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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 일본 제국을 뒤흔든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 옥중 수기
가네코 후미코 지음, 정애영 옮김 / 이학사 / 2012년 4월
평점 :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 이책은 옥중 수기인다 , 일본인 여인 ( 가네코 후미코 ) 이고 매우 짧은 고난과 고통의 생애를 살다가 23 세의 나이로 형무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본 여자, 그 녀 스스로의 짧은 자서전인 셈이다..
[ 가네코 후미코(일본어: 金子 文子 , 1903년 1월 25일 ~ 1926년 7월 23일)는 일본의 무정부주의자로, 한국의 독립 운동가인 박열의 부인이었다. ]
아래 독립운동가 박열의 일본인 아내 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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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朴烈, 1902년 2월 3일 ~ 1974년 1월 17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박준식(朴準植)이다.[1] 아나키스트 운동가로 활동하다가 광복 이후에는 우익 노선으로 전향했다. 광복 이후 일본에서 결성된 한국인 교민단체인 재일한인거류민단의 초대 민단장(1946.10 ~ 1949.4)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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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생은 대단히 불운 하다고 밖에 표현 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인 듯 하다 . 책을 읽은 내내 10세도 안된 여아가 감내 하기 에는 너무도 불쌍하고 가녀린 사연들이 가슴을 후벼판다... 그녀의 일대기 요약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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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가나가와 현 요코하마 시 출생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모두 양육을 거부당해 출생신고가 되지 못했던 그녀는 무적자(無籍者)라는 이유로 학교를 제때 다니지 못하는 등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 자랐다. 일본의 친척집에 맡겨져 자라던 중 1912년에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에 살고 있던 고모의 집에 들어가 할머니의 학대를 받으면서 약 7년간 조선에서 살며 부강심상소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그 동안에 3·1 운동을 목격한 뒤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를 확인하고 이에 동감하게 되었다.
1919년 일본으로 돌아왔으나 어머니는 여전히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고 있는 불안정한 상황에서 어머니가 자신을 술집에 팔아넘기려 하자 혼자 도쿄의 친척집으로 올라와 신문배달, 오뎅집 점원으로 일하면서 영어 교습소에서 공부했다. 이때 사회주의자들과 만나 교류하면서 이들의 영향을 받게 되어 무정부주의자가 되었고, 1921년에는 도쿄에 유학한 한국인 사회주의자들과도 알게 되었다. 1922년 박열과 만나 동거를 시작했으며, 흑도회와 흑우회에 가입하고 기관지를 함께 발행하는 등 그와 뜻을 같이 하게 되었다.
1923년 박열과 함께 아나키즘 단체인 불령사를 조직했는데, 그해 가을 관동대지진이 일어나면서 보호 검속 명목으로 연행되었다. 그는 일왕을 암살하려한 대역죄 명목으로 1926년 사형 판결을 받았다. 일본 내에 시신을 거둬줄 사람이 없어서 박열과 옥중에서 결혼서류를 작성하고 서류상 박씨 집안의 사람이 되었다.[1] 며칠 뒤 무기징역형으로 감형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우쓰노미야 형무소에서 끈으로 목을 매어 자살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옥중에서 서류상 결혼을 했기에, 박열의 형이 유골을 인수하여 고향인 문경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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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부터 무적자 였기 때문에 제대로된 교육을 받지 못하엿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라도 읽고 배우려던 그녀의 뭄부림은 안타카움을 자아 낸다... 우여 곡절끝에 조선의 외할아버지의 호적에 적을 두고 지금의 충북 청원 , 부강리의 고모집의 생활은
그야 말로 노예 이하의 대우를 받은 것으로 묘사 된다.... 할머지가 일본에서 데리고 올때는 정식 입양을 시겨서 정규 교육도 시기고 나름 잘 키워줄 것을 약속 했으나 조선 땅에서 그녀가 받은 것은 허름한 무명 저고리 하나에 몇년 세월에 바삭 말라버린 육신과 피폐 헤진 정신 이다... 일본으로 돌아온 그녀는 온전치 못한 집안 사정으로 고학생의 길을 가고자 토쿄로 무조건인 탈출을 시도 하지만 도시에서의 생활 또한 고난의 연속, 신문배달 , 가루 비누 행상 , 식모살이 ,노점등 안해 본것 없이 몸으로 부딛히며 세상을 이겨 나가는 동시에 스스로도 사상의 열림에 눈뜨게 되엇고 이러한 고학생의 과정속에서 만난 아나키스트의 사회주의 동지인 박열과 그들의 모임인 < 흑도회> 이다.. 처음 사회주의 사상에 점차 몰입 하는 그녀는 이러한 사상으로 무언가 역사를 바꿀 , 그래서 힘없는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걸고 서라도 지켜 져야만 하는 당위성을 가지고 권력 계급에 대한 투쟁의 운동을 모색 하지만 , 결국 이러한 권력 이동을 통해서도 지배 하는 자와 지배 받는 자의 이분 법적 구조는 혜어 날수 없다는 것에 절말 하고야 만다... 마치 자신의 지난 20여년의 고난과 고통의 세월이 아무리 해도 바뀌어 질 수 없는 굴레와도 같다는것을 인식한 순간 철저히 자유주의적인 개인 주이적인 아나 키스트로서의 일본 제국주의 , 천황제의 폐지에 대해서도 반기를 들게 되고 이러한 일련의 행동과 준비 과정에서 1923 년 , 천황 폭탄 살해 입수 계획이라는 ? 계획이 발각되어 박열과 함께 사형 언도를 받게 된다...
