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무쌍 황진
김동진 지음 / 교유서가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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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한국사의 여러 위기는 우리 후손들이 갚으려고 해도 결코 갚을 수도 없는 큰 은혜를 끼친 위대한 영웅들 덕분에 극복할 수 있었던 게 거의 전부입니다. "바다에는 이순신 육지에는 황진" 책에도 이런 말이 나오지만, 7년 전쟁 임진왜란은 해전에서의 기적뿐 아니라 육전에서의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전과 덕분에 결국 적을 격퇴하고 이길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은 제목이 저렇지만, 황진 장군에 대해 보다 더 포커스를 맞추었을 뿐 "소설로 보는 임진왜란"이라 해도 될 만큼 조선과 왜 사이의 16세기말 7년 전쟁 전반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있게 지어진 소설입니다.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역사적 근거를 실록, 징비록, 김학봉 문집 등 다양한 문헌에서 찾았기 때문에 독자는 소설이라는 느낌보다 역사서를 차라리 읽는다는 생각이며, 다만 소설처럼 술술 잘 읽힌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임진왜란은 물론 터무니없는, 도요토미라는 자의 제 주제를 모르는 탐욕 때문에 발발했지만, 왜의 힘은 생각보다 강하고 전략은 치밀했으며, 정말로 우리 민족이 큰일날뻔한 위기였다는 점 소설을 읽고 다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소설 중에도 나오지만 백 년 가까이 저들끼리 목숨 걸고 싸운 전국시대를 거쳤기에 "견고한 성을 짓고 공방전을 벌이길 밥 먹듯이 하였으며" 수백 년 동안 북방의 오랑캐와 남쪽의 도적들(물론 다 민간인들이죠)이 일으키는 변방의 난리만 수시로 격퇴했을 뿐 거의 태평성대를 누린 우리 민족이 처음에 얼마나 당황했을지 눈에 선하게 그러졌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제목과 주인공이 황진 장군인데도 임란 주요 국면 전반을 다 개관할 수 있는 소설인데 그 이유는 자칭 관백 히데요시를 보러 조선에서 파견된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의 사신 행렬에서부터 이미 황진 장군이 젊은 무관 신분으로 참여(수행)했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에서 황진 장군은 의외로 탄탄한 실력을 갖춘 채 한반도를 향한 야욕을 드러내던 왜의 실체를 보고 경악하고선 그들의 장점을 현지에서 최대한 파악하고 실전(미래에 일어날 게 거의 확실)에 대비하려던 자세를 보입니다. 실제로 군인으로서 전략적 두뇌도 뛰어났고 개인적 무용도 출중했던 분이었기에, 이분이 사신단을 수행했던 건 겨레의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수백 년 전부터 양다리를 걸치고 간교한 술책을 벌이던 쓰시마 무리의 행각, 그나마 전쟁을 회피하려 했자만 오만무례하고 비뚤어진 세계관을 가졌던 고니시(소 요시토시의 장인) 등의 모습이 잘 그려졌더군요. 또 소설 전반부에서 주목해야 할 건 부사(副使)였던 김성일의 태도와 인품입니다. 물론 그는 수길에 대한 평가절하를 통해 전쟁 대비에 차질을 빚었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사신으로서의 행차 내내 꼿꼿하고 당당한 태도를 보였고 본인뿐 아니라 당대 사대부 모두가 공유하던 철학을 현지에서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그나마 사신단의 체면을 지킨 면도 있었고 이 소설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황진은 젊은 무관으로서 때로는 그를 존경하고 때로는 부딪히는데 나라 사랑하는 마음은 다 같으나 그 실천론에서 차이를 보였던 점이 흥미롭습니다. 


정사 황윤길 역시 현실을 바로 파악하여 "예(禮)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한시라도 빨리 귀국하여 전쟁에 대비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현명한 면모를 보입니다. 독자로서 다만 건강을 좀 잘 간수하시지 같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긴 했습니다(건강은 상당한 경우 본인 관리 의지의 문제이니 말입니다). 이처럼 서인은 시대착오적 화이관에 찌든 무리들이기만 했던 게 아닙니다. 조선 후기 북학파 등도 다 서인 혹은 특히 노론에 속했던 인사들입니다. 오히려 학봉 김성일이 동인 소속이었고 이 소설에서도 그 특유의 분위기가 잘 묘사되죠. 


