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받을 권리 - 팬데믹 시대, 역사학자의 병상일기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강우성 옮김 / 엘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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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마땅히 자유의 나라이건만, 병과 두려움이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만든다. 자유롭다는 건 우리가 우리다워지는 것, 자신의 가치와 욕망을 좇아 세상을 누비는 것을 뜻한다.... 행복을 감지하지 못할 만큼 아프거나 이를 추구하지 못할 만큼 허약해지면, 자유란, 불가능하다(p27)."

 

"나는 정의와 평안과 안녕을 숭상했던 미국의 건국자들이 의료의 역사에서 그들이 겪었던 비참한 순간을 우리가 다시 살기 바랐을 거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p81)"

 

저자의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미국은 한번 병이라도 나면, 사고라도 당하면, 이의 치료에 천문학적인 비용이 듭니다. 몇 년 전 외국에서 어떤 사고를 당해 꼼짝도 할 수 없게 된 어느 청년의 가족이 청와대 국민청원에 사연을 올려 큰 화제가 된 적도 있습니다. 아무리 기회의 나라이고 노력 여하에 따라 상당한 재산을 모을 수 있다 해도, 어쩌다 병에라도 걸려 막대한 치료비를 지출하게 된다면, 그래서 좀처럼 회복(신체적이건 재정적이건 간에)을 못 하게 된다면, 그런 기회와 자유가 다 무슨 소용이겠냐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주장 아닐까요.

 

"우리(미국인들)의 연방정부와 상업 의료 시스템이 우리를 병들게 한다면, 그들은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p27)"

 

"이 질병은 유독 우리 미국의 것이다. 우리는 23개 유럽 국가의 시민들, 또 일본, 홍콩, 한국, 싱가포르, 이스라엘, 레바논 같은 아시아 사람들보다도 먼저 죽는다.... 내가(=저자가) 열 살이었던 1980년에 미국인들은 국부가 비슷한 다른 나라의 사람들보다 기대 수명이 1년은 짧았다. 내가 쉰 살이 된 지금, 그 격차는 4년으로 늘어났다(pp.24~25)"

 

"그 어떤 민주주의 국가도 미국처럼 이번 코로나 팬데믹에 잘못 대처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p25)"

 

어떻습니까? 저자가 열 살이었던 1980년이면 아직 마이클 잭슨이 세계적인 인기를 끌기 몇 년 전이긴 합니다만, 미국의 문화와 경제와 모범적인 민주 정치는 세계가 부러워하는 대상이었을 겁니다. 레이건 대통령은 기품 있는 태도와 묵직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세계를 매료했고, 글로벌 경제는 미국이라는 거대한 시장과 공장을 추동력으로 삼아 힘찬 엔진을 가동했습니다. 한국도 이른바 3저(低)의 호황을 맞아 번영과 행복을 가득 누리던 선진국 도약의 시기를 보냈습니다. "거리마다 푸른 꿈이 넘쳐 흐르는 ♬ 아름다운 서울을 사랑하리라~"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도널드 트럼프는 2020년 초까지만 해도 재선이 유력한 현직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슨 생각이었는지 마스크를 끼지 않고 다니다(내내 그런 건 아니었지만) 그 자신도 코비드19에 감염되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일국의 대통령이 조심성 없는 처신으로 전염병에 걸리냐는 거죠. 이후 그는 폭망의 길을 걷고 조지아나 아리조나 등 전통의 공화당 강세 주에서마저 상대에 패배하고 텍사스에서도 지기 직전까지 간 끝에 결국 직을 내 주고 말았습니다. 이는 개인의 패배가 아니라, 미 의료 시스템에 대한 미국인들의 준열한 심판의 결과로 해석할 여지도 있는 것입니다. 제 몸 하나도 지키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국민을 보호하겠습니까.

 

"폭군을 만족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환자의 수를 더 이상 집계하지 않는 게 되어 버렸다.(p121)" 

 

"폭군은 질병을 기회로 여겨 자신을 삶과 죽음의 합법적 중재자로 내세운다.(p134)"

 

참고로 저자는 한국에도 <가짜 민주주의가 온다> 같은 저서로 많은 독자를 확보한 분이며 저도 그 책을 읽고 2019. 10에 독후감( https://blog.naver.com/gloria045/221686791860 )을 남긴 적 있습니다. 


 

p73에는 "약 공장"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의료비가 너무 비싸서 빈곤층이 적당히 마약류나 처방을 받고 버티게 하는 곳을 말하는데 이런 약물 남용으로 이런 계층의 기대수명은 더욱 짧아지는 것입니다. 

 

"병감(病感)"이라는 단어(p9)를 들어 보신 적 있습니까? 그 뜻은 저자의 버전으로 p10에 설명됩니다. "malaise, malady는 프랑스어, 라틴어에서 유래한 단어들로, 영어에서는 수백 년 동안 쓰였다. 이 단어는 미 독립전쟁 시기에는 병과 폭정(暴政)을 아울러 가리켰다"고 합니다. 폭정은 물론 영국 식민 당국의 학정과 독재를 지시합니다. 저자가 이 말을 구태여 꺼내는 이유는 뭐겠습니까? 나쁜 정치, 일부의 이익만을 위해 유지되는 공적 시스템은 일반 대중과 국민에게 질병만큼이나 해롭고 사악하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저자는 2019년 12월 3일 독일 뮌헨의 강연 과정에서 맹장이 터집니다(p11). 맹장염은 조기에 처치하여 안정을 취하면 큰 문제가 없으나 그렇지 못할 경우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습니다. 간으로 염증이 퍼졌는데 이 점이 독일에서 간과되었나 봅니다. p63에 독일 의사들이 그의 말을 잘 못 알아 들어 적절한 치료가 안 이뤄졌다는 말이 나옵니다. "구멍 난 맹장을 안고(구멍 난 줄도 모르고)" 미국으로 돌아와서는 맹장 수술을 15일에 받았는데 여기서도 그는 2차 감염에 대한 주의나 항생제 처방을 못 받았습니다(p47). 

