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과 대안의 사회 2 - 4차 산업혁명과 간헐적 팬데믹 시대 4차 산업혁명과 대안의 사회 2
이도흠 지음 / 특별한서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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챌린저호의 비극을 기억하는 이들이 아직 많습니다. 인류가 우주선을 쏘아 올리는 행사는 국적을 초월하여 설레는 마음으로 지켜 보게 마련인데, 세계인이 생중계로 지켜보는 가운데 비극적인 폭발이 일어나서 모두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사고의 원인은 천재 물리학자 파인만이 이후에 밝혀 내었고 이전에도 여러 기술자들이 지적한 바 있으나 무시되었습니다. 저자는 이 사고를 두고 정상사고의 전형으로 규정합니다. 이 개념은 찰스 페로가 처음 고안(p51)했으며, 아무리 완벽하게 통제되는 시스템이라 해도 반드시 이런 종류의 비극이 일어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점은 소설가 마이클 크라이튼도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쥬라기 공원>에서 쉽게 풀어 준 적 있습니다.

고도의 기술이 발전한 사회에서도 결국 치명적인 위험과 사고를 완벽히 피할 방법은 없다는 뜻이죠. 저자는 이어 디지털 세계에서의 아노미 상태, 빈부의 격차에 따른 디지털 디바이드 현상을 지적합니다. 기술 만능주의가 그 모든 모순과 불편, 부조리를 해결할 것만 같았지만 현실은 그와는 정반대로 오히려 새로운 재앙을 불러들이고 말았죠. 역시 이 대목에서도 저자는 "진실한 소통, 경계를 과감히 허무는 포용, 시민들 사이의 연대" 등을 해결 방안으로 제시합니다.

언어에는 실체가 없습니다(p102). "나무" 같은 어휘는 이른바 ㄱ 곡용어로 분류되는데, 15세기 우리 조상들은 나무 뒤에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가 오면 ㄱ을 덧붙여 발음하고 뒤의 모음은 축약했습니다. 현대의 우리들은 아무도 그렇게 발음하지 않으나 그렇다고 나무의 본질이 바뀐 건 아무것도 없으며 한국어의 기본 합의, 전제 등에 어떤 변화가 생기지도 않았습니다. 이를 두고 언어의 자의성이라 하죠. 여기서 저자는 빈프리트 뇌트를 인용하며 "재현은 세계를 재현하는 게 아니라 기호들 사이의 차이를 재현할 뿐이다."고 정리합니다.

그러나 언어의 의미는 결코 평가절하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불완전하나마 언어를 통해 현실을 묘사하고 전달하며 해석합니다. 언어는 대상과 분리되어 존재하며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기도 하는데(혹은, 우리가 그렇게 믿는데), 1권에서도 우리 독자들이 읽은 것처럼 저자는 비유와 상징, 환기의 기능을 무척 중요시합니다. 언어는 인간이 현실의 부조리와 무의미에 맞서 감연히 창조한 무기이며 인간 존엄을 구성하는 토대입니다. 저자는 자신이 만든 "화쟁기호학(p104)" 체계에 의해 이 점이 보다 말끔히 해명된다고 말합니다.

4차산업혁명의 핵심 키워드 중 하나가 공유경제입니다. 일각의 비판처럼, 공유경제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할까요? 저자는 이에 대해 간명한 문장으로 독자들의 의문을 풉니다. "진정한 자기를 실현하는 적극적 자유를 중시하는 대신, 사적인 개인의 소극적 자유를 억압한다."(p192) 저자는 이어 "의료 정보와 DNA 같은 유전적 정보까지 공유되는 마당에 사적인 영역이란 (더이상) 없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사적인 영역을 확보하지 못한 개인은 자유롭지 못할 뿐 아니라 주체성을 유지하기도 힘들다"는 말이 뒤에 이어집니다.

저자가 이런 공유경제의 본질을 분석하며 주로 원용하는 이론 체계는 제러미 리프킨의 것입니다. 저자는 또한 한국에서 우버가 큰 장애에 부딪힌 이유를 짧은 말 몇 마디로 요약도 합니다. 특히 p193의 이 문장에 주목해 보십시오. "플랫폼 기업이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플랫폼을 매개로 자투리의 가치를 모아 지대(rent)로 전환하고, 여기에 노동을 결합하여 잉여가치를 착취한다는 점에서는 반(反) 공유적이다."

저자, 나아가 리프킨이 구상한 "공유경제"와, 현재 야심찬 벤처사업가들이 밀어붙이는 공유경제는, 이런 관점에서라면 넘지 못 할 큰 강이 그 사이에 놓인 셈입니다. 사업가들이 꿈꾸는 바는 바로 p193의 저 문장, 즉 "플랫폼을 매개로 자투리의 가치를 모아 지대로 전환"하는 데 있을 텐데, 저자의 입장은 이야말로 "공유경제"의 정신에 정면으로 위배된다고 지적하니 말입니다. 또한 저자는 "노동을 결합하여"라는 구절을 의미심장하게 배치하셨는데, 바로 뒤에 나오는 "잉여가치"는 마르크스의 학설에 의하면 오로지 "노동"에 의해서만 얻어지니 말입니다. 물론 현재의 플랫폼이 "노동"의 결합을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게 분명하므로 이 구절은 현상에 대한 플레인한 설명으로도 타당한 말입니다. 만약 배달의 민족이니 구글 플레이니 앱스토어니 하는 여러 플랫폼더러, 저자의 관점에 입각하여 "공유경제의 참된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한다면 아마 이들은 사업을 포기할 것입니다.

