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과 대안의 사회 1 - 의미로 읽는 인류사와 인공지능 4차 산업혁명과 대안의 사회 1
이도흠 지음 / 특별한서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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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은 앞으로 모든 것을 바꿔 놓으리라고들 합니다. 사회의 일부 구조나 기능이 개선되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가치관, 신념, 사회에서 필요한 교육과 기술, 인지 능력, 사람과 사람이 교류, 소통하는 방식 등을 포함한 모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지난 1차, 2차, 3차의 혁명 때와는 달리, 이번의 변혁은 뭔가 기존의 생존 방식을 위협할 것 같다는 불안에 다소나마 시달립니다. 여태의 변혁이 우리의 생활에 물질적 편의를 가져오기만 한 결과와는 다르게 말입니다.

불안해한다고 불확실한 미래가 개척되지는 않습니다. 미래의 어떤 요소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면, 이를 적극적으로 대처, 연구하여 불안 요소를 제거해야 합니다. 나아가,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사회 구조 안에서 우리가 보다 진취적으로 행복을 추구하고 자아실현을 할 수 있게, 우리 스스로를 개조하고 거듭날 필요도 있습니다. 이처럼 미래에 대한 준비를 갖추려면, 위대한 스승으로부터 어떤 그랜드 비전을 배우고 우리의 내면, 마인드셋에 이를 장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자께서는 재미있는 비유를 듭니다. 어떤 여학생이 그동안 유지하던 긴 생머리를 자르고 느닷 파마로 변모했다면, 이는 "너를 친구에서 연인으로 전환하여 사귀고 싶다."는 기호적 언표라고 합니다(p31). 그러나 저 같으면 여성의 생머리가 훨씬 좋을 것 같은데... 여튼 저자는 다시, 진평왕 대에 활약한 승려 융천사의 예를 들며 그가 창작한 <혜성가>가 젊은이들의 애국심을 고취시켰다고 합니다. 이처럼, 젊은이들이 그 샘솟는 에너지를 건설적 국가관으로 승화하여 참신한 상징을 앞세운 행동에 나서지 않는 나라는 이미 부패하여 죽은 나라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변혁의 시대에는 젊은이들부터가 과감한 행동의 혁신에 나서야 합니다.

"과학기술지능과 결합하지 못할 때 은유와 환유는 주술적 사고를 낳는 동인으로 작용했다(p60)." 사실 주술과 미신도, 인간의 간절한 바람을 멀리 하늘에 전하려는 몸부림의 소산이었으며, 설령 천리(天理)라는 게 없다손 쳐도 이런 간구가 다시 인간세상에 전해져 정의와 도덕이 관철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은유와 환유는 부족한 대로 인류의 지혜와 소망을 후대에 전하는 도구가 되었죠.

2019년에 에이비 보가드 등의 연구자들은, 4000년 전에 유라시아에서 본격적으로 불평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저자는 인용합니다(p81). 사실 기후나 지질상의 재앙보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못 살게 구는 관계상의 폐단이나 모순, 구조상의 악덕이 훨씬 큰 재앙일 수 있습니다. 저자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경운기 등 농기구에 대한 사적 독점의 관념이 약했고, 대여를 청하면 주저없이 빌려 주는 풍조가 일반적이었다고 합니다. 농업 혁명은 생산력을 증가시킨 축복이 아니라 불평등 구조를 심화하고 굶주림, 전염병, 전쟁이라는 3대 재앙을 촉발했다고 합니다.(p85) 안타까운 일입니다. 인류의 발자취가 그저 진보와 풍요, 자각을 위한 위대한 전진이기만 한 게 아니었다는 씁쓸한 한 방증이기 때문이죠.

페스트는 중세 유럽 인구의 1/3을 희생시킨 엄청난 전염병이었는데, 저는 언제나 궁금했던 게 마땅한 소독약, 항생제도 없던 시절 어떻게 그 죽음의 행진이 멈출 수 있었냐는 점이었습니다. 소빙기로 접어들며 기온이 내려가고(페스트는 세균성 전염병이라서 추위에 약하죠), 내성이 생겼으며, 공중 보건 정책의 확대 실시에 기대어 질병의 창궐이 막을 내렸다고 책은 정리합니다(p108). 사회 구조는 이때로부터 급격히 변모하여 부르주아 중심의 공론의 장이 열리고 급기야 시민 혁명의 시대가 열리나, 자유를 찾고 사회를 주도하게 된 부르주아는 노동 대중, 무산자에 대한 억압자로 나섭니다. 이런 식으로 진화한 사회 구조는, 결국 모든 종류의 논의에 대해 오픈된 광장을 마련하고, 지적인 발전과 체계를 구축하여 다음 단계로의 도약을 예비합니다. 그래서 과학과 기술의 눈부신 성취가 가능해진 것입니다.

