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시간여행자를 위한 문명 건설 가이드 - 인간이 만들어낸 거의 모든 도구와 기계의 원리
라이언 노스 지음, 조은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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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모든 것이 0으로 돌아간 상태, 즉 그라운드 제로에서 새출발을 하라면 참 상상만으로도 막막합니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우리는 선조들이 일궈 놓은 문명의 혜택에 대해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먼 과거까지 거슬러올라갈 것도 없이, 우리 동시대의 전문가들이 제공하는 편익은 또 어떻습니까. 내가 할 줄 모르는 걸 어떤 타인이 모르는 저 먼 구석에서 그의 재능을 발휘하는 중이기에 나의 편리, 나아가 나의 생존이 가능한 법 아니겠습니까. 사자나 호랑이 같은 맹수는 자신의 능력만으로 잘도 정글에서 살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혼자 힘으로는 일상의 영위조차 어렵습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시간 여행이 혹 가능하다 가정하고 전혀 연고가 없는 시간대에 뚝 떨어졌을 때, 특정한 기술이나 장치, 노하우가 아직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를 재현할 것인지를 염두에 두고 흥미롭게 독자를 가이드하는 내용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건 참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게 결코 당연하지 않았다는 것, 맨땅에서 하나하나 지어올라간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환경과 타인에게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거겠죠.

감자는 유럽인들에게 "악마의 작물"이라 불렸는데 그 이유는 성경에 이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정도는 저도 어려서부터 읽은 바가 있는데, 이 책에서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도들 사이에서 특히 그리 받아들여졌다는 점 또 처음 알았습니다(또 그 이유에 대해서도 더 재미있는 이유를 저자는 제시합니다). 감자의 발견(감자 입장에서 전혀 "발견" 같은 게 아니겠으며 인류 그룹을 놓고도 유럽 대륙 거주자였던 이들에 한정하여 타당하겠지만)이 특히 농민들에게 축복이었던 이유는, 익히지 않고 먹을 시 독성이 남아 있어 여타의 동물에게 먹거리로 부적합했다는 서술이 있어 흥미로웠습니다. 각주에서 보노보 원숭이라는 예외가 있기에 "거의 다"라고 말했다는 문장에서 저자의 위트가 느껴집니다(사실 이 대목뿐이 아닙니다만).

인간은 많은 동물을 길들여 아예 다른 종으로 바꿔 놓았다는 이유에서 참 놀라운 동물이기도 합니다. 종의 탄생과 진화는 그저 자연의 섭리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 같은데 말이죠. 개나 고양이는 다른 가축과 달리 자발적으로 인간에게 다가온 점이 특이한데, 그 중에서도 고양이는 "1) 인간에게 뭘 바라지 않고도 유익한 봉사를 하며 2) 야생종과 애완용이 유전적 차이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다른 동물과 다릅니다. 사람이 일군 문명도 놀랍지만, 그 문명에 자기들 나름대로 적응하는(혹은, 적응당한) 동물들의 행태도 역시 경이롭습니다.

"죽기 싫으면 반드시 챙겨야 할 영양소" 필수 영양소는 다들 알듯이 탄수화물, 지질(요즘은 용어가 바뀌었더군요), 단백질 등입니다만 비타민 종류는 비교적 최근에 인식되어 여러 종류로 분류되었고 그 효능과 실체에 대해선 아직도 논쟁이 진행 중이긴 합니다. 학자들과 이 책 저자가 특히 강조하는 이유는 이들 비타민이 체내에서 직접 합성이 안 되므로 반드시 외부로부터의 섭취를 요하기 때문입니다. 비타민에 비타민이란 이름이 붙여진 건 비교적 최근이지만 사실 이 영양소에 대해선 고대 이집트인들도 알고 있었으며, 따라서 비타민은 적어도 일곱 번 망각과 재발견을 겪었다는 게 저자의 평가입니다. 발견이라는 게 얼마나 상대적이고 인위적 개념인지 다시 확인 가능하며, 어떻게 보면 이 책의 숨겨진 주제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케플러는 스승 티코 브라헤의 관측 자료을 바탕으로 마침내 행성의 궤도가 타원이라는 걸 알아냈다고 하죠. 궤도가 원이 아니라는 게 성경의 해석(완전무결해야 하는 신의 창조 섭리)에 반한다고도 하지만 사실 타원이기나 하다는 점도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타원 역시 수학 방정식으로 우아한 표시가 가능한 도형이니 말입니다. 측정의 문제는 물리학에서도 가장 처음에 놓이는 단계인데, 이 측정의 문제에 초석을 쌓은 학자들, 선구자들의 업적이야말로 대단합니다. 저자가 말하듯이, 막연히 미지근하다 시원하다 정도의 평가, 느낌으로 일을 진행한다면 얼마나 잦은 시행착오로 고생해야 할지, 상상이 안 가는 문제이죠.

유형적인 기술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책 p375 이후에는 인간의 위대한 발명 중 하나로 "논리"가 중요한데, 이 논리학은 우리 나라에서 그 기초를 중등 교육 과정에서 가르치기도 하고 안 가르치기도 해서 모르는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타인과의견을 조정해 가며 살아야 하는데, 그저 목소리만 높이면 다인 줄 아는 사람들, 혹은 자신이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유명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 무조건 진리인 줄 아는 사람들 때문에 합리적 공동선이 추구되지 않는 현실이 그저 답답할 뿐이죠. 고도의 기술이 발전하면 뭐하겠습니까. 멍청하고 열등감 가득한 인간들이 사회에 뭐 하나 기여는 못할망정 훼방 놓는 거 하나는 확실하게 해 내며 진보를 가로막는다면 다 죽는 길 외에 다른 결과가 어디 있겠습니까. 논리를 "발명" 중 하나로 꼽은 저자의 혜안이 대단하며, 보통 과학사학자들의 저작에서 간과되기 쉬운 이슈를 잘 다뤘다고 생각합니다. 기술만능주의는 정답이 아니며, 어떤 영역에서도 메타적으로 기능하는 장치가 하나 더 마련되어야 합니다.

정말 시간 여행이 가능해지기라도 해서 엉뚱한 데서 길을 잃기라도 한다면, 부족하나마 이 책 한 권은 꼭 챙겨야 할 것 같습니다. 하다못해 이 책에 실린 "각도기" 도면 하나도, 우리가 초등학생 때부터 요리조리 갖고 놀던 흔한 물품이지만 간단한 건조물 하나를 만들거나 정확한 마름질을 위해서 꼭 필요한 도구이며, 이것 하나를 쓰고 안 쓰고에 따라 엄청난 오차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이 책에는 여러 명언들이 인용되었는데, 그 출처를 놓고 (물론 원 발화자와 함께) "당신"을 병기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시간대에 떨어졌을 경우 아무도 모르고 아무도 여태 그 말을 하지 않은 상황에서 내가 그 고안자, 저작권자인 양(저작권이란 말도 없겠지만) 잘난 척하며 내세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또 우리는 이미 이런 선구자들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았기에 우리의 사고, 사소한 직업상의 업무 수행 하나하나가 다 이들의 도움을 받아 행해지는 거죠. 우리는 앞선 기여자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겠고, 한편으로 이런 기여를 미세하나마 루틴 속에서 재현, 재생하는 중이라는 점도 새길 만합니다. 내가 하는 게 내가 하는 것일뿐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빌려 다시 활동 중이라는 뜻입니다. 이게 바로 연속성을 지닌 문명의 속성입니다. 그 연속성 밑에 도도한 시간이 깔려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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