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에서 이기는 법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 지음, 필립 프리먼 그림, 이혜경 옮김, 매일경제 정치부 해제 / 매일경제신문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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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에서 이기는 법." 마침 시즌이 또 시즌이고 보니 제목부터가 우리 독자들의 눈길을 끕니다. 이 책을 읽으면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 유능한 후보자가 될 수 있을까요? ㅎㅎ 물론 우리 독자들의 99%는 선거와, 적어도 선거 출마와는 거의 무관한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겠습니다. 그래도 아마, 내가 응원하는 정치인, 나중에 국회의원도 되고 대통령도 되었으면 하고 내가 바라는 거물급 인사는 한둘 정도는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선거라는 게임의 관전 포인트"가 생기는 셈이므로 이 책은 일단 흥미를 끕니다.

그런데 이 책은 그것 말고도 다른 매력 포인트가 하나 더 있습니다. 아니 매력 포인트 정도가 아니라, 어쩌면 독서에 있어 본질이라 할 만한 유념 사항이겠습니다. 그건 바로 이 책의 저자인데, 무려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앞선 시기에 출생하여 자신의 시대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고, 이후 서유럽(적어도) 역사와 문화에 큰 업적을 남긴,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그 빛나는 이름 때문입니다.


사실 키케로는, 요즘은 아마 홈스쿨링을 통해 자녀의 미국 명문대 진학을 노리는 분들이 많기에 특히 주목 받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미국 대입을 위해 필수 이수 학점 과목 중 라틴어가 있는데, 바로 라틴어 reader(독해 교재)에 단골로 등장하는 이름이기 때문이죠. 꼭 그런 실용적 목적이 아니라도, 키케로는 현대인에게도 필수로 여겨지는 인문 교양서 여럿의 저자이므로 그의 저자 명의가 걸린 책은 그 이름만으로도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키케로는 본인 역시 공화정 로마에서 여러 번 선거에 출마하거나, 출마하려는 유력 정치인의 유능한 벗, 조력자였습니다. 따라서 그가 "선거에 대해 펴는 논변"은 이미 달인의 그것으로서 한 번쯤은 경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키케로는 로마 공화정 시대를 다룬 문학 작품이나 미드에서도 조연급으로 자주 등장하므로 대중 문화를 즐기는 이들에게도 이 책은 충분히 관심을 끌 만합니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하나,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조금) 더 이전 시대를 산 고대인의 충고가, 현대 선거에도 과연 통할 수 있을까요? 저도 사실은 약간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책을 넘겼습니다. 의외로 책은, 현대 선거에도 얼마든지 통할 만한, "금언 명언"으로 가득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선거"에만 적용되는 교훈이 아니고, 사람 사이의 관계에 두루 통할 만한 소중한 가르침을 담고 있더군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선거에 이기려면 어떤 조건을 우리가(생전 선거 같은 건 출마할 일이 없지만, 그래도 혹 그런 일이 있다면) 갖추어야 하겠습니까? 인심을 얻어야 합니다. 적을 가급적이면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 조건들이 그저 얕은 잔꾀나 테크닉만으로 얻어지지는 않고, 진심을 기울이거나 정성을 들여야 이뤄지는 소중한 관계임은 분명합니다. 책에서 말하는 건 주로 그런 내용입니다. 그러니, 선거에 나갈 사람이 아니라도, 예컨대 회사 안에서 "정치를 잘하기 위해", 혹은 부서 성원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 유익하게 쓰일 만한 조언을 이 책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요즘 선거에도 직통으로 적용할 만한 교훈도 많아서 흥미로웠습니다. 인터넷에 "금귀월래"라는 말을 검색해 보면 바로 정치인 한 사람의 이름이 뜰 건데요. 지역구에서 여러 번 당선되는 거물이 되려면 확실히 지켜야 할 어느 한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이 정치인을 지지하고 싫어하고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건 뭐 사람마다 입장이 당연히 다 다르죠). 그게 바로 이 책 p15에 나옵니다. "지역구를 떠나지 말라."

사실 "지역구"의 개념이 이천 년 전 로마에 있었다는 자체가 저는 놀라웠습니다만, 지역구에 상주하며 지역구민들의 애환과 고충을 듣고 이를 처리해 주는 게 국회의원의 가장 기본적인 책무임을 고려하면 이는 너무도 당연한 말입니다. 제가 사는 동네에도 유독 "제 말을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유권자들의 칭송을 듣는 그런 국회의원이 있습니다(앞의 그 사람은 아닙니다). 그래서 올드 팝 중 <As Time Goes by>라는 노래에 "근본적인 건 변하지 않아(The fundamental things ♬apply)"라는 가사(구절)가 있는 거죠.

