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위험하다
마리아나 엔리케스 지음, 엄지영 옮김 / 오렌지디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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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서 담배를 피우는 건 물론 위험합니다만 세상에는 그보다 훨씬 더 위험한 것도 많은 줄 우리는 누구나 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집(단편집)을 다 읽고 난 후 제게 든 생각은, "이 세상이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위험한 곳이었구나"였습니다. 물론 이 작품들의 배경이 된 곳은 정확히 지구 반대편인 아르헨티나이며, 세상 천지에 한국보다 더 치안이 잘 갖춰진 나라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령 그것이 지구 반대편일망정 세상에 이런 곳이 지금 동시대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불안해지고 무서워졌다고나 할까요? 정녕 지구반대편의 일일 것만 같지만 공동체라는 곳이 이런 절망, 가난, 무질서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한순간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더욱 무섭기도 하고요.


4개월 전에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읽고 짧은 독후감을 남긴 적 있습니다. 그 책도 단편집이었는데 지금 이 책이 겉모습은 더 예쁘고... ㅎㅎ 음 더 작품 분위기에 잘 어울린다고 할까요? 역자 후기가 없는 대신 저자 후기가 있어서 좋았습니다. 


책 뒤표지에는 "공포 소설집"으로 이 책의 성격을 규정하는 말이 있으며 실제로 어느 독자라 해도 책장을 넘겨가며 으스스한 느낌이 들 것입니다. 실제로 몇 작품은 구태여 역사, 지리적 배경, 혹은 사회성 짙은 메시지를 고려할 필요 없이 호러물로 읽어도 충분합니다. 정말로 호러물인 줄만 알고 이 책을 고른 독자들은, 그 몇 작품만 읽어도 원 목적을 충분히 달성할 것 같습니다(찐으로 무서우니 말입니다). 그러나 작가의 진짜 의도를 파악하고 싶다면, 이 책만큼은 작가 후기를 좀 읽어 봐야 할 듯합니다. 개인적으로 역자 후기, 작가 서문 등은 작품을 다 읽은 후에야 들춰 보는 게 원칙입니다. 문학은 아무 선입견 없이 순수 내 감상만으로 읽어야 한다는 주의라서인데, 이 작품집은 자주 뒤로 옮아가서 저자의 해설을 좀 듣고 싶었습니다. 


작가 후기에는 이 책을 두고 "내가 처음 쓴 공포 소설이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분명 무서움을 주려는 의도는 충분했던 것 같습니다. "이 단편에서 사람들에게 '닥치는' 것은 악마가 아니라 가난이다(p342)." 한국 구전 설화나 전래 문학에서 가난은 물론 지긋지긋한 존재지만 그리 무섭게 다가오기만 하지는 않고, 때로 엄청난 해학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적어도 이 작품집에서의 가난은, 설령 악마가 있다 한들 그 이상이겠나 싶습니다. 저는 "이 단편에서 사람들에게 닥치는 것은, 가난의 탈을 쓴 악마 그 자체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땅에서 파낸 앙헬리타>에서 처음에 이 할머니는 TV 드라마 <컴뱃!>을 즐겨본다는 말이 잠시 나오는데 음... 작품 전체와 어떤 특별한 맥락을 이루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작품은 역주에 설명이 잘 나오긴 하지만, 한국에서 아마 50대 중반 이상의 남성이라면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인기 드라마이기도 했습니다. 책에는 빅 모로라고 주연 배우 중 한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데 아마 빅 머로우라고 하면 알아듣는 이가 많을 것입니다. 여튼 할머니가 ㅎㅎ 저런 드라마를 좋아한다고 해서 눈길이 갔습니다. 처음에 저는 어떤 범죄가 개입한 사연인가 짐작했는데 그런 것 같지는 않고요, 어려서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아동의 한 맺힌 사연(뒤의 저자 후기를 꼭 참고하세요)에 포인트가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라면 우리 나라에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더 친근하게 다가왔습니다.  


