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별 - 슈니츨러 명작 단편선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음, 이관우 옮김 / 작가와비평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프로이트나 그 제자 융의 세계는 난해하고도 기괴하면서 또 한편으로 (깊은 곳에) 철저한 논리와 맥락이 (숨어) 있습니다. 그들과 동시대를 살았으며 주제의식을 공유한 작가이고 또 그들처럼 의사였던 아버지를 둔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작품 세계도 그러하지 않을까, 처음에는 긴장하고 읽었으나 읽을수록 재미있고 약간 우울한 분위기의 작품들조차도 유쾌하게 읽혔습니다. 표지의 그로테스크함에 한 발 물러셨던 독자들에게라면 전혀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해 주고 싶습니다.


<어찌 이런 멜로디가>. 원어인 독일어 제목을 보면 "Welch eine Melodie"인데, 이 번역서에 수록된 모든 작품 서두에 이렇게 원어 제목이 병기되어 있습니다. 영어로 풀면 감탄문인 "What a melody"이죠. "어찌 이런 멜로디가!" 내용을 보면 어떤 전설인지, 혹은 우화인지 모르게 펼쳐집니다. 예전에 괴테도 이른바 데몬이라는 것의 존재를 말하면서, 누구한테나 불시에 찾아오는 천재적 영감을 언급했습니다. 20세기의 수학자, 과학자였던 마틴 가드너 역시 "아이디어는 누구나 떠올릴 수 있다"고 하며 꼭 천재나 전문가의 산물이 아니라고 한 적 있죠. 여기서는 어느 소년에게 저 기막힌 멜로디가 떠올랐고 그걸 우연히 주워서 발표하여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된 작곡가가, 성공에도 불구하고 참된 자신의 작품과 재능이 아님을 한탄하고 (누군지 모를) 그 천재를 질투하여 마침내 자살에 이르렀다는 이야기입니다. 기막힌 악상, 멜로디 등은, 우리 시대에도 평범한 작곡가에게 한 번 정도는 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대개 그런 이들은 이른바 "원 히트 원더"로 끝나고 말지만 말입니다. 


<상속>. 우리는 "상속"이라고 하면 어떤 뜻하지 않은 거액의 상속만 떠올리기 쉽지만 때로는 영 달갑잖은, 상식을 벗어나는 어떤 불쾌한 체험이 "상속물"로 다가올 수도 있는 법입니다. 사람이 죽는 건 정말로 한순간에도 벌어지며, 여기서는 놀랍게도 오랜 동안 달콤한 불륜의 순간을 공유하던 정부(情婦)가 죽고 그 법적 남편이 찾아와 시비를 가리자며 결투를 청하는 내용입니다. 결투는 작가 슈니츨러의 시대로부터 최소 이백 년 전에 없어진(비엔나 아니라 어느 도시에서도) 풍습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한창 나이의 젊은 여성이 갑자기 죽듯, 총알 한 방이나 사브르의 깊은 상처 한 획에도 연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육신은 그 생명을 잃기 일쑤이고...


이 책의 표제작인 <어떤 이별>도 불륜 이야기입니다. <상속>과 비슷하게 여기서 알베르트와 안나는 갑작스런 이별을 맞이하는데 그 원인은 안나의 뇌(腦) 티푸스로 인한 죽음입니다. 다른 점은, 알베르트는 끝내 자신이 고인에게 누구였는지 밝힐 수가 없고 그 남편이나 주변 사람들도 다 사정을 모른 채 일단은 고인의 죽음에 대한 애도에만 몰입한다는 거죠. 의사는 환자에게 버젓이 남편이 있었음을 아니 알베르트를 "오빠"로 착각하고... 알베르트는 지금 애인이 갑자기 죽었다는 사실에 슬퍼 미치기 직전인데 그걸 누구한테 표현을 못하고 속으로 삭이는 과정이 포인트입니다. 이런 건 작가가 실제로 겪어 봐야 이런 절절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Die Toten schweigen." 원어로 보니 "죽은 자(들)은 말이 없다"네요. 여튼 여기서는 대표 복수의 용법이므로 뭐가 되었든 차이가 없습니다. 이게 소설 제목, 게다가 슈니츨러의 단편 제목인 줄 몰랐던 사람도 마치 한국어 격언이라도 되듯 "죽은 자는 말이 없다"라는 문구 자체는 어디서 들어 보았을 것입니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 중에서는 분량이 28페이지나 되니 꽤 긴 편입니다. "이봐, 오늘 프라터에서 마차를 타고 산책하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전혀 관심 없어.(p80)" 20세기 아니라 19세기라고 해도 비엔나의 청춘, 혹은 유한 귀족들은 타인에게 전혀 관심 안 두고 자신들만의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21세기의 서울이라고 해도 큰 차이는 없습니다. 


