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눈뜨게 하라 - 한국신협운동 선구자 평전
신협중앙회 지음 / 동아일보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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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다 열심히 살려 노력합니다. 어떤 이는 나의 생계와 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어떤 이는 자아실현을 위해 한시도 쉬지 않고 경쟁 체제에 몸을 맡깁니다. 때로 좌절을 맛보지만 대개는 남들처럼 열심히 사는 게 뿌듯하며 이런 질서에 몸 담는 게 당연하다 여깁니다. 그런데 어떤 때에는, 내가 이렇게 사는 게 옳을까, 이런 경쟁에서 설령 이긴다 한들 이웃의 아픔과 좌절감을 돌보지 않고 무자비한 질주에만 몰입하는 게 과연 도의적으로 올바를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나아가, 소모적인 경쟁을 지양하고 처음부터 내 몫과 이웃의 권익을 구별해서 서로 협력하고 오손도손 사는 성숙한 지혜를 발휘할 수는 없을까에까지 생각이 머물 때도 있습니다. 아닐까요?


내가 돈이 부족하면 금융기관에 가서 빌릴 수 있습니다. 이자는 당사자의 신용과 자산 보유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대개는 이런 이자 부담을 버겁게 느낍니다. 금융기관도 이익을 추구하는 곳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좀 싸게 안되냐고 물으면(물론 현실에서 그런 걸 물을 수도 없지만) 우리가 자선 사업 하는 곳이냐고 대뜸 퉁명스런 대꾸가 날아올 겁니다. 그런데 "돈을 빌려 주는 곳은 과연 항상 이윤을 추구해야만 하나, 공동체 모두의 이익을 위해 이자는 최소한으로만 받을 수는 없을까?" 같은 의문을 떠올리는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고려 시대, 조선시대에도 저리(低利)로 서민에게 곡식을 빌려 주는 곳이 있었습니다. 다만 이런 공적 기관이 제대로 그 취지대로 운영된 적은 거의 없고, 오히려 서민의 수탈 주체로 나서 큰 문제를 일으킨 적은 많습니다. 농협, 수협 등도 본래는 이런 취지지만 효율을 추구하다 보니 이제는 여타의 금융기관과 다를 바가 거의 없습니다. 


신협은 무려 1849년 독일에서 처음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경제적 곤경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사심 없는 개인이나 기관이 도와 주면 잠시의 어려움을 딛고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선 사업"이 아니라, 도움을 주는 주체도 서민들이고 받는 대상도 서민들입니다.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고, 평소에 내가 여유 있을 때 조금씩 돈을 모아 어려운 이에게 보태 주고, 나중에 내가 어려워지면 도움을 다른 이들에게 받는 것입니다. 물론 전혀 인센티브가 없으면 선뜻 출연(出捐)할 이가 없을 테니 소정의 이자는 지급합니다. 그런데 이 이자도 그리 작지 않으면서도 차입자에게 큰 부담도 안 주게 할 수 있는 것이, 애초에 중간에서 누군가가 이익을 취하지 않고 순수하게 공동체조합원들만을 위한 조직이면 이게 가능한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신협이며, 이 책에서는 그런 감동적인 신협 운동에 앞장섰던 선구자들을 조명합니다.


"가브리엘라 수녀는 자신의 말을 잘 따르고 맞춰 주는 비서가 아니라 자신만큼이나 뚝심이 있는 사람을 원했다(p90)." 이런 공익 추구 운동을 펼치는 건 철저한 애타심, 이타주의에 기반한 것이지만 불모지에서 이런 운동을 펼치며 온갖 난관, 이해관계자들의 방해를 뚫고 나가려면 여간 뚝심이 필요한 게 아닐 것입니다. 자신의 이기적인 사업 추진에만 뚝심과 배짱이 필요한 게 아니란 뜻이고, 자신에게 한 푼 이익이 돌아올 게 없는 이런 일에 헌신하는 게 더 강단 있고 더 독한 마음을 품는 지도자가 요구됩니다. 