씁쓸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을 들어 주겠다"고 약속하라." 이 말 자체도 사람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지만, 더 놀라운 건 그 다음에 나오는 설명입니다. 아니, 우리는 "나중에 뒷감담을 어떻게 하려고 그런 헛된 약속을 함부로 하는가?" 싶지만, 저자는 이렇게 말하네요. "당신은, 약속을 안 지켰다고 원망을 듣기보다, 저 사람이 아예 내 부탁을 들어 주려 하지도 않았다는 원망을 더 크게 들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은 더 걸작입니다.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소중한 가치를 지키겠다고 약속하고, 개혁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현상 타파를 약속하라." 아, 충격입니다. 아닐까요?

저는 이 구절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람을 속이라는 게 아니라, "경청"의 중요성을 강조한 구절이라고 말입니다. 그릇이 큰 사람은, A라는 사람의 말에는 A라는 타당성이, B라는 사람에게는 또 그 나름의 일리가 있다는 걸 압니다. 그래서 황희 정승 같은 명재상도 "네 말도 옳고 네 말도 옳으며, 이런 나의 태도를 우유부단 무주견이라 나무라는 네 말도 또한 옳다"고 한 것입니다. 황희 정승이 무슨 기회주의자나 사기꾼이라서 이런 태도를 취한 건 아니겠죠. 키케로도 결국 같은 포인트를 지적하는 겁니다. 한편으로, 이 구절은 당시 로마 공화정 하의 선거 타락상을 날카롭게 비꼰 풍자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독특한 편제로 되어 있습니다. 왼쪽(짝수) 페이지에는 영어 원문이 실렸으며, 오른쪽(홀수) 페이지에는 한국어 번역이 실려 있습니다. 사실 키케로는 고대의 로마인이며 따라서 라틴어를 구사했고, 이 영문은 책 표지에도 나와 있듯 필립 프리먼이 옮긴 것이므로 영문이 곧 원문은 아닙니다(라틴어가 원문). 그런데 책이 이런 체제이므로 우리 독자들은 간단한(사실 간단하지는 않아요. 영문 자체도 고전의 번역이므로) 영문을 통해 영어 독해 공부도 할 수 있습니다.

농담이 아니고 이런 문장은 대개 문장 교본으로 쓰일 만큼 명문이므로 영어 공부의 소재가 얼마든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p76을 보면 "Make it clear to each other under obligation exactly what ypu expect from him."이란 문장이 나오는데, 여기서 it은 우리가 학창 시절에 배운 이른바 가목적어입니다. 목적어가 너무 기니까 그 자리에 it 하나를 두고 진(짜)목적어는 맨 뒤로 돌리는 거죠. 그럼 진목적어는 뭘까요? 맨 뒤에 나오는 복합관계대명사 what 이하의 구절입니다. "to each other"이라든가, "under obligation" 같은 건 다 수식어구에 불과합니다.

이 책으로 영어 공부도 할 수 있고, 선거에 혹 출마하시려는 분은 실전 선거에서 쓸 만한 유용한 팁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외에 또 다른 장점은 없을까요? 놀랍게도 이 책은 키케로의 원저를 옮긴 영문과 국문만 담은 게 아니라, 예컨대 pp. 56~63에서처럼 로마 공화정 시대에 대한 간략한 해설도 있습니다. 키케로의 가르침이 아무리 시공을 초월한 보편 타당성을 갖췄다고 해도, 그로부터 이천 년이 지난 우리 시대가 전혀 이해 못 할 만한 특수성도 적지 않기에, 우리 독자가 본문을 아무 해설 없이 막바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일종의 "해제"가 필요한데, 이 책은 회색 페이지에 별도로 로마 공화정 시대에 대한 해설도 포함합니다.

"한국 정치는 2500여년 전 로마보다도 못한 것일까." 매일경제신문 정치부 기자분들이 해제한 이 책에는 p56에 저런 말이 실려 있습니다. (2500년 전은 로마 공화정의 시작이며, 키케로의 활동 시대는 예수보다 조금 전이라는 제 말이 맞습니다) "공화정"의 영단어인 republic 자체가, 라틴어 res publica의 후예라는 설명도 유익(p57)합니다. 라틴어 res가 영어의 thing이란 뜻이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공화정의 기본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엄격히 준별하는 게 그 기본이 된다는 뜻이죠. 그러나 세상에는 공과 사를 구분 못 하는 정치인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정치인을 몰아내고 참된 일꾼을 뽑자면 먼저 우리 유권자부터 옛 성현의 가르침을 옳게 익혀 일상에서 선거에서 실천에 옮겨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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