아무래도 저자가 기존 자본주의의 낡은 틀을 타파하자고 주장할 때 가장 주된 초점은 "지식과 기술"인 듯합니다. 그 예로 저자는 자신이 대학생 때 하곤 했던 아르바이트 중 가장 수입이 좋았던 게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판매"였다고 회고합니다. 지식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공유될 때 가장 큰 효용을 발휘함에도 불구하고, 지난 시대에는 이러한 지식을 "물화(reification)"했다고 말합니다(p179).

로봇과 인간, 나아가 생체 일반의 결합을 통해 저자는 "바이옷"을 창조할 수 있다고 합니다(p237). 이는 "전혀 새로운, 살아 있는 기계(조슈아 봉가드 연구원의 표현)"이며, 아마도 우리 인간이 보다 친숙히 느끼고 소통하며 기계가 수행하거나 접근할 수 없는 영역에서 우리에게 큰 몫을 해 줄 듯합니다. 책에는 그런 말이 없으나 독자인 제가 상상하기로는 이를테면 장기의 배양, 대체, 제공 같은 게 가능하겠습니다. 장기나 외부 신체 일부에 문제가 생긴 사람에게 어떤 윤리적 논란을 일으키지 않고 충분한 만족을 베풀 수 있겠죠.

우리는 19세기 이래 인류가 이뤄낸 놀라운 과학기술상의 업적과 성취에 대해 스스로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애초에 우리가 더 깊이 생각해 할 바는 "자연의 치유력과 자생력"입니다. 우리 인간은 엄연히 자연의 법칙에 종속되고 그 앞에서 한없이 무력할 뿐인 필멸의 존재입니다. 이러한 자연, 우리를 낳아 준 어머니와도 같은 자연도 인간이 작정하고 더렵히며 망치려 들면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환경을 오염시켜도 결국 그로 인해 직접 피해를 받는 건 우리 인간들이며, 이로 인해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멸종한 후에야 자연은 다시 자생력을 발휘하여 본연의 모습을 찾을 것입니다. 수십 억 년에 달하는 그 기나긴 자연의 호흡은 우리 하루살이 같은 인간들의 상상력이 감히 미칠 수도 없습니다. 인간이 망치는 자연을 두고 저자는 "빈틈이 사라진(p268)" 상황으로 비판합니다. 여기서 "빈틈"이란 노자가 말한 "무위의 경지"입니다. 자연은 반드시 이 무위가 끼어들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고유의 섭리와 순환이 멈출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그 근본 속성이 약탈적인, 야만적이고 파괴적인 속성을 지닌 자본주의 체제는, 현대에 들어 국가와 자본 사이의 동맹을 더욱 강화(p280)합니다. "대중문화는 계급 간의 화해를 지향하고 노동자 곋급을 중산층으로 동일화하는 데 기여하면서 반역을 사전에 봉쇄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이른바 공산당의 일당 독재를 국가 존립 기본 원리로 삼는 중국 같은 나라에서 온갖 야비한 방식으로 이윤을 추구하며 하층민으로부터 잉여가치를 착취하며, 저급한 서구 대중문화에 대한 최악의 모방을 통해 왜곡된 애국심을 세뇌하는 행태 역시, 이러한 비판의 칼끝 가장 날선 곳 앞에 놓여야 마땅하겠습니다.

p344에서는 조르주 아감벤의 담론이 원용됩니다. sacre는 양면성을 지닌 단어인데, "신성한"과 "저주받은"이란 두 뜻을 다 가지죠(영어의 cleave라는 단어도 그렇습니다. 이런 걸 auto-antonym 혹은 contronym이라고 하죠). 그래서 과거 로마 가톨릭의 교황이 베푼(나중에는 세속 군주들도) sanction이란 조치는 특별 허가와 금지 둘 다를 의미합니다. 지금은 후자의 뜻만 남다시피했지만 말이죠. 호모 사케르라는 개념을 구태여 저자가 원용하는 건, 현대 국가의 놀랄 만한, 효율적인 감시 시스템이 "저주받은 자"를 만들어 그 체제에 순치하게 만들며 끝내 참된 자유를 송두리째 박탈할 무시무시한 힘을 지녀가는 추세를 지적하기 위함입니다. 스마트폰에 앱을 깔아 국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려 드는 중국 공산당의 행태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인간의 존엄에 대한 통찰은, 역설적이지만 인간이 반드시 죽음을 맞아야만 하는 유한한 존재임을 직시하는 지점에서 시작합니다. 여기서 저자는 월명사의 <제망매가>(p469)를 다시 인용합니다. 유한한 지혜 때문에 그저 지전을 서편으로 날리는 행위로 그 허망함을 초극하려 들었던 신라의 월명사와는 달리, 우리는 나노공학과 사이버네틱스, 가상현실 기술의 도움으로 거의 무엇이든 꿈꾸고 시도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죠. 그러나 공감과 소통와 연대의 노력이 결여된 채 배타적이고 약탈적인 자본의 꼭두각시 노릇에 스스로 만족한다면 이 모든 기회와 편의가 무의미해질 것입니다. 이 책에서 "자유"는 그래서 새로이 해석되고 음미되며 실천에 옮겨질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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