-베르그손
-스펜서
-헤겔
-슈티르너
-니체 등
그 당시 그녀가 절박 하였던 상황에서도 정신적 , 사상적으로 의지 하였던 철학, 사상가들의 이름이다. 그중 특히 [ 슈티르너]에게서 정신적 영도를 받았다고 전해지는데 그의 이력은 잠간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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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카스파르 슈미트(Johann Caspar Schmidt, 1806년 10월 25일 - 1856년 6월 26일)은 필명인 막스 슈티르너(Max Stirner)로 더 잘 알려진 프로이센의 청년 헤겔학파 철학자였다. 그의 철학은 허무주의와 개인주의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로 분류되기도 한다.
요한 카스파르는 독일 바이로이트의 신교도 집안에서 태어났다. 1807년 플루트 장인이었던 아버지가 결핵으로 사망하고 어머니가 약사 발레슈테트(Ballerstedt)와 재혼하자 그를 따라 프로이센의 쿨름으로 이주했다. 1818년 요한 카스파르는 고향으로 되돌아와 대부의 집에 살면서 김나지움에서 교육을 받았다. 1828년부터 1835년까지 에를랑겐 대학, 쾨니히스베르크 대학, 쿠르수스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베를린에 정착했다. 1835년 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해 학교에서 라틴어 대리 교사로 생활했다. 1837년 아그네스 클라라 쿠니군데 부츠(Agnes Clara Kunigunde Burtz)와 결혼했으나 다음해 출산중 죽었다. 1844년까지 베를린의 사립 여학교에서 일했다. 1843년에 마리 빌헬미네 댄하르트(Marie Wilhelmine Dähnhardt)와 재혼했다. 1845년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썼으며 낙농업에 뛰어들었으나 실패하여 아내에게 버림받고 부채로 두 차례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다. 1856년 벌레에게 물린 후 이차 감염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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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꼿 처럼 살다간 그녀 , [가네코 후미코 ]는 그녀의 생애 마지막 몇년간을 진실로 사랑 하고자 햤던 남자 [박열]과의 동거및 생활에서 과연 행복 하였을까 ..... 향년 23 세의 ,,지금이라면 마악 대학생의 티를 벗어난 사회인으로 첫발을 내어 디딜 그럴 청춘의 나이에 차디찬 형무소의 한켠에서 자신의 생을 스스로 마감해 버린 ( 이부분은 아직 논란이 분분 하다고 함) , 그녀의 정신 사상 한켠에는 어떤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았을까 ,, 지독히도 헐벗고 , 때로는 학교 교육에도 강제로 배제되고 식사 마져 3-4 일을 굶겨 가면서 학대 받은 그녀의 어린 시절의 마음은 결고 가족이나 집안이라는 따스한 울타리를 느끼기에는 너무나도 거리가 있는 그림일 터이다... 1910 년이면 한일 합방이 되던 해이다... 일제가 조선의 침략야욕의 정점을 찍고 문서로서 합병의 야욕을 드러낸 그 시절엔 일반 민초들 모두가 불운 하고 , 고통 받고 ,억압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한 사회, 가족사적인 배경또한
그녀의 니힐리스트 혹은 아나키스트 적인 의식 구조가 싹트고 발현 하는데에 일조를 하였는 지도 모른다... 일본 신민으로서
반도의 사나이 , 어쩌면 적대시 하는 조선인 [박열]과의 아무 꺼리낌 없는 사랑의 맹세 앞에는 그 시절이 19세기 였다는 것이 믿어 지지 않을 뿐이다... 그녀의 옥중 수기에 의하면 거구로 박열에게 프로프즈 한것으로 되어있는 데 중요 질문은 3 가지로 요약 된다...
" 당신에게는 배우자나 연인 이라고 할수 있는 사람이 있나요 ? " 만약 있다면 나느 당신과 단지 동지로서만 교제 해도 상관 없습니다만 .. 어떠 신가요 ..
" ..저는 일본인 입니다.. 그러나 저는 조선인에 대해 달리 편견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나에게 반감을 가지고 계신가요 ?
" 당신은 민족 운동가 입니까 ? ' 나는 조선인이 아니어서 조선인처럼 독립운동을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만약 독립 운동가라면 유감 스럽지만 나는 당신과 함께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
박열은 이에 대해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이야기 하였고 그 후로 둘이는 동지가 되었다.. 그녀가 단 한번에 반한 박열의 시 [ 개새끼 } 이다..
개새끼 - 박열 -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것 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1922 년 2월 일본 유학생들이 펴년 잡지 < 조선 청년> 에 실린 그의 글을 본 직 후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 하기전 약 1 여년에 걸친 불꽃 같은 사랑을 하지 않았을까 .... 그렇다면 아마도 내세에서는 조금이라도 더 긴 행복의 여운을 찾았기를 바라마지 않겠다...... 지금은 자신의 고향이 아닌 조선의 땅 문경 의 어느 지역에 박열 기념관 옆쪽에 그녀의 묘소가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2013/ 8/4 일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날 , 그와 같은 사회주의자 아니 아니키스트들의 혁명적 사상들은 어떤 제 각각의 배경을 가지고 그 당시 사회와의 대립과 소통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 한번 생각 하게 만드는 묘한 책 이었습니다.... 책력거99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