전쟁 발발 후 특히 5만 명의 근왕병이 모여 불과 2천명의 왜군에 패퇴한 용인 전투는 지금도 큰 수치로 꼽힙니다. 다만 당시 왜군이 보여 준 놀라운 전술과 무기 등을 감안하면, 그저 종래의 왜군 무리겠거니 하고 몰려온 근왕병이 얼마나 당황했을지 이해는 됩니다. 5만 명이 모였다는 자체가 일단 어디겠습니까. 전쟁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백 년 가까이 내전에만 몰두하여 살아남은 승자들하고 게임이 안 되는 게 당연하죠. 칠 년 동안 상대와 싸우며 적의 장점을 배워 끝내 그들을 몰아낸 점이 대단하며 마치 2차 대전 당시 초기에 궤멸적 피해를 입고도 끝내 상대 전술을 그대로 흡수하여 격퇴한 소련군의 업적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소설에는 권율 장군이 꽤 자주 나오는데 황진 장군이 이 노장, 본래는 그저 문관이었던 그를 잘 보좌한 역사적 사실 때문입니다. 권율 본인은 나이도 많고 전쟁 경험이 없었으나, 문관으로서 고루한 우월 의식만 내세우지 않고 황진 장군 같은 무(武)의 인재를 잘 알아보고 적시적소에 그를 기용했다는 자체가 벌써 불멸의 업적입니다. 그 외 그만의 탁월한 전과야 두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후손들이 다 잘 알고 기리는 바입니다. 


일본에는 오랜 동안 불교 문화가 정착했기에 승려 출신으로 무장이 된 이갸 많습니다. 무장까지는 아니었으나 왜군에 소속되어 많은 일을 한 현소(겐소)도 우리 나라에서 유명하고, 이 소설에는 무장으로 안코쿠지가 나오는데 승려 출신이라서인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는 지키는 면이 자주 묘사됩니다. 훌륭한 적에 대해 최소한의 리스펙트를 바치는 모습은 감동적입니다. 


2차 대전 당시 미군도 "곡예처럼 칼을 쓰는 사무라이"에 대한 공포가 만연했으며 이 때문에 도쿄 대공습이나 원폭 투하 등 다소 무리한 수를 두었던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 조상들은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그러나 목책을 쌓고 지형지물의 유리한 점을 잘 이용하는 등 전술의 디테일에 있어 기발한 아이디어를 짜 내어 이런 가공할 적의 무력에 대항하는 모습이 놀랍습니다(실제 역사이기도 하고요). 이런 점은, 섣불리 상대를 야잡아보고 쳐들어온 저들 왜적이 결코 예상 못했을 것입니다. 위에서 학봉 김성일도 "조총이 뭐가 무섭냐? 우리에게는 화포가 있다"고 했는데 이런 기개는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조총은 개인 화기이며 저렴한 비용으로 대량 생산이 가능했던 반면 화포는 그렇지 않습니다. 또 조총을 두고 명중률이 나쁘다며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는 화포도 마찬가지며 왜군이 이 단점을 알아 체계적으로 전술적 극복을 이미 이뤘다는 게 중요합니다. 


한 개인이 이렇게까지 할 수 있나 싶게 황진 장군은 웅치, 이치, 사평, 죽주 등 거의 모든 주요 theater에서 맹활약합니다. 책에는 "황진 장군의 임진왜란"이란 표현도 나옵니다. 과연 그의 전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충무공께서 노량에서 사거하신 것처럼 황 장군도 진주성 싸움에서 그 위대한 생애를 마감합니다. 우리는 종종 "진주성 싸움에서 우리가 혹 최종 승리를 거두었다면?" 같은 가정을 하는데 이게 사실이었다면 더 이른 시기에 덜 피해를 입고 간악한 왜의 무리를 축출했을 것입니다. 작가는 "진주성 싸움에서 만약 황진이 전사하지 않았더라면?"으로 질문을 확장합니다. 왜는 김시민 장군 같은 이들만을 이 힘들었던(저네들 입장에서) 싸움의 영웅으로 기억하지만 우리는 황진 장군의 놀라운 행적까지 후손으로서 기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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