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냐도르의 전설
미라 발렌틴 지음, 한윤진 옮김 / 글루온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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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판타지는 처음 읽어 보는데 재미있었습니다. 엘프 족, 드래곤 족, 데몬 족, 그리고 인간 종족이 에냐도르라는 땅에 삽니다. 엘프 족은 드래곤 족에 약하고, 드래곤은 데몬 족에 약하며, 데몬 족은 엘프 족에게 시달리는 형세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이 세 종족 모두로부터 핍박을 받습니다. 이렇게 된 건 에냐도르의 네 종족이 마법사와 어떤 거래를 했기 때문입니다. 엘프와 드래곤과 데몬은 대마법사에게 영혼을 팔고 각각의 장점을 부여 받습니다. 대마법사는 한 종족에 최강의 무기를 판 것 같았지만 사실은 세 종족과 각각 이중거래를 한 셈이라서 가위바위보처럼 어느 종족도 다른 종족 둘을 완전 제압하고 모든 나라를 통치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남부에 살던 인간만이 대마법사와 거래를 하지 않았기에 약점도 극복 못 하지만 대신 영혼을 고스란히 유지합니다.

유럽 역사는 토착 민족이 저 북부로부터 내려온 노르만, 게르만에게, 혹은 북진해 온 로마인들에게 정복당하는 패턴이 초기에 점철되었습니다. 아마 피정복민 입장에서는 악마에게 영혼을 판 듯한 잔인한 정복자들이 공존과 평화를 거부하고 자신들을 압박한다고 여겼을 겁니다. 그래서 소설 중 인간들이 겪는 고통과 시련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데, 다만 판타지이다 보니 과도한 묘사는 없고 뭐 언젠가는 극복이 되겠지 하며 편한 마음으로 읽어내려갈 수 있습니다. 성적인 묘사는 아주 없지는 않으나 마일드하기 때문에 중학생이 읽어도 무방할 듯합니다.

아무래도 이 소설은 가장 약한 종족인 인간 부족이 중심이 되어 전개되는데, 주인공들도 거의 다 인간들(나이 어린)이며 타 부족 출신 주인공들도 결국 인간들에게 공감하고 선한 본성을 회복해 가는 과정입니다. 물론 주인공인 인간들도 인간인 채로 계속 남아 있으면 아무 힘도 발휘 못하고 노예로 처참하게 죽기 마련이라서, 어느날 자신의 잠재력이 각성한다거나 마법사에게 능력을 받는 식으로 신분이 달라집니다. 차이가 있다면 능력은 능력대로 가지고 인간의 영혼도 그대로 간직한다는 건데 이 모두가 고귀한 운명이 어느날 제 길을 찾아서입니다.

우리 민족은 숲, 산에서 안식과 평안을 찾는 습성이 있었으며 현재도 그렇죠. 그런데 유럽 동화나 민담에서 숲은 언제나 불길하고 악마와 사악한 정령들이 거하는 공간이며 거의 항상 나쁜 일이 일어납니다. 그늘의 숲이라는 샤텐발트에서 카이는 염소와 함께 죽을 고생을 하지만, 진짜 고생은 인간이 거주하는 마을로 내려와서부터 시작되네요. 앞이 안 보이는 시련과 고난의 연속입니다. ㅠ

트리스탄도 마치 로마 시대의 검투사처럼 잡혀 와서 모진 훈련을 받는데 드래곤이나 데몬과의 전투에 (말하자면) 총알받이로 내세워질 운명입니다. 그는 야레드에게 앰플을 받는데 고통이 너무 심할 경우 자살할 용도로 쓰일 수 있고 이 독약은 비룡 와이번에게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와이번은 현재 한국 프로야구에서 어느 구단의 마스코트로 쓰이는 바로 그것입니다.

아그네스는 마법사로 오인(?) 받아 엘프의 왕자에게 잡혀 와서 감옥에 갇히는데 이 감옥에선 십 몇 년 동안 끔찍한 고문을 받는 늙은 마법사가 있습니다. 매번 죽고 다음날 다시 살아나 또 죽는데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메테우스가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먹히는 것과 비슷하네요.

잔인한 왕자이지만 그에게는 비슷한(엘프라서 너무도 아름다운) 용모를 한 쌍둥이 여동생이 있습니다. 어느날 이 여동생은 마치 계시라도 받은 양 장래의 배필을 만나는 꿈에 설레는데, 오빠는 "사랑이란, 불완전한 인간의 감정일 뿐(p236)"이라며 면박을 줍니다. 책에서 기사와 레이디, 드래곤.의 이야기를 읽었죠. 이 모든 시련은 그녀를 만나기 위한 과정일 뿐이었다... 같은 스토리가 마치 그녀에게 어떤 운명을 점지해 준 것 같은데 저런 이야기는 우리 독자들의 세계에서 특히 서유럽의 어린이들이 어렸을 때 예외 없이 읽고 자란 이야기입니다. 다른 세계에서 지켜 보니 묘한 감정이 드는군요.

