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성 1 고양이 시리즈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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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ESRAE를 장착하고(전작 <문명> 참조) 엄청 똑똑해졌지만 다소 주제파악이 안 되고 여전히 심한 자아도취에 빠진 바스테트가 그 가족, 무리를 이끌고 북미 대륙으로 건너왔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도 큰 난리가 벌어져서 사회가 파괴되었고 그 틈을 타 천재적인 머리를 지닌(어떻게 해서 이렇게 머리가 좋아졌는지는 1권에서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알 카포네"라는 쥐, 쥐들의 왕(p338)이 이끄는 엄청난 적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결국 승리는 하지만 안타깝게도 바스테트의 OO인 OOO를 비롯하여 그녀의 많은 동료들이 죽게 되는데요. 작가 베르베르가 소설 초장에 이처럼 큰 희생을 빚게 할 줄은 미처 몰랐기에 상당히 우울한 기분으로 독서를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2021년 전작인 <문명>을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고양이라고 하면 하찮은 쥐 정도는 바로 압살해 버릴 수 있을 것 같아도 이처럼 쥐떼들이 많이 덤벼들면, 머릿수에는 당할 장사가 없겠다는 걸 베르베르 특유의 생생한 묘사를 통해 실감했습니다. <문명>에서도 그랬지만 벌어지는 사건 묘사가 꽤 잔인합니다. 쥐들은 처절하게 물어뜯고, 또 인간이나 고양이들한테 처절하게 학살당합니다. 전작 <문명> 1권 p46 같은 곳을 보면 쥐들이 이처럼 엄청난 수량으로 밀고들어오는 걸 사람의 인해전술에 빗대어 "서(鼠)해전술"이라고 하는 대목이 있는데 이 책 p35에도 다시 나옵니다. p62에는 "항(抗)서(鼠)연합군"이란 말도 나오는데 쥐들에 대항하여 인간과 고양이가 연합한 걸 가리킵니다. 쥐들은 정말 집요하며 p132에는 킹콩(영화에서의)도 못 무너뜨린 빌딩을 쥐들이 무너뜨렸다는 말이 나옵니다. p152에는 아기돼지와 늑대의 우화가 언급되며 튼튼한 건물의 미덕에 대해 찬양하는 대목이 있어 재미있었습니다. p252에는 왜 911 당시에 무역센터가 붕괴되었는지 베르베르 특유의 쉬운 설명이 나옵니다. 무엇이든 쉽게 설명하는 사람이죠. 


세상이 이렇게 한번 망하고 나니 쥐들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는데 p31을 보면 stupete gentes!라는 라틴어 구절이 인용됩니다. 여기서 gentes는, 부족이라는 gens의 복수형인데, 호격(呼格)으로 쓰였습니다. 그러니 여러 부족들이여! 정도의 뜻이겠는데 사실 이 구절이 괜히 인용된 게 아니라서, 인간과 고양이가 연합하는 장면도 그렇고 1권 후반부에 나오는 102개 부족(p260 같은 곳에 나오는)을 다분히 미리 염두에 둔 것 아닐까 짐작합니다. 서로 처지가 다르고 생각, 취향, 신념, 생김새, 간혹 언어까지 모두가 다른 부족들. 이게 생지옥이 된 세상에서는 서로 양보를 하고 지혜를 짜내어 공존공영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말이겠습니다. 


p109에는 왜 미국이 지금 이꼴이 되었는지에 대해 간략한 설명이 나오는데, 대대적인 문화 전쟁이 결국 정치 투쟁으로 번져서라고 합니다. 아닌게아니라 미국은 지금 국론이 분열되어 바람 잘 날이 없으며, 다만 우스운 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조국 프랑스 역시 현재 정계와 국민이 좌우 양극단으로 분열하여 도통 국론을 모을 짬이 안 나는 형편이라는 점입니다. p141에는 각종 사람 종족이 모여 사는 타워가 미국 축소판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2015년 제레미 아이언스 주연 영화 <하이-라이즈>라든가, 2012 <저지 드레드>에도 낮은 층수에는 하층민들이 살고, 높은 층수에는 부유층이 산다는 설정이 있습니다. 


