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가의 질문
박영준 지음 / 북샾일공칠(book#107)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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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건 신(이라고 불려야 마땅할 극소수의 인간)에게나 가능한 과업입니다. 무에서 유는커녕, 유에서 유를 만들어내기도 어렵고, 어쩌면 유에서 약간의 유를 까먹지나 않고 유지한다는 것도 요즘 세상에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지나 모르겠습니다.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가진 돈을 얼마나 잘 굴리냐의 게임입니다. 돈을 굴리겠다고 빌려갔으면 이자를 치러야 하고, 물건이나 시설을 사용하면 그에 상응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봉건사회와 달라진 면이 있다면, 사회 활동에 참여하는 개인들이, 그저 현상 유지나 하며 유유자적할 여지를 거의 용납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대개 농민들에게 가혹한 지대와 부역이 착취되었던 배경은, 외부로부터의 위협(생명, 재산, 신체의 자유)을 지켜주는 대가(對價)가 있어야 하지 않냐는, 보호자를 자처하는 영주들이 내세운 명분이었죠. 안정된 시스템의 영속이 전혀 내일을 담보할 수 없던 세상, 언제 외적이 침입해 애써 가꾼 소출을 잿더미로 만들고 처와 자녀의 안위를 해칠지모르는 상황에서, 어쩌면 차변과 대변이 그럭저럭 균형을 맞추는 거래였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이러던 무법천지가 지금 개명된 세상을 맞이하여 저처럼이나 안정을 찾은 게 기적일지도 모릅니다. 기록되지 않은 부분은 물론, 기록된 부분만 살펴 봐도 어떻게 이런 미친 폭력과 혼란상을 극복하고 여기까지 문명이 버텨왔는지가 놀라울 뿐입니다(서로 싸우다가 일찌감치 다 자멸해 버린 게 아니라). 그러니 테러리스트라든가, 국가 간 무력 긴장이 고조되는 국면이 있어도, 지난 수천 년의 역사상에 비춰 볼 때 이만큼이라도 평화가 유지되긴 하고, 간헐적 혼란이 발생한다 쳐도 불가피한 면이 있겠거니, 혹 내가 작은 힘이라도 보태어 모두가 편해지는 길에 조금이라도 빨리 다가설 수는 없겠는지, 건설적 사유와 고민을 해야 그게 인간의 도리겠습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만 비즈니스와 일상 경쟁의 장(場)도, 벌써 평온한 영역나눔이나 상생의 판이 실종된지는 오래입니다. 사방천지가 다 레드오션이며, 정코스를 걸어서 지갑을 채우려는 생각은 딴 우주의 생명체나 먹을 법한 한가한 발상입니다. 블루 오션은 패러다이스가 아니라, 거기에 도달하기까지 생명을 걸어야 할 험난한 미션일 뿐입니다. 도달한다고 끝이 아니라 그 텃밭을 지키는 데에도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이처럼 경쟁이 치열한 현황에서, 과연 누가 살아남고 승자의 여유를 즐길 수 있을까요?

안정적으로 자신의 진로와 수입원을 지킬 수 있었던 미온적 경쟁만이 진행되던 때에도, 구태여 큰 모험을 하며 미개척의 시장을 넘보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무리수를 둬 가며 분수에 넘는 과한 투자를 일삼는 것도, 지난시절 그런 선구자(...)들이 대성공을 거둬 그 자녀들에게까지 거대한 부와 자산을 물려준 사례를 보고 자극을 받아서인 면도 있습니다(근본적 이유는 그런 개인적 팩터보다, 자본주의 자체의 무한 경쟁 유발 구조 때문). 억을 가진 자는 조를 내다보는 게 당연한 생리이죠.

제로원이란 말 그대로 "제로"에서 "원"을 만드는 도약의 첫단계를 지적하는 개념입니다. 어떤 이들은 "제로에서 원을 만드는 게 아무리 놀랍다고 해도, 이미 원헌드레드를 가진 이가 투헌드레드로 가는 게 훨씬 쉽고, 결과면에서 200배의 차이가 나지 않는가? 물론, 무한대의 격차를 유한한 수로 줄였다는 게 대견하긴 해도." 처럼 반론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맞긴 한데, 저자의 관점대로라면, 이런 사고야말로 현재의 덫에 걸려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고착적 시야의 맹점입니다.

