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꾼 미로 온 가족이 함께 읽는 이야기 2
천세진 지음 / 교유서가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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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모든 것은 이야기를 갖고 있어." 그러니 모든 사물, 사람 등에 생명을 부여하는 건 이야기이며, 무엇이 살아 있는지 아닌지는 이야기로 확인이 가능하다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그것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 이상, 누가 감히 그것이 죽었다고 말할 수 없겠죠. 


마을마다 전문적으로(?) 이야기만 전해주거나 읽어내는 사람이 있고 이를 "이야기꾼"이라 부릅니다. 이야기꾼도 생업에 종사는 하지만 마을 사람들로부터 특별한 대접을 받는 듯하며, 일정 기간 동안 자신의 후계자를 양성하기도 합니다. 이야기꾼은 자신이 (스승이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으며 전달할 수 있습니다. 공력이 높으면 말 없는 사물이나 심지어 오래 전에 죽은 이들로부터도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외삼촌이 미로와 함께 갑자기 이 세상을 떠나 버렸기에, 또 아직 저쪽 편 세상에 대해 외삼촌 자신도(또 미로 역시) 모든 걸 알지 못하기에, 이어지는 사연은 말로 전하지 못하고 글로 전달됩니다. 하지만 외삼촌 역시 지금 우리 세상에 대해 꽤나 회의적이고 비관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므로, 그에 대한 반작용 때문인지 그가 전하는 진실은 말 그대로 정직한 진실입니다(혹은, 그렇게 믿고 싶네요). 


얼마 전 <북극에서 온 남자 울릭>을 읽었을 때, 북반구 추운 지방에 사는 원주민분들은 그 부모가 갑자기 죽거나 한 고아의 삶에 대해 그리 넉넉한 배려를 베풀지 않는다는 걸 알았습니다. 이게 사실 우리 세계의 냉혹한 현실이죠. 그런데 저기 미로가 사는 세상에서는, (아직 아빠가 살아계시긴 하지만) 미로가 흘린 눈물 때문에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고민도 하는 등 고아(아직은 아니지만)에 대해 조금은 더 배려가 이뤄지지 안않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강을 이뤄 흘러넘치는 눈물 때문에 입을 현실적 피해"가 걱정이 되어서라고 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저는 남의 슬픔에 대해 냉정하고 잔인하게 구는 편인 우리네 세상에서 고작 누구(그것도 어린애)의 눈물 정도로 집단 피해가 안 일어나는 건, 이게 둘이 어느 정도 상관관계가 있는 것 아닌가, 반대로 저쪽은 남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사회라서 그렇게 홍수가 나기도 하는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큰 상처를 받고 그 상처를 치유하려면, 세상을 널리 둘러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건 미로네 세상뿐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둘러보고, 또 스승인 이야기꾼에게 이야기를 전수 받고, 이 과정을 통해서 상처가 근본적으로 치유되는 건, 우리 역시 사정이 그럴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받아들여. 어차피 누구나 겪는 일이야."라고 위로하지만 우리나 미로나 그런 말로는 힐링이 안 됩니다. 


스승인 이야기꾼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p80에 처음 이름이 나오죠. "이름"이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이름이 없어도, 혹은 잘못되거나 우스운 이름이 붙어도 그리 신경 쓸 게 없다는 말도 나오는데 그래서인지 구루 할아버지는 마을에서 그저 이야기꾼으로만 불릴 뿐입니다. 


이 소설, 이야기를 읽으면서 독자로서 제가 인상 깊었던 건, 마을의 크기나 부유함 같은 것에 무관하게, 마을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빈곤하면 사람들이 이를 부끄럽게 여긴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런 걸로 봐서, 아마도 우리네 세상의 소설가, 시인, 혹은 널리 문화 컨텐츠 크리에이터에 이 이야기꾼이라는 분들이 해당하는 것 같고 또 그에 대한 비유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외삼촌과 1인칭 주인공인 "나" 등이 흥미롭게 생각했던 것처럼 저들은 이야기꾼 포함 문자를 쓰지 않는다는 게 꽤 특이합니다. 이야기뿐 아니라 다른 전승지식, 노하우 등을 문자로 적어 두면 정말 편할 텐데도 구태여 그리 하지 않는 건(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죠)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동화 "구연"이라든가 판사 앞에서 이뤄지는 법정의 생생한 직접 증언 등에 특별한 가치를 두는 건, 눈과 눈을 마주치며 말을 통해 이뤄지는 진술 속에 더 강한 진실이 담겨 있고, 단순 정보 이상의 더 인간적인 감정, 진실이 소통된다고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요. "저들"이 사는 우주의 이야기, 이야기꾼이 특별히 존중 받는 이유도 저는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저들은 의식적으로, 허위와 왜곡이 이뤄지기 쉬운 문자 체계 채용을 배척한 것이겠죠. 그렇지 않겠습니까? 


우리네 사는 세상에서 이야기가 중요한 다른 이유는, 우리들 하나하나가 마치 미로네 엄마처럼 언젠가는 유한한 생을 마치고 모두와 이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불로장생할 수만 있다면 표정과 더 간단한 말로 그때그때 소통하면 충분합니다. 남겨진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더 좋은 걸 남겨 주고 싶다면, 이야기는 더 진실해야 하며 그런 진실된 이야기들이 모이고 모여 세상은 더 풍요롭고 아름다운 곳으로 바뀌어갈 수 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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