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91155493205


서영은 작가는 故 김동리 선생과의 인연으로도 유명하며 1983년 <먼 그대>로 이상문학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풍부한 서사 속에 시대상의 이런저런 면모를 생생하게 담은 작풍이라서 다 읽고 나면 뭔가 머리까지 꽉 차는 느낌입니다. 


주인공은 벽지에서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는 초등학교 교사입니다. 요즘 같으면 여교사가 최고의 직업으로 높이 평가 받습니다만 1980년대에는 근무지가 저렇게 벽지이면 박봉의 조건까지 겹쳐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나 봅니다. 아니면 그저 주관적으로 불만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여튼 그녀는 자신에게 더 밝고 풍요로운 미래가 열려야 마땅하다고 믿고 미인대회 출전을 결심하여 교사직을 그만둡니다. 


진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름난 미용실 원장님도 그녀를 적극 격려하는 등 객관적으로 보아도 그녀는 그런 꿈을 꿀 만한 자격이 되는 듯합니다. 원장은 이런저런 준비를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는데, 집안 형편도 어려울 뿐 아니라 가족들은 그녀가 펼치려는 꿈에 대해 무관심을 넘어 거의 반대 수준입니다. 현재 그녀를 답답하게 하는 건 이런 가족들의 몰이해가 더 큰 비중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를 마치고 명문대 졸업장으로 대기업에 취직한(동료 교사의 말에 따르면 용모도 좋다고 합니다) 오빠 역시도 주인공을 전혀 이해해 주질 않습니다. 나이도 젊고 배울 만큼 배웠으며 세상도 널리 체험한 편인데 여동생이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다음 단계로 도약하려는 그 마음을 거의 멸시하는 수준입니다. 오빠가 좋은 신랑감을 소개해 준대서 만났더니 평범한 공장 직원인데다 귀도 잘 들리지 않는 걸 알고 주인공은 더욱 절망합니다. 인성이 나무랄 데 없이 좋다는 게 오빠가 댄 이유인데 대기업에 다니는 신분이니 훨씬 좋은 조건의 신랑감도 물색할 수 있었겠건만 말입니다. 


이 사람은 귀가 안 들린다거나 가난한 게 문제가 아니라, 아내 될 상대의 감정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자신의 주제도 모르고) 착각에만 빠져 있는 게 근본적인 문제 같습니다. 어리석을 뿐 아니라 이기적이기까지 한데, 우리 주변에는 안타깝게도 이런 유형의 인간들이 무척 많습니다. 넘볼 상대를 넘봐야죠. 


여튼 이모저모로 숨이 막힐 것 같았던 주인공은 단호히 결별을 선언하고 원장님의 주선(음모?)에 따라 중년 재일교포 사업가를 만나는데 나이도 많을 뿐 아니라 이미 한 번 결혼을 했다고까지 합니다. 그래도 자신에게는 경제적 안정이 우선 필요하다고 믿은 주인공은 결혼을 감행하려 드는데 상견례 자리에서 주인공의 부모는 어린 딸이 웬 중년 사내를 데려온 걸 보고 기겁을 합니다. 


결국 일은 틀어지고 주인공은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려다 가랑이가 찢어질 수는 있지만, 다른 뱁새가 새로운 인생을 열게 옆에서 돕는 건 의미 있는 일"이라며 어떤 결심을 합니다. 여기서 독자는 주인공이 혹시 그 공장 직공을 다시보고 인생 구제해 주는 셈치며 결혼이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인공의 결심은 그런 자기파괴적인 게 아니라, 자신이 원래 근무하던 초등학교로 돌아가서 벽지의 아동들이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자신만의 꿈을 펴 나가게 조력하는 것이었으니 독자는 크게 안심하게 되네요. 좋아하지도 않는 데다 제 분수도 모르고 헛꿈을 꾸는 상대를 뭐하러 만나 평생의 연을 맺겠습니까. 게다가 이후 한국 사회에서는 교사의 처우가 크게 개선되기까지 하니 1980년대에 저런 결심을 한 주인공 여성은 아마 지금(2022)쯤 자신의 결정에 만족하며 풍요로운 노년을 보내고 있겠습니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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