<호숫가의 성모상>은 마치 루스 렌들이나 로알드 달의 스릴러에서 볼 법한 소름끼치는 서사가 돋보이죠. 이 역시 저자 후기에서 의도가 뭔지 상세히 가르쳐 줍니다. "상처 받은 소녀들은 위험에 놓이기 쉽고 그 자체로 위험해지기도 한다" 사실 이 이야기가 저는 가장 무서웠는데, 스포가 될 수 있어서 자세히 쓰진 않겠으나 성모상이 어느 우상의 여신상으로 바뀌는 과정, 또 그녀들의 좌절당한 구애, 성욕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빚는지가 포인트입니다. 아주 조심스럽기는 한데, 저는 일부, 극히 일부 여성들에게서 나타나는 이런 성향 때문에 마녀사냥의 초창기 단초가 제공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역사적으로 마녀 사냥이라 함은, 종교, 정치 권력의 어두운 결탁으로 사회적 약자인 여성을 잔혹하게 탄압하여 지배력을 제고하고자 한 사악한 시도였음은 물론이지만 말입니다). 가톨릭의 성모상이 얼마나 절묘하게 이단의 무속으로 변형되는지 다시 생각해도 기막힌 솜씨입니다. 


<쇼핑카트>는 어느 "비렁뱅이 노인네(p73)"가 마을에 와 함부로 배변을 하는 소동에서 이야기가 시작합니다. 저 뒤 <슬픔에 젖은 람블라 거리>에도 p109에, 속에 단단히 탈이 난 듯한 소녀가 거리에 배변을 하며 자칫 그 위로 넘어질 뻔한 모습이 비슷합니다. 아마 인간이 최소한의 품위도 잃은 채 비참한 모습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자주 쓰이는 듯합니다. 마을 전체에 닥친 공황 때문에 강도가 설치고 어느 누구도 자신의 안전과 재산을 보장 받을 수 없는 무법천지가 되는데, 사람들은 그저 "그 카트를 끌고 다니는 늙은 비렁뱅이!" 때문에 악운이 닥쳐 이렇게 되었다며 만만한 희생양을 찾습니다. 재앙 앞에 인간은 이성을 잃고 야만으로 치달으며, 마지막에 "엄마"마저도 자제력을 잃고 그 무지렁이 같은 마을 사람들을 따라 이지 빅팀을 탓하는 장면이 압권입니다. 


<슬픔...>은 말 그대로 지옥도입니다. 이곳은 사람이 살 곳이 못 되며, 어린이들조차도 살기 위해 매춘을 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재앙의 폭죽이 터집니다. 마약 중독자들은 나중에 치아가 망가지게 되는데 이 소설에도 p135에 그를 상상한 묘사가 등장합니다. "어떻게든 버텨 볼테니까 아무 걱정 할 것 없어(p135)." 마치 <운수 좋은 날>의 마지막 문장처럼 대단한 역설입니다. 아니, 이런 곳에서는 단 하루도 버틸 수 없습니다. 


"코라손"은 심장이라는 뜻의 스페인어이며 여성의 이름으로도 쓰입니다. <심장이여...>에서 화자 "나"는 <제인 에어>를 즐겨 읽는데 저자 후기에서 "어려서부터 앵글로색슨 문학을 읽고 자양분을 얻었다"고 밝히는 작가분의 분신 같기도 합니다. 결국 작품에 심취한 나머지 "심장 박동 성애자"가 된 것이죠. 


<카르네>에서는 또 위험한 소녀들이 나옵니다. 이 단어는 번역이 안 되고 그냥 원어대로 제시되는데 두 페이지를 넘기면 역주에 그 뜻이 따로 설명되며 의도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도 잘 아는 영어의 "카니발리즘"과 어원도 같으며 작품 주제도 그것입니다(...). 오르페우스 설화와 비슷한 마무리가 인상적입니다. 우리 나라에 야마시타 토모히사가 비밀리에 온 적 있는데 어떻게 알고 소녀팬들이 찾아가 난리가 벌어진 그 사건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돌아온 아이들>은 이 작품집에서 가장 길이가 깁니다. 실제로 군부 독재 시절 아이들이 이유 없이 실종되기도 했고 이른바 "더러운 전쟁"은 지금도 그 수습이 현재진행형입니다. 이 작품에서 진정 독자에게 공포를 자아내는 건 작가가 스스로 밝히듯 사람과 체제의 탐욕이 빚은 구조적 모순, 빈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와중에 성 모럴이 거의 짐승 수준으로 타락하는 과정(의 묘사)도 볼 만한데, 아마도 어떤 독자들은 이 책을 읽고 나서 포르노 영상도 무섭게 느껴질지 모르겠습니다(오히려 다행?).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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