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 익스체인지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22
최정화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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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존엄은 어디서 근거할까요? 사람은 당장의 곤궁을 모면하기 위해 못 할 짓이 없어 보이는, 때로는 참으로 초라하고 비천한 존재입니다. 물론 루머에 불과하겠으나 과거 군사정권 당시 대규모 개발에 쫓긴 도시 빈민들은 자기 자식을 삶아 먹었다는 충격적인 소문도 있었습니다. 먼 역사를 거슬러올라가면 자식을 바꿔 먹기도 하고(조선 경신대기근), 딸을 팔아 생계에 보태기도 하는 등(중국 청조 말기) 인간이 굶주림과 가난 앞에서 못할 짓이란 없습니다.

이런 인간의 곤경이 과거형으로만 회고되는 건 물론 아닙니다. 이 책 뒤편 해설에도 나오듯, 멀지도 않은 한국 제주에 체류하며 불안한 나날을 보내는 난민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TV 광고를 통해 전세계의 딱한 처지에 처한 이들, 특히 어린이들에 대한 도움이 절실하다는 메시지를 항상 접하다시피 합니다. 그럴 일이야 없겠으나, 이 코로나 위기가 장기적으로 지속되어 혹 한국 경제가 파탄이라도 난다면 저런 곤경과 기근이 우리에게도 닥치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인간 존엄이 우리의 의지, 자존감, 그리고 "기억"에 달려 있음을 여러 번에 걸쳐 강조합니다. 제가 찾은 대목만 해도 p30, p38, p59, p70입니다. 어떤 상황에 처해서도, 또 누가 우리의 굴욕을 강요해도, 우리는 자유 의지를 갖고 단호하게 그에 대해 No라고 말해야 한다는 점, 우리의 자존은 우리 스스로가 지킬 때 비로소 처음부터 있던 게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작품은 SF 형식을 띱니다. 이해하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지만, 사건 위주로 진행되기보다 사건과 사태에 처한 인물들의 처절한 감정 표백이 주된 내레이션이라서 어떤 독자들은 갈피를 조금 잡기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책 뒤에는 다른 평론가분의 "해설"이 딸려 있습니다. 물론 해설의 주된 이유는 (위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이 이야기가 그저 SF로 읽힐 게 아니라 "난민 문제 등 현재의 모순을 살아가는 우리의 사정"임을 강조하는 데 있겠습니다만.

"니키라고? 그 이름은 어쩐지 여자 같습니다만." 그러나 반다는 자신이 니키임을, 최소한 니키의 기억 상당부분을 머리에 짐졌음을 자각하고 이에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반다는 니키이고 니키는 반다인데, 그 니키는 이제 도라가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가 존재와 기억을 바꿔 살게 된 건 물론 누가 총칼로 강요한 건 아닙니다만 사실상 체제가 개인을 한계 상황으로 몰아 넣은 결과입니다. 결국 그들은 현재가 만족스럽든, 아니면 만족스럽지 못한 현재를 약이나 전자파의 효과로 망각하며 연명하든 간에, 자존을 포기하고 짐승 같은 삶을 꾸려 나가는 셈입니다.

p24에는 화성인들, 즉 지구인들을 천시하는 "주류 계급"의 머리형이 타원형으로 뾰족하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그리고 기억을 팔아넘기곤 도라로 탈바꿈한 니키 역시 머리 모양이 어느새 그리 바뀐다는 암시도 있죠. 이런 이미지는 예전 코미디 영화 <콘헤드 대소동>이 잠시 생각나는 대목이었습니다.

p14, p21에는 그저 감옥에 갇혀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하에, 순간의 고통을 망각하고 현실 도피를 꾀하는 수용자들의 모습이 나오는데 마치 불교 설화 "호랑이에게 쫓겨 벼랑 끝에 매달린 통에 잠시 산딸기의 달콤한 맛을 보는" 이야기가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흥분지수의 단위는 pp요, 온순행동지수의 단위는 qrp인데, p54, p62에 각각 나옵니다. 단위가 통일되었으면 어땠을지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생소한 말도 많이 나오는데 비록 짧은 소설이지만 용어집 같은 게 있어서 독자의 이해를 도모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p33에는 무소르기 미후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아마 가상의 예술가인가 보죠? p13, p62에는 "데스트 이블"이라는 재앙의 이름이 언급되는데 작품 내내 끝까지 설명이 없어 궁금했습니다. 물론 몰라도 맥락 이해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p54에는 "전에 다리를 다쳐 본 적이 없는지 목발 짚는 게 서투른" 모습이 나오는데 사실 다리를 목발 짚을 만큼 다쳐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이 더 많을 겁니다. 아마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혹독한 환경을 암시하는 듯도 하고요. p67에는 화성인의 사고로 "지구인은 사고가 복잡하기는 하나 필요한 과제에 집중 못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화성인은 아니지만) 영화 <프레데터>의 외계인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아마 그들이 보기에 인간이란 경증 주의력 집중 장애 환자이거나 정신 병자일 지도 모르겠네요.

p90에 나오듯 결국 사람들에게서 기억을 뺏는 행위는 영혼을 침탈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영화 <토탈 리콜>에서도 인물들이 그렇게 맹렬히 저항하는 거죠. 혹, 난민이거나 소수 인종 출신인데 주류 사회에 착실히 적응해서 (미국의 콘돌리자 라이스 전 장관처럼) 본래부터 그들인 양 행동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도라/니키"처럼 영혼을 판 인간들일까요? 어떻게들 생각하십니까? 모를 일입니다. 답하기가 쉽지 않을 듯하죠?

책은 시집처럼 예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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