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명가 : 재계편 - 한국 경제의 개척자들 한국의 명가 4
김덕형 지음 / 21세기북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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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보국(事業報國)"이란, 기업을 일으켜[興業] 나라에 보답한다는 뜻입니다. 국가로부터 받은 혜택에 보답하는 방법은 여럿이 있겠으며 어떤 이는 육신의 땀을 흘려 노동으로 갚고, 어떤 이는 지혜를, 어떤 이는 손기술을 써서 사회와 공동체에 효용을 제공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큰 기업을 일으켜 대중들에게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보다 싼 값에 공급하고, 더불어 수백 수천 명의 청장년에게 일거리를 제공하여 생계 수단을 마련하고, 국고를 거액의 세금으로 충만케 하는 것만큼 나라에 기여하는 일이 또 없을 듯합니다. 과거에는 높은 학덕으로 조정 공론을 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능란한 문장으로 외환을 미연에 방지하는 게 애국이었다면 현재는 미국 대통령에게 투자해 줘서 고맙단 소리를 듣기까지 하는 사업상의 공헌만큼 국격을 높이는 애국이 또 없을 듯합니다. 


책 처음에는 "활O수로 독립운동한 민씨 가문과 윤씨 가문" 이야기가 나옵니다. 공교롭게도 민씨, 윤씨 모두 한국 전통의 명가로 꼽히는 성씨이긴 하나 두 분의 가계가 구체적으로 어떠한지까지는 책에 소상히 밝히질 않습니다. 여튼 일제 강점기를 통해 여러 애국 사업가들이 독립 운동을 통해 산업, 군사 양면으로 애국을 해 왔음은 잘 아는 사실이나 동화약품 창업주 민씨 가문이 이처럼이나 광범위하게 만주 일대의 독립운동을 후원해 왔음은 개인적으로 처음 접했습니다. 이런 가문이야말로 조선, 아니 한국 국민 모두에게 존경 추앙받아 마땅한 명가이겠습니다. 사실 체했을 때 활O수만큼 잘 듣는 약도, 개발된지 백 년이 훨씬 넘었지만 여전히 드문 것 같습니다. 


이어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으로 꼽히는 박승직가문 이야기가 나옵니다. 7년 전에도 <박승직 상점>이라는 책을 읽고 리뷰한 적 있는데 이 가문의 입신출세 사연은 읽어도 읽어도 감동적입니다. 다만 두산이 현재 고전하고 있으며 부디 본연의 업무에 집중하여 많은 주주들을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3년 전 두중 두인코의 부진 혹은 롤러코스터타기 때문에 고생한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잠깐 큰 시세가 나기도 했었으며 이때 청산한 사람들은 큰 수익을 보았겠으나). 멍청한 인간은 언제나, 팔아야 할 때 사고 사야 할 때 팔기 마련이죠. 맞는 말을 안 듣고 고작 지멋대로 하는 데에서 쾌감을 느낍니다. 


한국의 명가 하면 인촌 김성수의 가문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인촌의 죽마고우가 고하 송진우이며 그 직계후손(손자)이 ICC 재판관을 역임한 송상현 서울대 교수님이죠. 인촌의 직계후손이 고 이건희 회장의 둘째 사위이기도 하고 인촌 하면 동아일보인데 중앙일보 창업자를 장인으로 둔 이건희 회장이 딸을 동아일보 후계자한테 시집보낸 건 당시에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습니다만 뭐 가문의 내밀한 사정이 다 있었겠습니다. 인촌은 그 친일 행각이 논란에 오르기도 했으나 그가 일제 강점기 전중반에 민족 문화의 창달을 위해 노력한 공을 감안하면 이는 다소 억울한 면이 있겠다고 저 개인적으로는 생각합니다. 책 저 뒤 p140 이하에 부방 창업자 묵민 이원갑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분이 중앙고보 시절 인촌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고 하며 부방도 인촌의 경방을 모델로 삼고 경영했다는 이야기가 재미있게 나옵니다. 


p60 이하에는 효주 허만정의 업적이 나옵니다. 구씨와 허씨의 대를 이은 협업은 유명하며 1960년대 럭키와 금성의 유명한 동행이 1990년대에 각자의 이니셜(L과 G)을 딴 대기업이 출범(그전부터 럭키금성은 한 그룹 단위였습니다만)하여 한때 재계 서열 2, 3위를 넘봤습니다. 경상남도 진주와 의령은 인접한 고장인데 전자에서 LG그룹, 후자에서 삼성그룹의 개조(이병철씨 이야기는 p122 이하에 있습니다)가 나온 사실은 지금 새겨봐도 놀라울 뿐입니다. p82 이하에 파트너였던 구인회 창업주 이야기도 따라 나옵니다. LG와 GS(그리고 LS)를 알려면 이 두 파트는 적어도 꼭 읽어 봐야 하겠습니다. 


코오롱그룹의 오운 이원만 창업주의 이야기도 감동적이고 흥미롭습니다. 그룹 이름만 봐도 코리아와 나일론이 새겨져있지만 1950년대 당시 빈곤선 이하에서 허덕이던 한국인들에게 먹고 "입는" 문제의 해결은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였습니다. 코오롱 그룹은 선경그룹(현 SK)과 업종도 겹치고 사세도 비슷했으나 현재는 차이가 많이 나며, 코오롱그룹도 이를 의식한 듯 여러 차례 과감한 혁신, 투자를 시도했으나 그때마다 악재가 겹쳐 뜻대로 잘 안 되는 현황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룹 고문을 지낸 나공묵씨가 쓴 p81의 "상지상 정신"에 관한 글은 두고두고 읽어 볼 가치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작은 인연이 있는 벽산그룹 김인득 창업주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벽산그룹은 현재 사세가 많이 위축되었으나 여전히 뚜렷한 활동 중이며 이 파트를 읽어 보면 대한민국 초창기 한국 대기업들이 주로 어느 업종을 수익원으로 삼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삼성도 시세를 잘 읽고 업종을 영리하게 전환하여 메인 캐시카우로 삼았기에 망정이지 1960년대처럼 식음료에만 집착했다면 지금 CJ만큼의 규모도 안 되었을 것입니다. 대상(구 미원)은 그나마 지금 헬스케어 쪽으로 매진하여 새로운 비전을 전개 중이죠. 


p122에 보면 삼성전무 조홍제씨 이름이 나오는데 책에도 언급되듯 이분은 나중에 효성그룹을 창업했습니다. 재벌 2, 3세 들은 대개 학벌도 휘황찬란한데 효성이라든가 이 책 p244의 한화그룹, p270의 SK 등이 특히 가문 구성원들 학력 좋기로 유명합니다(안 그런 곳도 있고, 아주 안 그런 곳도 있습니다). 훌륭한 가문은 이처럼 모든 면에서 대중의 모범이 되어야 하고 이른바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것도 올바른 지적 각성과 사색의 결과가 되어야만 (얄팍한 대중추수나 선동이 아니라) 그 성과가 생산적이고 진정성을 갖추게 됩니다. 저자분이 현역 기자로 치밀하고 정확한 취재를 통해 저술한 책이라서 더욱 돋보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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