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살인자에게 무죄를 선고했을까? -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12가지 충격 실화
페르디난트 폰 쉬라크 지음, 이지윤 옮김 / 갤리온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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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대법원은 살인에 대해 "한 명 인간의 목숨은 전 우주보다 무겁고 소중한 것"이라 판시하며 이러한 목숨을 앗는 행위는 어떤 명분, 핑계로도 합리화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낸 적 있습니다. 우리뿐 아니라 어느 나라의 법원, 법체계도 살인에 대해 대개는 극형을 선고하지만, 다만 사형 자체가 야만적이라는 이유에서 살인범의 목숨을 뺏는 처사만은 자제하는 분위기입니다. 살인자에게 사형으로 응답한다면 원시적인 동해보복(同害報復)에 다름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살인이라는 무거운 죄를 지은 이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건 의아하게 느껴집니다. 허나, 그런 판결을 내리기까지 판사도 얼마나 많은 연구와 고뇌를 거쳤을까요? 이 책은 얼핏 상식으로 이해가 안 되는 듯하지만, 따지고 보면 지극히 합리적이었던 "무죄 선고"에 대해 다룹니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X" 독일은 어지간히 선진국이고 시민 의식이 깨어 있는 나라입니다만 아직도 전근대적인 "쓸모" 관념에 여성을 옭아매는 낡은 관행, 심지어 범죄적 인식이 이처럼 드러나기도 하나 봅니다. 영미권에서는 "배터드 우먼 신드롬"이라 해서 특히 남편에게 구타 당하는 여인이 순간적으로 과잉방어를 했다거나 할 경우에 폭 넓게 정상 참작을 해 주는 법리가 있습니다. 범죄자로 몰려 재판정에 선 여인, 그리고 죄인 아닌 죄인이 된 카타리나. "배심원" 카타리나는 어느새 자격을 의심 받는 처지가 되지만 따지고 보면 그녀가 피고인인 여성에게 완전한 동질감, 공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죄"밖에 없고, 이 때문에 그녀는 자격 박탈을 넘어 어느새 "죄인(과연 죄인인지도 의문이지만)"과 동일시되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과연 이 배심원의 "자격"을 논할 자격이 있습니까?


"그리 심각한 건 아닙니다." 이 책에는 유독, 엄연한 범죄이고 위법이지만 "심각한 건 아니라"고 둘러대는 정황이 자주 나옵니다. "그 정도는 참고 살아야지" 따지고 보면 이런 정황은 대개 다수에 의한 폭력적 동화 노력에 가깝습니다. 독일 헌법은 유명한 학자 R 스멘트에 의하면 "동화적 통합"을 지향한다고 하는데, 설득과 동의가 없는 통합은 그저 나치 식 폭력에 지나지 않습니다. 개인의 자유 의사를 침해하는 그 모든 압박은 따지고 보면 심각한 겁니다. 심각하지 않은 게 어디 있습니까? 슐레징거 변호사가 기발한 착안을 하여 의뢰인의 무죄를 증명한 사건에서, 알고 보면 "심각한 건데 심각하지 않게들 본" 그 무엇으로부터 결국 진실을 꿰뚫어 볼 수 있었던 거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할 지 잘 모르겠네요." 많은 이들이 이런 고민을 할 때에는 대개 현실적 이익 몇 가지 옵션을 놓고 고민하는 겁니다. 이롭긴 한데 썩 끌리지 않는 선택도 있죠. 이때 영화에서는 보통 그런 충고가 나옵니다. "(이로운 일 말고) 올바른 일을 하시오." 설령 나중에 결과가 (나한테 큰 이익을 못 주었기 때문에) 후회되더라도, 결국 난 올바른 일을 했다며 뿌듯하지 않겠냐는 겁니다. 나는 정당방위라고 확신했는데, 알고 보니 착각인 경우를 오상방위라고 하며 요즘 모 법대 교수님의 과거 일화 때문에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더 유명해진 개념입니다. 여기서 "착각한 정당방위" 개념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판사의 선고 중에 나옵니다. "당신은 복수와 정의의 실현을 혼동했던 겁니다. 당신은 복수가 곧 정의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비열한 동기의 발현일 뿐입니다." 그러나 요런 법리를 악용하여, "나는 너에게 가해를 했지만 너는 복수를 해서는 안 돼." 같은, 아주 야비하고 유아스러운 합리화를 시도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자에게는 그에 합당한 응보가 또 준비되어 있죠. 물론 법질서 안에서 행해져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아무리 나쁜 짓이라도 "같은 행위로 두 번 처벌 받아서는 안 된다."는 법리가 있습니다. 이걸 우리나 독일 법제상으로는 "일사부재리의 원칙"이라 하며, 영미에서는 좀 다른 범위를 잡아 "이중 위험의 금지"라고 일컫습니다. 예전에 애슐리 저드, 토미 리 존스 주연의 영화 <더블 크라임>에서 이 주제를 다뤘죠. 슈트렐리츠는 "그저 잡범"으로 석방됩니다만 과연 변호사 말 대로 운이 좋았을 뿐일까요? 독자인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책에는 일반의 상식으로 틀림 없이 유죄인 피의자, 피고인 들의 예가 12가지 나옵니다. "왜 살인자에게 무죄를 선고했을까?" 살인자에게 무죄를 선고하면 안 되는 거죠. 무죄가 나온 이유는, 1) 살인자가 알고 보니 아니었거나, 2) 도대체 이런 경우도 "살인"으로 봐야 하는가 하는 진지한 의문 때문입니다. 살인자로 취급 받아서 안 될 사람이 살인자로 몰려 극형을 받을 뻔한 사건들에서 가장 큰 책임은 누가 져야 할까요? 정황만 보고 대충 범인으로 몬 뒤 편한 희생자(easy victim)로 몰아간 경찰(실제로 독일 경찰은 선진국인데도 무책임하기로 악명 높습니다. 가 본 분들은 알죠), 그리고 대중 심리에 휩싸여 마녀 사냥에 동참한 우리들 일반인의 잘못입니다. 12가지 이야기를 읽어 보면, 정말로 그런 격언이 떠오릅니다. "장난 삼아 던진 돌에 개구리는 억울하게 죽을 수 있다."


"왜 살인자에게 무죄가 선고되죠?"

"그가 살인자라는 걸 당신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전지전능한 신이라도 되나요? 함부로 타인을 단죄하는 당신이 바로 범죄자에 가깝다고는 생각해 본 적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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