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는 죄가 없다 - 우리가 오해한 신화 속 여성들을 다시 만나는 순간
나탈리 헤인즈 지음, 이현숙 옮김 / 매일경제신문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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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에는 많은 여성들이 등장하며, 그들은 "결코 착하지만은 않았고" 아마도 그래서 의도적으로 "바보로 만들어졌는지" 모릅니다. 이는 저자 나탈리 헤인즈의 말이며 사실 우리 독자들이 생각해 봐도 여성들은 남성에 비해 지나치게 희화화되고, 매도되고, 단죄된 감이 있습니다. 반면 남성인 신과 영웅들은 훨씬 난폭하고,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도덕적으로 비난 받아 마땅한 때에조차 찬양과 기림의 대상이 되곤 했습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왜 죄 없는 여성들이 대신 오명을 뒤집어썼으며, 그 죄목이 어떻게 조작되었는지 거침 없는 필치로 써내려가는데 내용이 타당할 뿐 아니라 재미있기까지 합니다. 


소포클레스의 작품은 현재 일곱 편이 남아 있으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오이디푸스 왕>이라고 합니다(p47). 우리말로 저렇게 옮기면 별 느낌이 없는데, 인문 고전 지식에 능통한 저자는 도대체 왜 이 작품의 이름이 <오이디푸스 렉스>라는 라틴어로 두루 통하는지에부터 의문을 제기합니다. 당연히 소포클레스는 그리스인이었으니 원전대로 <오이디푸스 티라노스>라 불려야 마땅하다면서 말입니다. 저자는 이 작품에서 원래 마땅히 주목받아야 할 인물은 이오카스테 왕비였으며, "대체 (그녀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p70)"라는 의문까지 제기합니다. 비단 소포클레스뿐 아니라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에서도 그러하며, 저자는 다시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와 에우리피데스의 안티고네가 어디가 다르고 어디가 같은지에 대해서까지 논급합니다. 이어 그녀는 왜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에서 여인들이 더 적극적인 행동과 독자적인 목소리를 갖게 되는지로 결론부를 채웁니다. 이 과정에서 프로이트식 분석틀과 그 분석틀 자체에 대한 비판이 끼어드는 건 물론입니다. 공교롭게도 라틴어 "렉스"와 그리스어 "티라노스"는 모두, 어린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어느 쥐라기 공룡의 이름을 구성하는 성분입니다. 한국에서는 그저 티라노사우루스라고만 부를 때가 많으므로 약간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으나 미국에서는 거의 언제나 저 공룡의 이름 뒤에 "렉스"를 붙이며 이것이 마이클 크라이튼의 소설 <쥬라기 공원>에서 말장난의 소재가 되기도 했습니다(한국어판에서 정영목 번역가가 친절히 설명). 


헬레네는 정말로 큰 논란의 중심에 선 인물입니다. 그녀에게는 아름답다는 사실 자체가 죄였으며, 그랬기에 아무 잘못도 없는 파리스를 타락시키고 마침내 전 지중해 세계에 전쟁을 불렀다는, 일종의 전범으로까지 매도되었습니다. 사실 이보다 더 부당한 비판도 없습니다. 냉정히 서사를 우리 독자들이 살펴 봐도, 평화가 전쟁으로 바뀌기까지 헬레네의 잘못은 없으며 오히려 객으로 받은 환대를 정면 배신하고 남의 아내를 납치해 간 파리스가 부당한 짓을 저질렀음이 명백합니다. 파리스는 심지어 제 조국의 앞날과 부모 형제에 대한 책임마저도 저버런, 비겁자이자 매국노에 가깝습니다. 저자는 이를 분석하며, 흥미롭게도 이성들 간에 쟁탈이 되는 대상으로 그리스 신화의 헬레네와 맞먹는 캐릭터가 히브리 설화의 요셉이라고 합니다. 요셉은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 왔으나 남다른 미남자였으며 그에 눈독 들인 여성들의 과오로 인해 파장 큰 불화를 빚은 장본인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아르메니아의 민담에 등장하는 미남왕 아라도 언급됩니다. 왜 뒤의 두 남성은, 헬레네에 비해 덜 비난받고, 차라리 영웅으로까지 칭송될까요? 서사 중에서 맡은 역할은 거의 같은데도 말입니다 이런 부분이 이 저자만의 독창적이고 대담한 시선, 평가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요셉과 헬레네를 연결시키다니! 흥미롭게도 이 논의는 스타트렉의 엘란(이 캐릭터는 원작 드라마에서도 명백하게, 그리스의 헬레네를 염두에 둔 피조물이긴 합니다), 실존인물인 메리 스튜어트(스코틀랜드 여왕), 그리고 애거사 크리스티가 재해석한 헬렌에까지 이어지네요. 


페르세우스에게 목이 잘린 메두사도 재평가의 연단에 오릅니다. 사실 메두사는 처음부터 아무 잘못이 없었으며, 이기적인 페르세우스의 영광을 높이기 위해 부당하게 희생양이 되었죠. 여기서도 저자는 히브리인들이 만든 여성 영웅 유딧이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도나텔로의 그 유명한 그림을 예시합니다, 그러고 보면 전혀 아닐 것 같아도 히브리인들은 의외로 여성들에 대해 온당하고 대등한 비중을 부여했으며, 그리스인들이야말로 일방적인 남성 편향을 내비친 성차별주의자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성별만 반대일 뿐 정확히 대칭적인 역할이 각각의 캐릭터들에게 부여되었을까요? 저자는 "참수"를 "거세"의 행위와 연결시키는 독창성을 또 뽐냅니다.