유전공학의 발달은 결국 종간 경계를 허물어 반인반수가 나타날 것이라고 저자는 전망합니다. 반인반수 이야기는 애도가와 란포의 소설이라든가 H G 웰즈의 <닥터 모로의 섬> 등에 나옵니다. 윤리적으로는 결코 허용되지 않는 발상이지만, 핵무기나 생화학 무기 등도 어떤 도덕적 근거를 갖고 출현한 것은 아닙니다. 과학의 도도한 발전은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종교는 더 이상 세상에 관해 결코 도전을 허용치 않는 주장들을 선포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p144)." "환원주의적 사고가 벽에 부딪혔을 때 전일적 사고를 해 보는 것도 좋지만 정확한 계산을... 하지 않았기에 이는 은유의 유추로 그치고 말았다(같은 페이지)." 이 대목은 의미심장합니다. 사실 겔만 같은 천재 과학자도 때로는 의미가 불명료한 동양 고전의 인용에 기대었는데, 이는 당사자의 지적 능력 과시는 될지언정 참된 과학적 지식의 정연한 체계 구축에는 오히려 혼란만 야기하는 바 있습니다. 과학은 결론이나 방향성 모색 단걔애서도 그 엄정한 방법론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노동은 대자적 자유를 실현하며 인간을 유적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행위이다(p169)." 그렇습니다. 오로지 모든 가치가 노동으로부터 유래한다는 사고는 다소 극단적일 수 있으나, 가치의 본질적 부분은 노동으로부터 비롯하는 게 맞으며, 사람은 자신의 육신으로 땀 흘려 빚어낸 결과를 보며 비로소 생의 희열과 존재 이유를 깨닫습니다.

수십 년 전만 해도 백과사전적 지식은 고가의 돈을 주고 구입한 호화장정 세트 안에만 담겨 있고, 이를 물색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른바 집단 지성의 힘으로, 몇 십 권 분량의 책을 훨씬 능가하는 지식을 인터넷상에 구축하고 이를 공유할 수 있습니다. 물론 검증이 끝나지 않은 정보의 남발로 혼란이 초래될 수 있으나, 이전 시대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의 활력과 정확성으로 인류는 소중한 지식을 공유하고 확장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를 통해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소유 질서가 발전적으로 해체될 것을 전망합니다(p188).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이자 미적 존재이고 초월적 존재이다(p230). 저자는 이 대목뿐 아니라 저 앞 융천사의 <혜성가>를 거론할 때도, 국가와 민족을 위한 우국충정에서 분연히 일어난 젊은이들의 의기를 예시했습니다. 필멸의 존재인 인간이 어떻게 초월적 존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윤봉길 의사는 홍구 공원에서 시라카와 등 침략의 수장들에게 도시락 폭탄을 던져 전세계에 대한 독립과 항일의 명분을 선포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에고에 머물면 티끌 같은 의의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반면 더 큰 자아에 눈을 뜨면 수억의 생령과 화합, 합일하여 일개인의 육신을 초극합니다.

저자는 p272 이하에서 칸트의 존재론 개념을 원용합니다. 인간은 근대를 맞이하며 이성과 자유의지의 중요성에 특히나 개안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해석, 판단, 지향성, 의지, 실천"으로 그 사고 과정을 채우는데(p273), 저자는 그 예로 경찰이 단지 피붓색만 보고 무고한 흑인을 범인으로 몰아 체포하거나 과잉진압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런 정신작용의 기제가 가능하지 않은 인간은 충동과 본능에만 지배되는 비루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은 그저 인간에게 물리적 편리만 제공하는 게 아닙니다. 억압적이고 종속적인 관계를 탈피하여, 대등하고 창의적인 소통과 연결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초월에의 한 걸음을 디디게 돕습니다. 이것이 슘페터가 의도한 혁신의 진정한 구현이며(p351), 초연결성을 통해 숙의 민주주의(p361), 의미의 해석이 가능한 AI의 출현(p365)을 통해 인간의 유한성이 극복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원대한 비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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