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란 무엇인가
테리 이글턴 지음, 이강선 옮김 / 문예출판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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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는 우리가 상실한 천국이요, 무례하게 쫓겨난 행복한 정원이요, 역사적 지평선 너머로 멀리 사라져 버린 유기적 사회다."(p23)

인류 문명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삼천 년 전이라고들 말합니다. 물론 이에는 논쟁의 여지가 있어서 흔히들 4대 문명으로 일컫는 것들 중 보다 멀리 거슬러올라가는 게 있다고도 하는 반면, 페르시아의 엘람 문명은 이보다도 더 오래되었다는 주장까지 있습니다. 여튼 "문명"이라는 게 때로 대단히 세속적, 물질적으로 타락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문화는 대단히 고고한 성격을 띠며 경우에 따라 문명과 정반대의 길까지 걷는다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p102에는 헤르더와 버크 간의 유명한 논쟁이 나옵니다. 책에도 나오지만 찰스 테일러의 경우 저 독일학자 헤르더의 업적을 매우 높이 평가하여 "언어와 그 의미에 대해 매우 다르게 생각하는 방식을 고안"했다는 요약을 내놓았었죠. 결국 이런 혁신적인 발상의 전환이 후대의 스위스 학자 드 소쉬르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대개 영국의 인문학자, 철학자들이 대륙의 학문적 경향에 대해 냉소적 태도를 취하지만, 저자 이글턴의 경우 마르크스의 지평 위에 서 있으므로 저 위에서처럼 헤르더에 대해 열렬한 찬동의 경향을 보이는 게 그리 어색하지도 않습니다. T S 엘리엇은 주로 작품으로 말하던 작가였지만 여기서 이글턴은 그가 남긴 저작과 (비교적 소수의) 평론을 통해 저 헤르더와 정반대의 지평을 향한(그의 시각에 따르자면) 엘리엇의 비전을 꼼꼼히 분석합니다. "정신보다는 내장과 신경 말단으로 책을 읽어야 한다(p118)." 특히 이 말이, 이글턴이 인용한 T S 엘리엇의 지향성을 압축하다시피한 표명인데, p120에 인용된 마르틴 하이데거의 말도 함께 읽어 보십시오.

이후 이글턴은 예이츠의 입장, 또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사회적) 무의식"을 끌어들인 논변까지 인용합니다. 사실 이 이슈에서 문화의 본질과 성격이 좀 지나치게 영국쪽 논자들의 입장만 원용된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만, 고드프리트 헤르더의 주장이 자세하게, 또 비교적 우호적으로 논의되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균형이 맞는다고 하겠습니다.

"컬처의 어원 중 하나인 라틴어 동사 colere는 차지하거나 거주하다는 뜻을 갖는다(p167)." 물론 이 점은 우리가 영단어 colony등을 통해 알고 있는 지식이기도 합니다. 바로 밑에서부터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트리컨티넨털리즘)으로 논의가 옮겨가며, 테리 이글턴 자신이 영국 주류사회로부터 영원한 이단아일 수밖에 없는 그 개인적 배경, 아일랜드계 가톨릭이라는 어떤 숙명의 코드가 다시 등장합니다. 시니어드 오코너가 교황(당시 요한 바오로 2세)의 사진을 찢은 것처럼, 저자 테리 이글턴에게도 교황이란 혹 현임자 프란체스코처럼 상대적 진보의 스탠스 성직자라 해도 미묘한 안티테제의 아이콘일 수밖에 없습니다.

테리 이글턴이라면 또한 "문화적 위계를 무너뜨리는 행위(p197)"에 대한 열렬한, 또 매혹적인 찬동의 논변자이겠습니다. 차별이란 "차이를 식별하려는 행위"인데, 이것이 차별을 정당화하는 논리이건 아니건 간에 이글턴적 논법 중에서는 깔끔하게 단죄가 이뤄지는 장점이 있습니다. 트럼프의 시대(지나갔지만)에 나온 가장 이글턴 적인, 재치있고 신랄하며 박식한 논의였으며, 다음 저작에는 이 시대의 가장 핫한 화두인 "증오, 혐오"와 문화의 관계에 대한 특유의 시원시원한 이야기를 들어봤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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