 

손발이 욱신거리고 마비 증세가 왔고 23일 플로리다에서 치료를 받고 퇴원하기는 했으나 결국 저자는 일주일 후 다시 응급실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이때는 거의 숨이 끊어질 뻔했다는 게 저자의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응급실에서 처음에 제대로 치료를 못 받았다고 합니다. 옆에는 노숙자 등이 서로 간호사를 부르며 도움을 요구했고 말이죠. 

 

"분노는 오롯이 나였다."
"나는 분노했다. 고로 존재했다."
"분노는 어떤 대상에 의해서도 훼손되지 않은 채 아름다울 정도로 순수했다."(pp.14~17)

 

당시에 저자가 얼마나 화가 났으면 책에서 저런 말을 다 하고 있겠습니까. 저건 명백한 의료 과실이죠. 의료비 부담 체계도 체계이지만 다른 나라도 아닌 미국에서 의사의 솜씨와 기술을 마냥 신뢰할 수만은 없다는 현실이 기가 막힙니다. 다른 이야기지만 한국 의사들도 정신 좀 차릴 필요가 있습니다. 수가가 낮으니 낮은 만큼만 실력 발휘하겠다는 식이면 곤란하죠. 일단 의사로서 할 일 다 하고 갖출 능력은 다 갖추고 그 다음에 국민을 설득하든지 해야 합니다.


 

"응급실의 그 누구도 내 전자기록을 확인하려는 생각이 없어 보였다.(p39)" 이러니 대체 무슨 올바른 치료가 되겠습니까. 참고로 이 책에서 저자의 분노는 여러 의사와 제도를 대상으로 삼습니다만 특히 뉴헤이븐 모 병원의 의료진에 대해 크게 실망한 듯 보입니다. 뉴헤이븐이란 이름을 가진 곳은 미국만 해도 무척 많으나 여기는 코네티컷 주의 뉴헤이븐(한국인들도 많이 아는)이며 석좌교수인 저자가 재직 중인 예일대 부속 잭슨 국제문제연구소가 여기 소재해서입니다. 아무튼 이런 곳의 병원이 이 정도일 것 같으면 다른 병원은 보나마나 아닐지요. 

 

저자는 나치와 홀로코스트의 역사 연구로 특히 유명한 분입니다. 저자는 2009년 즈음에 오스트리아 빈에 체류하며 그곳에서 아들을 보았는데(꽤 늦둥이인 셈이죠) 비용이 거의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산모와 아빠를 위한 프로그램도 많이 마련되어 있었고 그 혜택을 다 보았는데 나치 역사 연구를 할 때에는 독일어가 죽음의 언어였으나 "나이 지긋한 부인들이 아이가 예쁘다고 칭찬해 줄 때는 생명의 언어가 되었다(p97)"고 합니다. 반면 두번째 아이는 미국에서 출산했는데 엄청난 비용은 차라리 둘째 치고 필수 과정이 끝나면 분만병동에서 산모와 아기와 가족을 쫓아내기 바빴던 게 병원의 태도였다고 합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우리는 상업적 의료 시스템 하에 놓여 있다(p101)." 저자의 말입니다. 

 

저자는 이어 유럽 계몽주의 사상가들과 그들로부터 영향을 크게 받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을 거론합니다. 세상이 무지에 휩싸여 있었다면 오늘날 같은 발전은 없었을 것이며, 어떤 무엇이 분명히 문제라고 생각되면 합당한 근거를 찾아 누군가가 반드시 목청을 높여 문제를 제기해야만 한다, 이런 취지 아니겠습니까. "미국 대부분의 지역은 현재 뉴스의 불모지다(p145)." 이러니 올바른 여론이 형성되지 않고 엄청난 문제들이 분석되지 못하며 묻힙니다. "의료 검사와 마찬가지로 보도는 사실을 만들어내는 방도이다(p143)."


 

"환자가 된다는 것이 돈과 사회적 지위에 대한 걱정을 불러일으키지 않아야 한다.(p189)" 저자는 맹장염과 그 합병증, 후유증만을 겪은 게 아니라, 뉴헤이븐의 그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옆 병상에 누웠던(나중에 친구가 되었다고 합니다만) 중국인(고 직전에 중국에 다녀왔다고 하던)으로부터 아마도 코로나를 옮은 듯합니다. 호흡 곤란 증세가 나타났고 이에 대한 치료는 받았으며 병원에서 딱히 말은 하지 않으나 사진을 보니 폐, 그 중에서도 한쪽 폐가 더 손상되었음이 확인되었다고 하네요. 이 과정에서 홀로코스트 중 삶과 죽음의 기로에 놓였던 유대인들과 자신을 더욱 동일시하게 된 저자는 이익만을 최우선시하는 미국식 의료에 대해 분노를 토로하고 각성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 미국만의 문제는 아니겠지요.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으로부터 제공 받아 독자인 제 주관에 의해 작성된 서평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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