마침 그녀에게는 외국어도 잘하고 업무 추진력도 출중한 강정렬이라는 젊은이가 곁에 있었으며, 이어 박희섭이라는 청년도 합류했는데 그는 대한민국 농림부 장관 비서였습니다. 이상호, 박성호 등도 모두 젊은 열정에 불타는 인재들이었으며, 확실히 난제를 추진할 때에는 열정과 개인 역량이 겸비되지 않으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능력 출중하고 앞날 창창한 이들이, 눈 앞의 이익을 도외시하고 이처럼 뜻 깊은 사업에 나선 건, 아마도 1950년대 같은 낭만시대라서 가능했는지도 모르겠으나 여튼 성인(聖人)에 가까운 헌신, 희생정신이 없고는 도저히 불가능한 소명입니다.


혹시 이들이 모두 특정 종교의 신앙을 가졌기에 이런 무모해 보이기까지 하는 운동에 뛰어들었을까 하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습니다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전도 유망한, 오늘날 기준으로 금융 스페셜리스트에 가까운 입장이었는데, 그 막대한 이익과 자아 실현 기회를 포기하고 낯선 대의에 동참할 수 있었을지. 오늘날의 각박한 세태에 비추자면 더욱 놀라운 결단입니다. 처음에 이들 젊은이들이 신앙을 바로 갖지 않아 아쉬웠으나 운동의 추진이 더 급했기에 구태여 강요하지 않았다는 수녀님의 지혜에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가브리엘라 수녀님은 한국인들의 정(情)을 믿었다고 합니다. 냉혹한 계산에 의해 움직이는 서양인들에게서는 좀처럼 찾기 어려운 특징이죠. 수녀님의 생각엔, 이 올바르고 반듯한 젊은이들에게 신협 운동의 정당성과 필요성, 그리고 추진 주체인 자신에게 어떤 사적인 동기도 없다는 점을 강하게 설득하면 젊은이들의 동참을 끌어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예측은 멋지게 들어맞았습니다. 


"가난한 대한민국은 미국의 원조가 아니면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원조에 기대어 사는 건 국가 발전에는 좋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결국 어떤 나라를 빈곤에서 탈피하게 하는 방법은, 스스로 일어서게 하는 자조의 정신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리석게 고리대업자의 배를 채우는 손쉬운 방법을 택할 게 아니라, 너도 쓰고 나도 쓰게 곳간을 만들고, 평소에 아껴 써서 이 곳간을 채우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당장 절약하고 부지런해지는 건 어렵고, 고리대업자에게 내일을 생각 않고 돈을 빌리는 건 쉽습니다. 수녀님과 세 젊은이는 물질적인 난관도 극복해야 하지만, 서민들에게 이런 정신을 함양하고 일깨우는 과제, 어찌 보면 훨씬 어려운 작업까지도 맡아 나가야 할 처지였습니다. 


안티고니시에서 설령 대성공을 거둔 방법이라 해도, 머나먼 한국에서까지 성과를 거두리라고는 쉽게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수녀님과 멋진 협업을 이룬 분이 장대익 신부님이었습니다. 두 분 모두 사심 없이 대의를 위해 정열을 불태우는 분들이라는 점은 같았지만, 수녀님이 엄격하고 깐깐한 스타일인 반면, 장 신부님이 보다 포용적이고 유연하다는 점에서 두 분은 대조를 이뤘는데, 오히려 이런 대조적인 스타일이 창과 방패처럼 멋진 조화가 되었고 상호 보완이란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런 리더들이 신협 운동 초기에 선봉으로 서신 점도 한국에는 확실히 행운이었습니다. 