1권 후반부에는 은근히 힐러리 클린턴을 풍자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일단 이런 소설에 실명으로 등장한다는 자체가 웃깁니다. p177에서는 가공의 캐릭터 그랜트 장군이 처음 등장하는데 19세기 중반 남북전쟁의 영웅을 어느 정도 염두에 두었겠습니다. 의장 힐러리의 질문에 "여기는 쿠바가 아니라 미군 기지"라고 장군이 대답하는데 현재도 쿠바 본토 관타나모에 미군 기지가 있습니다. 


바스테트 엄마의 가르침(?) 중에는 p52에 나오는 "적이 누구인지 이해하고 싶으면 적의 뇌를 먹어보라"가 있는데 아주 징그럽지만 저 뒤 p335에는 맨해튼의 쥐 장군 폴(Paul)이 "아버지를 넘어서기 위해" 그 뇌를 먹는 장면이 또 나옵니다. 2001년작 영화 <한니발>에서 닥터 렉터가 크렌들러 씨의 뇌를 요리해 먹던 그 씬도 생각이 났습니다. 


전작에서도 그랬지만 바스테트는 그의 어머니로부터 참 많은 가르침을 얻었고, 지금도 머리 안에서 수시로 호출하는 엄마와 대화하며 지혜를 얻습니다. 이 1권에서 자주 나오는 말이, 위험하고 가망 없어 보이는 순간 무한한 용기를 내어 상황을 극복....하는 게 아니라 이길 수 있는 싸움만 하라(p32)는 가르침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길 수 있는 싸움만 하라는 이 비겁한 가르침은 p135에도 다시 나오는데 이때는 아들과의 대화 속에서입니다. 안젤로는 엄마한테 무척 의존하며(p184에 바스테트의 말로 "이 녀석은 엄마가 모든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줄 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끓는 피를 참지 못해 저 뚱보 쥐(폴)에게 복수를 하게 해 달라고 조르는가 하면(p305) 적한테 그렇게 쉽게 속으면 어쩌냐고 엄마를 책망하기도 합니다. 


안젤로가 이런 성향을 보이는 데에는 엄마 책임도 큽니다. 사실 바스테트는 매우 자기 중심적이며, 자신의 판단이나 예측이 100% 맞는 게 아닌 줄 알면서도 과거 여왕 노릇하던 때를 못 잊고 전지전능한 척 굽니다. p353에서 그녀는 "가면 증후군"을 언급하는데, 아닌 줄 뻔히 알면서도 사람들이 자신을 그리 알아 주는 대로 행동하려고 애쓰는 오류를 스스로도 인식합니다. 우리 독자가 다 눈치챈 대로, 알고보면 고양이 바스테트를 누가 그리 존중하지도 않습니다. 존중은커녕 1권 후반부에 나오는 대로 인간들은 그녀에게 신세를 지고서도 여전히 그녀를 무시하고 얕잡아봅니다. 이런 인간들도 우습지만, 아무도 안 알아 주는 가면을 쓰고 가면의 정체성을 자신의 것으로 끈덕지게 착각하는 바스테트가 더 우습습니다. 책 저 앞 p65에 "우리 각자의 신화"를 인용한 작가의 의도가 무엇일지도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바스테트는 부풀려진 에고만 문제가 아니라, 지도자로서 민주적으로 무리를 이끌 생각은 않고 "효율만을 추구(p239)하는 고양이라며 독선적인 본성을 숨기지도 않습니다. 고양이니까 이걸 귀엽게 봐 주고들 넘어가지만 실제 지도자가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큰 문제입니다. 저 앞 p172에서도 "독재를 좋아한다"고 대놓고 말합니다. 민주주의는 이 1권에서 "진화한 인간들의 제도"라고 규정되는데 p150에 북미 원주민들의 제도로 "파우와우"라는 게 언급되고, p172에서도 보다 자세히 설명됩니다. p194에는 "춤이 전희와 같을까?"라며 날카롭게 인간 행태를 꿰뚫어보며 p245에선 "수컷은 나에게 성적 쾌락을 제공하는 도구일 뿐"이라며 무책임한 남성들이나 하는 소리를 늘어놓습니다. 여튼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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