아마존은 현대 영화 <원더우면>에서 묘사되듯(p173) 그리스 신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긍정적이고 전투적이며 주체적인 역할이 부여된 종족입니다. 물론 그 이름은 "무엇인가의 결핍(무엇인지는 생략하겠습니다)"을 뜻하는 다소 비하의 의미가 있지만 말입니다. 여기서 저자는 히폴리테, 또 트로이 헥토르의 부인 안드로마케, 그리고 버피 더 뱀파이어 슬레이어의 그 묘한 주인공에까지 또 상상력의 나래를 펼칩니다. 이런 주제적이고 싸움 잘하며 남성에 완력으로도 밀리지 않는 똘똘한 여성들은 그 편향적인 그리스 신화에서조차 완전히 말살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뒤의 두 영화에서처럼 현대에 들어 흥미롭고 매력적인 여전사 캐릭터의 창조에 결정적인 영감을 제공했다는 게 저자의 결론인 듯합니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아마 가장 논쟁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여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부재시에 별 양심의 가책 없이 부정을 저질렀고, 전장에서 십 년만에 귀환한 남편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누구의 어떤 기준으로 바라보아도 악녀 악처가 맞을 듯하나(p208), 저자는 차근차근 왜 그녀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 짚습니다. 일단 남편인 아가멤논 왕은 출정 전 딸 이피게네이아를 별 갈등 없이 제물로 바치려고 했으며, 귀향길에는 크리세이스를 전리품으로 데려와 아내의 분노를 극에 달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버지의 자격도 없던 자가 이제는 남편으로서 최소한의 품위와 의무도 저버리다니! 저자는 아이스킬로스의 희곡이 그나마 클리타임네스트라의 행동과 판단에 정당성을 (공정하게도) 부여한다고 결론 맺으며 사실 이는 많은 고전인문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거의 갈리지 않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에우리디케는 신화 원전에서 남편 오르페우스와의 비극적 사랑으로 유명합니다. 영화 <흑인 오르페>에서도 이 설정은 거의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가 캉캉으로 잘 아는, 오펜바흐의 유명한 작품 <지옥의 오르페우스>에서도 에우리디케의 비중은 적지 않은데 바로 저 캉캉이 그녀가 추는 춤(p239)이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20세기 시인 힐다 둘리틀을 인용하며 그녀의 서늘한 분노와 의기양양함이 어떻게 멋지게 구현되었는지 설득력 있게 들려 줍니다. 사실 이는 에우리디케의 분노이자 동시에 저 시인의 격앙이기도 합니다. 


악녀 하면 또 파이드라가 빠질 수 없습니다. 요절한 미남배우 앤서니 퍼킨스 주연의 영화로도 유명한 <페드라>에서도 그녀는 현대인에게 일종의 악몽으로 다시 현현합니다. 하필이면 의붓아들을 정부로 골라서는 남편과 아들을 동시에 파멸의 길로 몰다니 말입니다. 그러나 아프로디테, 즉 잔인한 미와 애욕의 여신에 의해 그녀 역시 운명의 장난감으로 선택되었을 뿐이며, 그 와중에도 그녀는 자신이 지키려 들었던 모든 이들에 대해 장엄하고도 가차없는 방법으로 보호하려는 의도였을 뿐이었다고 저자는 변호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모든악행에 대해 이런 변론이 가능한 건 아니며 또 그럴 필요나 동정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메데이아 하면 독극물 사용의 대가이며 사실 악녀 중에서는 이 캐릭터야말로 이해의 여지가 있는 편에 속합니다. 우리는 그녀가, 이기적이기 짝이 없는 이아손에게 어떻게 버림받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녀의 분노는 그녀보다 한 수 아래 남자(p303)인 크레온 왕을 향합니다. 아무리 그가 오만해도 여인은 그 단순한 남자의 동기를 훤히 꿰고 있습니다. 이 모든 해석의 영감을 제공한 고대 극작가 에우리피데스의 탁월한 필치에 저자는 찬양과 존경을 아끼지 않습니다. 여인의 한과 분노는 그 끝을 모르며 테세우스니 아이게우스니 하는 모든 남성 권력자들은 그녀의 치밀하고 영리한 복수의 손길에 속수무책입니다. 현실에서 패자나 을의 위치에 놓일 뿐인 여성들에게 메데이아는 영원한 대변인이자 챔피언입니다. 악녀는 알고 보면 대체 불가의 존재 이유가 있었습니다. 


책의 마지막은 페넬로페가 장식합니다. 현모양처의 아이콘이자 남성에겐 어떤 궁극의 안식, 위안을 제공하는 여상상인데 어느 부당한 차별주의자에 의해서도 결코 폄훼되지 않는 미덕의 상징입니다. 사실 신화는 이런 불가침의 요새를 여성들에게 마련함으로써 최후의 승자를 남성 아닌 여성으로 예비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저자는, 가뜩이나 여성 중심으로 이뤄진 <오딧세이아>가 이 거대한 어머니, 아내를 통해 마무리됨을 지적하며 결국 그 모든 모험과 승리와 영광이 오직 여성에게 예비되었을 뿐이라고 회심의 미소를 어리석은 남성들을 향해 날리고 있습니다. 그 모든 논의는 고전(어)에 대한 치밀하고 깊이 있는 지식을 통해 이뤄지니, 서양 고전 지식(헬라어, 라틴어)이라는 게 학자나 작가에게 저쪽 동네에서 얼마나 중요한 자질이요 무기인지도 다시 확인이 가능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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