사물은 어떤 특정 지점에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추세라는 게 있습니다. 현재의 지점이 높아도 구조가 부실하고 내면이 위태롭기에, 급강하의 곡선을 탈 운명만 남은 경우가 있고, 맹렬히 exponential curve를 타며 상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뉴튼의 업적은, 거리(s)만 재고 끝났던 과거와 달리, 그 거리를 장기간에 걸쳐 축적한 속도(v)라는 인자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아냈으며, 그에 그치지 않고 다시 속도를 쌓아올리는 가속도(a)의 속성까지 파고들어 실체를 규명했다는 것입니다. 리먼 사태때도 추세를 일찌감치 주목하여 대재앙의 도래를 예측한 이들은, 손해를 최소화하며 파국을 남들보다 미리 떨어내었을 뿐 아니라,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이들로부터 막대한 이익을 챙기기까지 했습니다.

제로원의 breakthrough를 한번 맛을 본 경제주체는, 그 추세를 이용하여 타 분야에서도 남들을 훨씬 상회하는 성과를 거둡니다. 에컨대 이건희씨 같은 경우,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그의 기업이 한국 내에서조차 2인자에 머물렀다는 냉엄한 사실을 우리는 종종 까맣게 잊곤 합니다. 시야가 국내에 머물러 있으니, "그때 2등하던 이들이 지금은 1등하는 것 아냐?"처럼 안이하게 정리하고 마는 건데, 사정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뭐 고작 그렇게 본다고 쳐도, 알고보면 20등과 10등의 차이보다, 1등과 2등의 실력 차가 더 큰 법입니다. 20등은 바짝 분발하면 3등도 4등도 할 수 있지만, 2등은 가진 모든 것을 다 쏟아부어도 1등을 추월 못 할 수도 있습니다).

세계로 시야를 넓혀 보면, 등수 안에도 없던 기업이 어느 시점부터 탑텐을 오르내리는 현상은, 예컨대 1980년대에 활약하다 지금은 이세상 사람이 아닌 몇몇 일본 기업인들이 목도라도 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일 뿐 아니라 있어서도 안 될 일"이라며 쇼크사로 두번째 죽음을 맞이할 만한, 극히 예외적인 prodigy입니다. 우리는 남의 성취에 대해, 그저 배아픈 마음에 아예 실체를 외면하고 너무 가벼이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진정한 제로원 모범 사례는, 현상에 얼마든지 안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고, 모든 걸 걸고 다른 차원의 도약을 성공시킨 이건희 같은 인물입니다. 이 사람은 한국에서 넘볼 자가 거의 없는 재벌가의 2세였다는 점을 상기해 보십시오.

그렇게 한번 몸에 밴 체질과, 영감을 상시화하는 능력은, 이제 다른 분야에 전이되어 폭발적 생산력을 추동할 수 있습니다. 이 역시 생의 단 한순간이라도 체험을 해 본 이라야 공감할 수 있는 주문들입니다. 전에 겪지 못했던 성취를 해 내고 온몸이 전율하는 느낌은, 다시 그 느낌을 찾기 위해서라도 사람으로 하여금 목표에 온전히 정진하게 만듭니다. 조직에서 성과를 내고 인정을 받으며 만인의 부러움을 산 채 단상에 오르는 나를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경쟁에서 승리한 자만이 맛볼 수 있는 원초적 쾌감은, 정글에서 전력질주하여 경쟁자를 따돌리고 맨 먼저 먹잇감의 따스한 육질을 물고 입가의 피를 핥는 사자의 긍지에나 비길 만합니다. 이미 백을 가진 자라 해도, 편안히 200과 300을 바라기보다, 뜻밖의 미개척지에 알몸으로 달려들어 보는 편이, 장기적으로 자신의 밑천을 더 굳건히 지킬 수 있는 길입니다. 공격은 최상의 방어이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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