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대고 잇대어 일어서는 바람아 - 집콕족을 위한 대리만족 역사기행
박시윤 지음 / 디앤씨북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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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책입니다. 최고급 용지에 예쁜 천연색 사진들도 잔뜩 실려 있고, 문장은 예술입니다. 책은 총 4부로 나뉘었고 모두 절터 이야기입니다. 어떤 절은 이름이 있고, 절터인 것은 알겠는데 어떤 절인지 알 수 없고 그저 터만 남은 것도 있습니다. 한국에 불교가 전래된 게 근 1500년이 넘다 보니 이 땅에는 참으로 많은 절이 있고, 절이 스러진 곳이라면 그 터가 웅숭깊게 남았음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건봉사 곳곳엔 아직도 오래된 석재가 빼곡이 꽂혀 있다(p41)." 건봉사는 강원도 고성에 소재한다고 합니다. 한국에는 고성이란 이름을 가진 곳이 경상남도에 한 곳 더 있지만 쓰는 한자가 서로 다릅니다. 능파교 아래 물이 꽁꽁 얼었다는 말이 있는데, 강원도 산골의 춥고도 추운 겨울 날씨가 지면 너머로 고스란히 전해지는 문장이었습니다.

"한국전 이후, 고성땅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탑이라우(p60)." 수타사 터의 4층석탑이라는 설이 유력하나 어느 절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절에 머문 사람이 다름 아닌 공양왕이라는 전설도 남았으니 고성 땅의 높을 고(高)자가 새삼 의미를 더합니다. 옥좌를 빼앗기고 억울하게 죄인의 누명을 쓴 채 먼 땅으로 쫓긴 군주의 소회가 어떠했을까요? 또 불교 역시 그즈음 유학을 숭상하는 사대부들의 등쌀에 밀려나 차츰 제 자리를 잃었으니, 쇠락한 절터가 그 모신 객(客)의 운명과 궤를 같이하는 셈이네요.

p156에 나오는 삼척 부사 김효원은 선조 연간에 사림 동서 분당의 단초가 된 바로 그 인물들 중 한 분입니다. 이분이 남긴 <두타산일기>에 바로 거제사에 얽힌 사연이 등장한다고 합니다. 저자가 이 두타산에서 만난 이름모를 남성은 깊은 침묵을 지켰다고 합니다. 과연 동해 거제사의 흔적만 남은 절터를 찾은 그분은 무엇을 사색하느라 말을 아끼셨을지 궁금해집니다.

철불은 고려 시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그저 미려하고 섬세한 미(美)만 찾던 신라 시대의 풍조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고려 본색을 드러낸 당당함과 소박함을 품은 형태입니다. "철불좌상은 거기에 있었다(p174)." 마치 산이 거기 있기에 나는 오른다고 했던 힐러리 경의 명언을 떠오르게도 합니다.

울진 구산리 절터는 한때 강원도에 속했으나 지금은 행정구역상 경북에 편입되었습니다. 이곳에는 왕피천(p196)이 있는데, 말 그대로 왕이 피해서 왔다는 뜻입니다. 구체적으로는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 당시 개경에서 여기까지 피난을 왔다고 합니다. 말이 울진이고 피난이지 개경에서 울진이 얼마나 먼 거리입니까. 사람 수도 엄청 많은 중국 본토에서 한번 정치적 불안이 발생하면 인근에 어떤 규모로 피해가 미치는지 짐작이 가능한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세상에는 간단한 논리와 상식으로 도무지 설명이 안 되는 불가사의한 현상이 많습니다. p218을 보면 포항 법광사에 중수(重修)를 거치며 한 차례 사리장엄이 열렸는데, 무려 닷새 동안 사방을 환히 밝히는 서광이 그치지 않고 이어졌다고 합니다. 이 고을이 신광현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게 그때였다고 하는데, 과연 상서롭고 귀신이 힘을 끼친 듯한 빛깔과 기운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유독 신라에만 돌무지덧널무덤이 유행했으며 이것이 바로 무차별 도굴로부터 신라의 고분 고총을 보호한 비결이었습니다. p239에는 고선사 터에 대한 자세한 답사 기록이 나오는데 2018년 여름에 대대적으로 보수를 마치고 일반인들을 맞았다던 기억이 저도 납니다. 천년 도읍의 유구한 내력이 어디 가겠습니까.

불법(佛法)이 왕성하던 시절 이 강역의 백성 대부분은 불교 신자였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한때 구름이 일듯 성하게 일어났을(p319)" 운흥사(울산 소재)에 대해 "지금은 그저 풀이 빼곡히 들어찬 초흥사"가 되었을 뿐이라며 그 막막한 소회를 요약합니다. 어디 운흥사 한 군데뿐이겠습니까. 인간사 모든 곡절과 고비가 다 이와 같은 이치입니다.

개인적으로 올해 상반기에 만난 중 최고의 책으로 꼽고 싶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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