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와 성 - 사이코패스의 심리와 고백
리하르트 폰크라프트에빙 지음, 홍문우 옮김 / 파람북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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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광기는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해 발생하고, 여러 가지 패턴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광기가 반드시 성(性)과 관계 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상당수는 성과 밀접한, 그리고 이상한 방법으로 관계가 있겠습니다. 광기와 성이 이처럼 긴밀한 관계를 갖는 걸 보면, 언젠가는 성적 이상 발현(흔한 말로 "변태"라고 하는 것)으로 모든 광기를 설명할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물론 전혀 아닐 수도 있죠). 혹, 만약 그런 날이 오기라도 한다면, 아마 그 훗날의 연구자들은 이 고전에 큰 빚을 졌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사드 후작은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닌 욕구, 행태로 당대에 큰 물의를 빚었고(현대인의 관점이라면 N번방 저리가랄 만큼의 극악무도한 범죄), 그 결과를 책으로 쓰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 폰크라프트에빙은 점잖은 의사요 학자였습니다.

이 책은 처음에 라틴어로 쓰였다고 하는데, 라틴어가 국적 불문 유럽의 모든 학자에게 필수 교양이었고 학술서가 쓰이는 언어였던 건 이때로부터 몇 세기 전의 전통이었습니다. 그러니 꼭 라틴어로 쓰일 필요는 없었을 텐데 구태여 저자가 그런 태도를 취한 건 우리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다양한 임상(?) 서술이, 일반 독자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겠으니, 당국에서 검열을 통해 엄격한 제한을 가할 수도 있었으니 말입니다. (다만 책 뒤 후기에 보면, 이 책은 "독일어 원전"을 다시 프랑스어로 옮긴 판본을 한국어로 번역했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사드 후작의 책도 대략 8, 9년 전에 한국 문체부에서 판금 조치가 내려졌던 걸 해당 출판사가 소송을 해 바로잡은 적도 있습니다. 이 책 역시 한국어로 쉽게 쓰여진 걸 보면 여러 생각이 들기도 하고 많이 불편해지는 대목도 있습니다만 여튼 고전을 읽는 자세, 공부하는 태도로 읽어낼 수 있는 책입니다.

책날개에 보면 체자레 롬브로소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아마 학부때 법학, 그 중에서도 형법학을 공부했다면 귀에 익을 듯합니다. 공교롭게도 그때로부터 백 년 전쯤에 베카리아라는 학자도 큰 업적을 남겼는데 이분도 퍼스트 네임이 "체자레"입니다. 여튼 롬브로소는 p91 하단 등에서 다시 인용되는데 이 책이 학술 고전이라는 점 독자들은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이 책은 다양한 사례에 대한 보고(report) 형식입니다. 그 중에는 저자가 직접 치료하고 상담했던 이들의 케이스가 많은데, p121에 보면 ".... 나는 (저자) 폰크라브트에빙 박사의 책을 읽고 도움을 받아 ..." 라는 대목도 나오죠. 책에서 이른바 자기 언급(self-reference)이 등장하는 건 언제 봐도 흥미롭습니다. 여튼 이 고백에서 사례자는 "... <톰아저씨의 오두막집>을 읽고(물론 우리가 잘 아는 그 스토우 부인의 소설입니다) 성적 흥분을 느꼈다..."는 충격적인 진술도 합니다.

특히 주인공 엉클 톰 등이 채찍질을 당하는 대목에서 그러했다는 건데(...), 우리는 한숨이 나오죠... 뭐 여튼 이 책에서 잠시 다른 대목을 보면 p171에서 채찍질에 쾌감을 느끼는 여러 다른 시대의 사례가 다뤄집니다. 중세에 자신에게 채찍질을 가하며 참된 종교의 오의를 탐구한 이들을 가리켜 편타고행자라고 불렀는데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도 잠시 언급이 나오며, 댄 브라운의 메가셀러 <다 빈치 코드>에도 flagellation, flagellist가 나오죠. 원서로 읽으면 이 단어들이 그대로 언급되니 예전 기억을 더듬어 보시기 바랍니다.

p97에는 카트린 드메데시스의 악행을 언급하며 혹시 이것(성 바르톨로뮤의 학살)이 그 여인의 뒤틀린 성향에 기인하지 않았는지 하는 암시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광기, 성적 좌절, 분수에 넘는 비뚤어진 권력욕, 터무니없는 과대망상, 자신의 능력에 대한 과대평가, 열등감,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인 의사 결정 등이 분명 어떤 식으로건 정신 분석의 대상이 된다는 건 확실합니다. 그 가장 깊은 기저에 "성"의 문제가 깔려 있을 수도 있고요.