p204에 보면 장대익 신부님의 어린 시절이 소개되며 이때 같이 나오는 분이 윤공희 대주교님, 훗날 광주대교구장이 되며 5. 18 민주화운동에서 큰 기여를 하신 그분입니다. 이 영향으로 광주에는 유독 천주교 신도의 비율이 높다고도 하죠. 활발한 말썽꾸러기 기질도 가득했던 소년 장대익은 성장하여 정의감 충만한 신부님이 되었고 신협 운동에 대해 알게 됩니다. 안티고니시는 그 낯선 어감 때문에 어디인가 하실 분들이 있겠지만, 캐나다 노바스코샤에 소재하는 곳입니다. 이곳에는 외방 전도회 소속 신부님들이 이미 먼저 와 운동의 기반을 닦아 놓으셨는데, 하나같이 빈곤 타파와 자립, 그를 통한 자존의 확립을 추구하는 소명에 불타는 분들이었습니다. 이대목을 읽으면서, 오늘날과는 달리 교통도 미비했던 그 시절 많지도 않은 돈만을 소지한 채 목표지인 안티고니시까지 찾아가는 일 자체가 엄두가 안 날만한 난관이었겠다 싶었습니다. "키는 작지만 발걸음이 재고 성큼성큼 걸으며 남들을 이끄는" 장대익 신부님에 대한 묘사를 보며 그 모습에 대한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듯했습니다. 


해방과 한국전을 거치며 사회가 혼란스럽고 빈곤이 만연했을 때 이 가난한 나라에 가장 먼저 구호의 손길을 뻗은 곳이 천주교라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특히 가톨릭은 세계적인 조직을 갖췄고, 이 무렵 밀가루 등 구호품을 전달하여 빈민의 마음을 어루만진 것도 유명합니다. 그런데 부끄러운 일이지만, 일부 몰지각한 한국인들이 이 와중에서 비리를 취해 많은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했습니다. 이 책에도 운전수들이 이른바 "삥땅(책에는 그런 저속한 용어가 안 나오지만 그 시대를 산 어른들은 흔히 본 풍속이죠)을 치고" 그러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관행임을 억설하는 한심한 행태가 나옵니다. 


강정렬 박사는 이런 탈법에 대해 원칙대로 단호하게 맞서기보다, 그들의 딱한 처지를 알고 급여의 일부로 전환 지급하는 놀라운 관대함을 보여 줍니다. 마치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미리엘 주교가, 은촛대를 훔쳐 경찰에게 잡혀 온 장발장을 옹호하며 "이는 내가 선의로 준 것"이라며 그를 감싼 장면과 비슷하죠, 은혜를 원수로 갚은 자신에게 이처럼 너그럽게 대한 주교에 감동하여 장발장은 인간 막장에서 위인으로 거듭납니다. 


강정렬 박사님의 거룩한 삶은 그 밀도도 높았지만(대의에의 헌신), 그 폭도 넓었습니다. 이 책에 감동적으로 서술된 한 편의 영화 같은 박사님의 삶을 보면 필리핀에서 온 젊은이를 만나 소통하는 장면도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1960, 70년대 필리핀에 만연했던 공산주의 게릴라의 한 단면도 엿보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이른바 "킬링 필드"를 초래했던 크메르 루즈 이야기도 간접적으로 언급됩니다. 정치색이 배제된 채 오로지 민중의 삶을 구제하고 가난을 타파하는 데만 전념했던 강 박사님의 노선이 이들과 마냥 맞을 수 없는 게 당연했지만, 강 박사님의 소신이 워낙에 강직하고 한 점 먹구름이 없는 청신한 것이라서, 그 웅대하고 순일한 그릇에 마치 현대사의 얼룩이 다 녹아드는 느낌입니다. 선(善)과 헌신, 이웃에 대한 사랑, 연대 정신 같은 숭고한 미덕은 누구나 공감하지만, 자신의 소중한 한 번뿐인 인생을 그를 위해 불사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이런 거인들의 발자취를 보면, 내 자신의 비루함과 인색함, 소견 좁음과 이기주의가 너무도 부끄럽게 느껴지지 않나요? 읽으면서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도 한, 개인적으로 근래 드물게 겪은 소중한 체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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