p223, p334 등)" 콜렉티브를 통해 나는 나보다 더 큰 나로 발전하고 합일합니다. 

이 작품에는 신기하게도 한국인의 정서와 통하는 상징, 배경, 사건들이 많이 등장하며 심지어 p77에는 벤이 페트라에게 전수하려는 지식 중에 "한국어"도 있습니다. "책은 우리의 언어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집이 되었고, 삶이 되었습니다.(p335)" 꼭 마르틴 하이데거의 비슷한 말이 아니라도 이 말은 여전히 큰 울림으로 다가오며, 사실 이야기야말로 우리네 존재의 본체입니다. 너무나 벅차게도.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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