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야, 혹은 시대의 마지막 밤 이문열 중단편전집 6
이문열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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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 좋은 날"의 제목을 단 작품이라면 누구에게나 현진건의 그 단편이 대뜸 떠오르겠습니다. "설렁탕을 사 왔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라는 유명한 대사라든가 반어적으로 붙은 제목, 주인공의 처지와는 너무도 대비되는 관대하고 젊고 부유한 그 학생 손님 같은 캐릭터 등등.


처음 독자들에게 선보였을 때 이문열은 삼국연의의 평역이라든가 어떤 정치적 논란 같은 걸로 유명했던 게 아니라(당연하죠), 모파상이라든가 O 헨리 같은 고전 단편의 성공 비결(?)을 정확히 추출하여 한국적 소재에 응용한 그 영리한 자질이 크게 어필했던 게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초창기에 참 많은 단편을 만들어 낸 그였는데 어떤 교과서적인 구조의 아름다움 같은 게 지금 읽어 봐도 돋보입니다. 그런가 하면 "익명의 섬" 같은 단편은 플롯의 완성도를 충분히 갖췄으면서도 다른 나라의 모범적인 작품 같은 데서 좀처럼 볼 수 없는 개성도 두루 지닌, 이문열 세계의 깊이와 폭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예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는 이문열의 단편 아홉 작품이 실렸는데 그 중 하나가 "운수 좋은 날"입니다. 물론 일제강점기에 창작된 현진건의 그 단편을 패러디한 것입니다. 과거의 인력거꾼이라면 현재는 (몸이 비교적 덜 힘들겠으나) 택시기사가 그에 상응하는 직업입니다. 사실 과거의 인력거꾼이나 현재의 택시기사나 그날 운수에 수입의 과다를 맡겨야 하는 처량한 면이 다분하긴 하겠습니다. 운수(運數)에 운수(運輸)의 원활이 달린 셈이니 단어 생김새에 기묘한 우연의 일치가 끼어든 셈이기도 하며... 


여튼 이 소설에서도 주인공은 평균의 법칙이 부과하는 가혹한 섭리 앞에 당일 운수를 모두 반납하기라도 하듯 처참한 최후를 맞습니다. 운명의 신은 반 세기 전과 달리 남편의 몫을 그 아내에 대신 부과하는 무성의함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많이 선해지고 또 진화한 모습입니다. 뭐가 되었든 간에, 평생 주어진 복(福)의 총량이 그것뿐인데 개인의 힘으로 더 이상 어떻게 저항하겠습니까. 슬프다거나 화가 난다거나 하는 감정이 유발되기보다는, 소재를 이지적이고 정밀하게 처리하는 작가의 솜씨에 대해 감탄하게 됩니다. 


이 단편은 1987년 KBS에서 단막극으로 만들어 방영한 적 있는데 주인공 택시기사 역에 배우 김성환씨가 나옵니다. 최근까지 자기 이름을 걸고 연말에 진행하는 디너쇼 티켓을 완판시킬 수 있는 몇 안 되는 중노년의 아이돌 스타이며 젊은 시절 모습도 유쾌하고 잘생겼습니다. 여기서는 전업 택시기사가 아니라, 운전을 주업으로 하되 일종의 고액 보수 대신맨이랄까 핸디맨입니다. 하지만 저런 일감이 레귤러하게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경제사정은 어려운 편이며 착한 아내도 곁에 있습니다. 이 드라마에서 그가 맡는 일감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콜뛰기"입니다. 접대부 외에 사장님도 함께 수송(ㅋ)하는 게 차이라면 차이입니다. 차량은 시대상을 반영하여(?) 그랜저로 설정되었는데 저무렵 그랜저면 지금의 K9하고 맞먹겠습니다. 


드라마에서 진정 시청자를 사로잡는 건 김성환씨의 연기라기보다, 에로영화 <고금소총>의 주연이었던 배우 최기선씨의 압도적인 미모입니다(사실 이 독후감에서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이 바로 이것). 여기서 그녀는 설악산 근방 관광지에서 주인공과 우연히 만난 부잣집 딸로 나오는데 현실의 권태와 부조리에 질려 죽음을 꿈꾸는 미대생으로 나옵니다. 이건 현진건의 원작이나 이문열의 패러디에는 전혀 없는, 각색자 이홍구씨만의 창의의 산물입니다. 이 아가씨야말로 현생의 모든 불운을 한몸에 안고 태어난 인력거꾼이나 그의 아내와 대척상에 선 캐릭터이며 사실 여기서의 택시기사는 제 나름대로 인생을 즐기며 사는 사람이기에 아가씨가 그의 안티테제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1987년 시세로 3천만원이면 정말 큰돈인데 이런 거액을 아무렇지도 않게 거리에 투척할 수도 있는 이 젊은 여성이야말로 인력거꾼의 모든 면을 반대로 투사한 행운의 총아이겠습니다. 이런 캐릭터를 작품 안에 넣어 주인공의 모든 욕망과 열등감과 좌절감의 소실점으로 삼은 이홍구씨의 솜씨야말로 천재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미래의 비전이나 희망은 사실상 포기하고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주인공, 그와는 대조적으로 돈이 썩어나지만 현생의 권태 때문에 차라리 눈을 감고 피안으로 뛰어넘고 싶었던 미모의 여성 두 행보가 극단의 대조를 이룹니다. 이문열 작품과는 달리 주인공은 죽지 않고(애초에 죽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지만), 대신 사치스럽기 그지없는 자살을 택한 여성 앞에서 주인공은 아마 자신의 생이 통째 부정당하는 모멸감이 들 만 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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