이 책에는 자위행위에 대한 언급이 아주 자주 나오는데 이 패턴이 당시에는 정신병의 일종으로 취급되던 풍조를 반영하는 듯합니다. 가톨릭에서는 죄로 취급하여 고해성사 때 고백할 항목 중 하나며, 만약 알고도 언급이 없으면 모고해로서 그 자체로 독립된 죄가 되죠. p71에 보면 "수음의 치명적 결말.." 같은 표현에서 분위기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또 중세 수도사들에게는 이것이 큰 죄였죠. 그러나 현대 의학에서는 "지나치지 않다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들 봅니다.

또한 p289 등에서 "...후천적 동성애는 진단하기 어려운 편이다" 같은 서술이 있는데 역시 동성애를 정신병으로 보던 당대 컨벤션의 흔적입니다. 세상이 많이 바뀌어 만약 어떤 정치인이 요즘 젠더 이슈 관련하여 이런 발언을 하면 아마 진보단체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을 것입니다. p292에는 여성 동성애를 암시한,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의 유명한 작품이 도판으로 나옵니다. p286에 보면 "드물게나마 아동에게서도 동성애가 (성도착의 일환으로서) 발견된다"는 서술도 나옵니다. 이런 건, 후천적, 선천적 두 패턴 중 의사인 그가 무엇으로 분류했는지 궁금하네요.

폰크라브트에빙 박사의 시대에나 지금이나 여전히 범죄로 취급받는 행태도 나오는데 이른바 소아성애입니다. 이 외에도 이 책엔 여러 충격적인 패턴들이 분석되고 서술됩니다만 차마 이 서평에 자세히 옮기기는 망설여집니다. p529에 보면 "'소도미아'라는 용어를 법률가들은 혼란스럽게 사용하는데... "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사실 법률가뿐 아니라 언어학자, 성경학자 등도 혼란스럽게, 모호하게 사용하는 건 같습니다. 이런 비정상적이고 경멸스러운 행태를, 자국이 아닌 먼 이방에서 유래했다며 문제를 회피, 왜곡하는 건 흔히 보는 모습인데, 일부 학자들은 이란 등 근동에서 구태여 사례를 찾았고 이 페이지에서 인용하는 폴락 등의 학자가 보인 태도도 그러합니다. 소도미는 동성애를 뜻하기도 하지만(구약 창세기에서 소돔인들의 요구. 참고로 이 무대 역시 중동이죠), 수간(bestiality)을 뜻하기도 하는데 저자는 이유형의 여성들이 주로 개를 선호한다며 파리의 불독 사건을 예로 들기도 합니다. 우리 동아시아에도 포송령의 <요재지이>에 비슷한 사건이 나옵니다.

성 관련 외에도 저자가 의사이다 보니 성과 직접 무관한 다양한 증상(?)에 대해 언급합니다. p133에 보면 "사두증"이 나오는데 마치 머리의 한쪽 면이 뱀의 그것처럼 평평한 증세라고 하네요. 이 비슷한 걸로(아니 훨씬 심각한 병으로) 조셉 메릭이 앓은 "상피병" 같은 것도 있죠. 머리가 평평한 게 병이라면 동아시아의 현인 공자 역시 머리가 평평해서 이름이 구(丘. 언덕)이었는데 이분도 환자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p137에는 장 자크 루소의 <고백록>에 나오는 여러 충격적인 대목, p140에는 그 유명한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 작품에서 나오는 징글징글한 묘사를 놓고도 저자의 분석이 이어지는데 재미있습니다. 이런 태도가 이 이른 시기 이미 고전의 한 전범을 확립했다고도 볼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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