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는 어떻게 살아남았나 - 영국 보수당 300년, 몰락과 재기의 역사
강원택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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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보수다, 진보다 하는 건 본래 그런 개념이 명시적으로 있었던 건 아닙니다. 물론 고대 로마 공화정까지 거슬러올라가 봐도, 예컨대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처럼 현상을 타파하고 많은 참여를 지향하는 움직임이 있었는가 하면, 그에 대한 반동도 이미 그 시절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북송대의 왕안석이 이끈 신법파와, 사마광을 필두로 한 구법파의 갈등 같은 예도 동아시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대 정치학에서 정의하는 보혁의 병치, 혹은 대립상 같은 건, 의원내각제가 확립된 후의 영국에서 등장한 토리당과 휘그당의 양당제가 그 원조이다시피합니다. 진보도 여기서 그 원류를 찾아야 할 필요가 있고, 보수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물론 19세기 중반부터 등장한 독일의 사민당, 사민주의 계열도 참고해야 합니다만, 진보 보수를 양 축으로 삼고 정치를 건전히 발전시키는 건 영국 정치를 그 시조라 간주해도 무방합니다.

영국 보수당도 위기가 많았습니다. 이 위기는 무려 1945년부터 찾아왔는데, 처칠은 처음에 가망 없어 보이던 독일과의 전쟁(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놀랍게도 그해 총선에서 노동당에 정권을 내어 주고 말았습니다. 조국을 국망의 위기에서 구해냈는데 어째서 선거에는 패배했는가? 이는 당시 노동자 계급의 참여 욕구가 임계선을 넘어 분출했고, 전쟁 때문에 국민에 강요된 희생도 막대했기 때문입니다. 보혁 간의 진정한 승부는 영국에서 비로소 이때 시작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그 이전 자유당과 보수당의 혈전도 볼만했지만 말입니다.

보수당은 1970년대 내내 노동당에 끌려다녔습니다. 광부들의 파업 등 노동계급의 분노도 대단했습니다. 이 시기 영국은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할 만큼 형편이 어려워졌죠. 이런 위기에서 보수당과 영국을 살려 낸 인물은 마거릿 대처였습니다. 그녀의 리더십 덕분에 영국이 상당히 회복된 건 사실이지만, 대신 그녀는 노동계급으로부터 영원한 원성을 들어야 했고 나라의 분열상이 더 깊어진 측면도 부인하기는 사실 어렵습니다. 지도자는 나라도 살려야 하지만, 나라 안의 계급 대립도 어루만져야 하는데 이 점이 어려운 것입니다.

책에서는 보수당의 파란만장한 리더십 변천이 매우 입체적으로 다뤄집니다. 1차 대전 전후하여 역시 격동기에 놓였던 영국에서 보수당의 리더십은 로이드 조지가 맡았는데, 그는 단신으로 유명한 사람이죠. 책에는 당시 보수당을 위기로 몰아넣었던 스캔들이라든가 당내 분열상이 자세히 서술되는데 지나놓고 보면 와 이런 위기를 겪고도 당이 공중분해되지 않고 용케 버텼구나 하는 생각만 듭니다.

1930년대에는 세계 경제 대공황(이 자체는 몇 년 먼저 발생했습니다만) 때문에 영국이 또다시 위기를 맞습니다. 노동당은 이제 엄연히 수권세력으로 부상하여 정권을 차지하기도 합니다. 영국에서는 이때 맥도널드의 주도 하에 이른바 "거국내각"이 형성되는데, 이는 이름만 빌려 아주 한참 후에 한국에서도 시도된 적 있지만 당연히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죠.

다시 1차 대전 때로 거슬러올라가면, 남서 아프리카는 대체로 영국과 프랑스가 나눠 지배하던 지역이지만 조금 밑으로 내려오면 독일의 식민지였던 카메룬이 있죠. 독일의 패전 후 이 처분을 둘러싸고 국내 정치의 대립이 있었으며, 아프리카에 소재한 가장 큰 식민지이자 지금도 인재 유입이 활발한 나이지리아 무역 문제가 또 중요한 이슈였습니다. 이 무렵 영국사를 다룬 책은 여럿이 있지만 이를 "보수당 내각의 혼란상" 관점에서 접근한 문헌이 그리 많지는 않으므로 이 책이 참 도움되었다는 말을 독자로서 하고 싶습니다. 나이지리아는 사실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에 비해서는 시스템이 잘 정비된 편입니다. 우리 나라에는 무슨 마약 밀수처럼 부정적 인상이 널리 퍼졌지만 말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히스라는 이름은 (우연의 일치일 뿐이지만) 미국이건 영국이건 그리 상서로운 이벤트에 엮인 이름이 아닙니다. 이 책에서도 1950년대 영국 정치를 정리하며 "히스는 그리 잘 이끌지 못한 정치인이었다"며 아주 단정적으로 서술합니다. 우수한 엘리트가 영국 정계에 진입하는 건 맞지만, 그 엘리트들이 모두 제 기량을 발휘하는 건 아니며 때로는 이리저리 비위나 잘 맞추거나 대중 선동에만 능한 3류가 전면에 부상하기도 하는데 이는 민주주의 시스템의 태생적 한계에 가깝습니다. 일본도 비슷하죠. 고만고만한 소인배들이 승자로 떠오르는 풍조가 한심합니다.

데이비드 캐머론은 출신 성분에 있어서나 학력, 경력에 있어서나 영국 최고의 엘리트였고 그런 사람이 내세운 "온정적 보수주의"는 큰 관심을 끌었으나 결국 브렉시트, 스코틀랜드 독립 이슈를 놓고 완전한 파국을 맞았습니다. 그 뒤를 메이 총리, 또 지금의 보리스 존슨 등이 이었으나 어째 인물들이 크게 함랑 미달인 듯합니다. 가보지 않은 길을 걷는 중이라고 책에서는 말합니다만 사실 노동당에서도 워낙 우두머리들이 삽질을 벌이는 통에 정권이 안 넘어갔다 뿐이지 그리 장래가 밝지 못합니다. "보수는 어떻게 살아남았나"가 이 책의 제목이지만, "과연 앞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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