그런데 쌍둥이라 운명도 같이 가는 건지, 독자인 저는 이 왕자가 자기 여동생처럼 저 시골소녀 아그네스에게 어떤 감정을 느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걸 알기라도 했는지 감옥에 갇힌 마법사 엘리야는 왕자에게 손을 내밀라고 하는데... 알고 보니 왕자에게 저주 받은 운명을 내리려는 속임수였습니다... 아그네스는 마구 그를 책망하지만.... 한참 뒤 p263에 보면 "야릇한 감정을 시골소녀에게..."라는 구절도 나오고! 더 뒤(p361)로 넘어가면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엘프의 피를 뿌려야 결계의 마법이 풀린다는 설명이 따로 나옵니다. 결국 사랑이야말로 만능의 묘약인 셈이네요. 그런데 마법을 풀려면 (p255) "한 컵이면 충분하다"고 하는데 무슨 소줏잔 같은 컵인지는 모르겠으나 피의 양이 한 컵이면 그게 적은 건지....

"엘프 레이디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완고한" 여동생을 걱정하며, 장래 매제가 될 로리안이 제 운명을 과연 알까 하고 걱정하는 왕자이지만 독자인 우리가 볼 때에는 이런 잔인한 엘프 중 과연 완고하지 않은 이들이 몇이나 되겠는지 의아합니다. 아름다운 외모가 과연 전투시에 무슨 무기가 될까 싶지만 이들의 무기는 잔인한 성품, 공감능력 결여, 타인의 철저한 타자화, 덤으로 제련 기술 등입니다. p161에 "이 종족은 모든 것이 빛났다. 내면만 제외하고는..."이라든가, p194 "호리엘의 아름다운 얼굴이 흉측하게 ..." 같은 구절, p220의 "비현실적인, 햇빛처럼 빛나는 미모" 같은 데서 이 판타지의 매력적이고 개성 있는 설정이 돋보입니다.

p259에 보면 "자유라는 향기가 그의 신체 능력 최고치를..." 같은 말이 있는데 노예처럼 억지로 끌려 가며 하는 일과 자신이 좋아서 펄펄 기가 살아 하는 일이 결과가 같을 수가 없죠. p268에 "아그네스는 처음으로 그가 제 마음에 들어오는 걸 허락했다.."고 하는데 저 앞 p127에 "적이자 주인"이란 말과 대조해서 보면 묘한 느낌이죠. "너희 인간들은 미신에 약한(p121), 겁에 쉽게 질리는(p124) 종족이며, 그러니 노예로 살 수밖에 없다"고 왕자는 말하는데, 이 역시 마치 정복자 민족(게르만, 노르만 등)이 약한 켈트 족, 브리튼 인을 깔보며 내뱉던 오만한 언사가 연상됩니다. 실제 역사에서 말이죠.

앞에서 데몬, 드래곤, 엘프 족이 각각 삼각 관계를 이룬다고 했지만 데몬이 엘프에게 대항하기 위해 드래곤을 의지 무력화 상태로 사육한다는 말이 p264에 나옵니다. 이렇게 해서 전쟁이 보다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는데 세계관과 규칙을 이해하는 데 유의할 필요가 있겠네요. p328에 다시 각 종족의 약점이 설명되고, p367에는 종족간 임신이 가능하다는 말이 나옵니다. p382에 드레곤이 본디 수치심이 없다고 하는데 이 부분에서 어린 독자에게는 지도가 필요하겠네요. p398에 치유 포션 이야기가 나오고 본래 potion이라는 단어가 이처럼 민담, 혹은 판타지 장르에서나 구경 가능합니다.

아그네스의 처지, 그레타(하녀)의 입장이 제일 딱합니다. p138을 보면 "만일 내 말이 사실과 다르다면 내 모든 걸 걸겠어요"고 하는데, 걸 게 뭐가 남은 그녀라고 저런 말을 하겠습니까. 그래도 자존심과 영혼은 끝까지 지켰다는 건데... p374에 보면 마부 티발트(로미오와 줄리엣에서 티볼트가 생각나네요)는 고자가 된 후 자신의 행실을 변명하며 집 주인, 마을 원로 모두가 다 하길래 (나도 그녀를 범했다)고 하는데 이런 걸 변명이라고 태연히 말하는 자체가 놈의 영혼이 구제불능이라는 걸 말해 줍니다. 이 대목은 정말 끔찍하지만 장르가 판타지라서인지 그리 심각하게는 안 읽혔습니다. p282 마지막 줄, p286 첫째 줄의 아그네스는 문맥상 그레타가 맞겠죠?

p408에 나오듯 간혹 예외가 있어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엘프가 있다고 하는데, 이 사랑이야말로 영혼을 잃고 사는 괴물 종족, 혹은 현대인에게 다시 초심을 찾아 줄 명약이겠습니다. 속편이 기다려지는 재미있는 판타지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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