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어느 스토킹 살인이 큰 문제가 되었는데 이런 사건에서 성별 위치가 바뀔 수도 있긴 합니다. 남자 주인공은 소설가이며 여주는 잡지사 기자입니다. 이 둘은 오래 전 연인이었고 결혼식 직전까지 갔었으나 어떤 여인의 현장 난입으로 인해 엉망이 됩니다. 신랑이 처가 쪽으로부터 오해를 받고 이 결혼은 없던 일이 되어 버리는데 여튼 주인공은 시간이 흐른 후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새 반려자를 맞습니다. 

독자인 제 눈에는 이 부인이 훨씬 사려 깊고 책임감 있는 어른으로 보였으며, 반면 여주인공은 가뜩이나 어려운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드는 이상한 경향마저 있어 보입니다. 사실 저는 이 여성의 내러티브로 전달되는 "난장판이 된 결혼식장"이 과연 벌어졌던 일이었는지조차 살짝 의심이 들었습니다. 소설가를 혼자서 너무 좋아한 나머지 정신 착란을 일으켜, 없던 일을 실제인 양 망상에 빠진... 

물론 그렇다고 보기엔 주인공 소설가가 여인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진지합니다. 미친 스토커한테 저렇게까지 대해 줄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리 주인공이 점잖은 인격자라고 해도 말입니다. 두 남녀가 젊었던 어느 과거의 한 시점에 저 소동이 벌어졌던 건 사실입니다. 

여주인공은 알고 보니 2대에 걸쳐 애정 문제를 겪고 있었습니다. 그 모친 역시 남편(즉 여주인공의 부친)과 이혼한 상태인데 전남편은 이미 재혼하여 새 가정이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러려니 하는데, 문제는 이미 완전히 감정적으로 전처와 절연한 상태인 남편과 달리, 이 노부인은 최근 들어 전남편에 대한 집착이 불 같이 살아났다는 점입니다. 남편 의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약속을 잡아 혼자 기다리다가 귀가합니다. 일종의 정신 착란입니다. 

그리고 앞서 말한 대로 여주인공은 남주 소설가에 대해 스토커처럼 집착하는 중입니다. 소설가의 회식 자리 근처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자작(自酌)하는가 하면, 소설가 부부가 간만에 함께 휴식을 즐기러 온 별장에 먼저 나타나 몸을 숨기고 엿보기도 합니다. 낌새를 챈 소설가가 아내에게 딴청을 피우며 급히 몸을 피하자고 재촉하는 모습까지 다 훔쳐본 후, 여주인공은 혼자 남아 크게 웃음을 터뜨립니다. 자학, 자조의 뜻입니다. 

모눈종이 위에서 점은 가로세로선의 교차점 위에 놓여야 하며 중간점이란 인정되지 않습니다. 한 남성은 한 여성과만 맺어져야 하며, 제3자가 혼인에 끼어든다거나 혼외에서 물끄러미 지켜보는 일 따윈 사회가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작가가 지적하고자 한 "모눈종이 위의 생" 그 모순인데, 그러나 우리들 상당수는 모눈종이 위의 규격화, 정형화한 삶과 소통, 교류가 차라리 훨씬 편할 수 있습니다. 24기 37주차에 조선작 작가의 <미끼와 고삐>를 리뷰하며 지금 이 작을 제목만 잠시 언급했더랬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