마치 <상속>에서처럼, 어떤 남녀, 여기서는 프란츠와 엠마라는 이름을 가진 이들이, 법적 배우자 모르게 바람을 피우고 그날도 밀회를 즐깁니다. 공개리에 행하는 마차 산책이지만 아무도 신경 쓰는 이가 없으므로 "밀회"의 일종이죠. 뜻하지 않게, 험한 날씨 때문에 마차가 전복되고 프란츠만 죽은 채 마부와 엠마는 살아납니다. 마부는 자신에게 당국과 피해자가 과실을 추궁할까 두려워 잠적합니다. 이 사건 뒤에 숨은 어떤 사연이 밝혀지면 엠마의 안정된 생은 그날로 끝장입니다. 독자들은 혹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작품에서처럼 남자가 여성을 살해하고 더러운 야심을 펼 첫걸음을 떼는 이야기일까 착각했을 수도 있겠으나 여기서는 정반대로 여자가 아닌 남자가 죽었죠. 


우리가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할 때는 대개, 죽은 자가 진상을 알고 있으나 이미 죽었으니, 우리만 입을 다물면 무슨 탈이 생기겠는가? 같은 컴컴한 속내를 드러내는 의도입니다. 이 소설에서도 처음에는 그런 의도로 엠마가 가위 눌려 잠꼬대에서 떠들었으나, 이는 그녀의 무의식일 뿐입니다. 남편인 교수가 그녀의 잠꼬대 이야기를 해 주자, 그녀는 자신 안에 그토록 이기적이고 타락한 것이 감춰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합니다. 엠마는 자신의 양심이 어떻게 하면 다시 편안해질지 알고 이내 빠른 결단을 내립니다. 여기서 "죽은 자는 말이 없다"란 뜻은, "죽은 자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으니 산 나라도 이야기해야겠다"라는 뜻으로 (즉 반대로) 들립니다. 사람 사는 세상은 이처럼, 최소한의 양심이 살아 있어야 최소한의 사회 작동이 가능합니다. 


<눈먼 제로니모와 형>. 이 이야기에서는.... 음, 형 카를로가 어렸을 때 장난을 치다 동생 제로니모의 시력을 잃게 만듭니다. 그 후로 성인이 된 카를로는 동생을 데리고 다니며 구걸을 하는데, 어느날 알 수 없는 어떤 사람이 갑자기 제로니모에게 다가와 "형한테 내가 금화 한 닢을 줬는데 혹시 형이 다 차지하지 않게 조심할 것"을 귀띔합니다. 물론 형은 기가 막힐 일인 게, 지금껏 동생을 성심껏 돌봐 온 그가 그런 일을 한 적이 없고 그런 큰 돈을 적선받은 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생은 이제 형을 계속 의심하게 되는데, 형은 의심을 그칠 줄 모르는 동생 제로니모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줄 요량으로 진짜 금화 한 닢을 훔치고 맙니다(!). 


그러나 동생은 의심을 거두기는커녕 지금까지 얼마나 자주 형이 자신을 속였을지를 생각하며 분노에 떠는데, 이때 경찰이 찾아와 절도 혐의로 두 형제를 체포하려 듭니다. 그제서야 동생은, 형이 큰 돈을 적선 받은 적이 없었으며 어떻게 해서 금화를 손에 지녔는지 모든 진상을 파악하게 되며 마음에 평안이 깃들고, 형은 다시 안식을 찾은 그런 동생을 보고 "더 바랄 게 없다"며 마음을 놓습니다. (그러나 이제 두 형제의 운명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결말은 과연 해피앤딩인지 아니면.... 참 독자의 마음을 어둡게 만드네요. 이런 불행한 운명이 닥치는 데에 어떤 잘못을 한 사람은 사실 없습니다. 구태여 따지자면 악마의 마음을 갖고 제로니모의 마음에 의심을 불어넣은 그 정체불명의 신사죠. 미국역사의 위대한 추장 제로니모와는 아무 관계가 없으며 애초에 선주민 이름이 아닌 별명이죠. 하필 그 제로니모도 말년에 형편이 어려워 엽서를 파는 등 구걸 비슷한 불쌍한 처지에 몰리기도 했습니다. 


맨마지막의 <어느 천재의 이야기>와 <삼중의 경고>는 서로 붙은 이야기라고 봐도 됩니다. 아마 <어느 천재...>를 읽지 않고 <삼중의...>를 읽으면 정확한 의미 파악이 힘들 것입니다. 참... 어찌 보면 우습고 슬픈 우화이며, 다른 한편으로 마치 동양의 <장자>에 나올 법한 신비한 분위기인데 이처럼 인과 연이 묘하게 엮여 나비효과(....)를 만든다는 사연은 확실히 서구적이라기보다는 동양적입니다. 그런데 마차를 모는 청년이 끝까지 그 정체불명의 섭리의 목소리에 굴하지 않고 "젠장! 애초에 왜 세상을 이따위로 만들어야 했죠?"라고 대드는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거참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이때로부터 대략 삼십 년 후에 로캉탱이 "구토"를 했는지도 모를...


이 책에 실린 모든 이야기는, 어떤 의식의 흐름처럼 알쏭달쏭하지 않고 명확한 서사가 흐르기에 "재미있습니다." 어렵지만 유익한 작품, 뭐 이런 분위기가 아니라는 걸 알려 드립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으로부터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된 서평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