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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근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소영 옮김 / 살림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비정근 ] - 히가시노 게이고 , 일본 추리 소설물의 거장 이라고 할수 있는 저자는 1985년 에드가와 란포상의 추리물 수상작을 시작으로 문단에 데뷔한다...2013년이 올해이나 약 30년에서 2년 덜 채운 28년간 직업적 글짓기 작가 이다..

 

이작품 또한 그의 초기에서 중기로 넘어 가는 시절 (1997 ) 작품이라고 는 하나  짧은 단편마다 저마다의 추리물로서의 예리함이 담겨져 있다..  아래는 이책의 목차이자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쥐어주는 키 워드 들이다...

 

제1장 6×3
제2장 1/64
제3장 10×5+5+1
제4장 우라콘
제5장 무토타토(ムトタト)
제6장 신(神)의 물

 

언뜻 보면 의미없이 넘어갈 듯한 소재, 눈에 우연히 뛰나 결정적인 단서가 되기도 하는 [ 숫자 풀이] 에 대한 저자의 관찰력은 남달라서  글 도입 초기부터 독자들의 집중력을 분산 시키지 않는다...

 

주인공 기간제 교사는 [나]는 무척 개인주의 이다.. 미스터리?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인 20  대 중번의 나는 또한 냉소적이다...

정해진 시간에 일을 하고 월급을 받고 나만의 생각을 방해 받지 않기 위해 [ 기간제] 교사를 자청 하여 하기 싫지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웬만한 구설수나 정규직 교사들 수준에서 감당 하여야 하는  학부모 상담이나 아이들 교육 상담 , 왕따 상담 민ㅊ 교장 , 교감 눈치 보기등 이러한 것을 싫어 하는 내가 마추친 현실은 하나같이 사건 투성이이다... 

 

출근한 첫 날 초등학교에선 의문의 살인 사건이 발생 한다.. 여자가 죽었고 체육관에 있는 정황으론 학교에 원한이 있는 어떤 사람이 침입하여 우연을 가장한 살인 인듯 하나  바닥에 씌여져 있는 숫자가 진실을 말해준다.. ~~

 

두번째 토막 또한  1/64 라는 숫자를 들고 나왔다.. 그 다음 발령받는 기간제 학교에서의 우연찮게 발생한 지갑 도난사건은 피해자가 하나가 아니라 공교 롭게 둘이고 그 중 하나는 뻔하게 돈이 없어 보이는 아이일 뿐이다... 업치락 뒤치락 사건 전개를 하지만 미궁에 빠져 가는 어느 시점 아이들만으로 계 모임같은 것을 해서  스포츠 내기 게임을 하는 룰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사건의 해결은 일사 천리이다...

 

세번째 토막이야기 또한 칠판에 적혀진 숫자와 ( 10x 5 + 5+1 )   투신 ? 자살한 듯 보이는 남자 교사의 이야기이다...  구두는 벗겨진 상태 였으나 가지런 하지 않은 점이 예리한 수사물의 현장 형사와 닮아 있다..   겁에 질린 아이들은 아무런 애기도 하질 않고 ..  우연히 알게된 ' 카나리아' 새의 죽음과  교사의 죽음사이의 연관성이 지어 지는데 ..... 

 

작가만의 상상력이랄까 , 학교, 학생을 상대로한 교사의 시선에서가 아니라 아이들의 시선에서 사건 사고를 재구성해 나아 간다는 점이  놀라웁다... 그래서 일반적인 추리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 특정 이밴트도 아이들의 시선에서 바라보면 고개가 끄덕여 지고 연민이 가기 가지 한다... 이때  기간제 교사  [나]는 아이들을 심하게 꾸중 하지 않는다 .  오히려 정의감을 불러일으키고

세상은 그래도 따스한 것이란 온정을 불어 넣어 주고자 애쓴다....

 

지금의 한국에서도 학교에 관련된 사건 사고들이 많다 . 그중 많은 것들이 학교 폭력이나 , 자살 , 왕따 등의 사회성 결여 행동 등이다.. 이에 덧붙에 ADHD 라는 행동 과잉 장애 또한 문제의 일부분을 차지 하기도 한다..

 

소설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 현장의 사실들에 방관자로서 자리매김 하고 있는 기간제 아닌 정교사 , 사건을 무마 하려는 교감,

학교의 권위가 떨어질까봐 체면을 더 중요시 하게 생각하는 교장 등의   일본?의 일그러전 자화상이 보이는데 우리 나라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아이들의 죽음은 한낱 억울한 죽음일수도 있는데 ,  사회적으로 부각되는덧을 너무도 쉬쉬 한다.. 그러고 나서

똑같은 사건이 터지만 그렇게 똑같은 입막음을 해대고 ....  진실은 가린다고 가리워질수 없음을  책을 통해서나마 간접적으로

보여 준다...

 

[무토타토] 나 [ 신의물] 은 아이들의 세상에서의 왜곡을 보여 준다.. 어른세계와는 다른 그들의 세상이 소중이 지켜 줄수 있도록

길가는 작은 길고양이라도 보살펴 주려는 작은 아이들의 세상을 어른들이 짓밟지는 말아 주었으면 간절함이 생겨 난다...

 

[말못한 고민들] 이 많은 십대나 초등 학생들에겐  팔둑은 점 하나에도 친구들의 놀림이 신경스럽고 온세상이 무너저 내린다..

달리기 못하는 아이들은 운동회날이 즐겁지 못하다... 꼴지해서 챙피 해서 이다...  

 

이렇듯 더 많은 문제들이 있었겟지만 한정된 지면에 예의 날카로운 추리물로서  인간적인 면모가 오히려 돋보이는 기간제 교사인 [나]는  아이들을 두둔 하거나 [배려]를 해주고 싶다 ,, 교실을 난장판을 만들고  기간제 교사 따위는 우습게 여기는 원숭이 같은 족속들이지만 말이다...   

 

에필로그 ;  각편으로  짧게 구성된 이야기들은 하나의 추리 흐름을 이어 주고 있고  작가적 시점에서 모호한 실마리들을 토대로 하나 하나 퍼즐을 마추어가는 그래서 의외성이 돋보이는 그 만의 ( 하가시노 게이고 ) 개성이 아닌가 생각 됩니다..

 

 

[전체적으로]  간결한 문체와  빠른 글 전개인 반면 몰입과 이해도는 오히려 충실 하다고 할수 있는 역작 이네요 ... 다음번 그의 연속 작품을 읽어 보고자 합니다. ~ 책력거99 글 남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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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 일본 제국을 뒤흔든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 옥중 수기
가네코 후미코 지음, 정애영 옮김 / 이학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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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 이책은 옥중 수기인다 , 일본인 여인 ( 가네코 후미코 ) 이고 매우 짧은 고난과 고통의 생애를 살다가 23 세의 나이로 형무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본 여자, 그 녀 스스로의 짧은 자서전인 셈이다.. 

[ 가네코 후미코(일본어: 金子 文子 (かねこ ふみこ), 1903년 1월 25일 ~ 1926년 7월 23일)는 일본의 무정부주의자로, 한국의 독립 운동가인 박열의 부인이었다. ]

 

 

아래 독립운동가 박열의 일본인 아내 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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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朴烈, 1902년 2월 3일 ~ 1974년 1월 17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박준식(朴準植)이다.[1] 아나키스트 운동가로 활동하다가 광복 이후에는 우익 노선으로 전향했다. 광복 이후 일본에서 결성된 한국인 교민단체인 재일한인거류민단의 초대 민단장(1946.10 ~ 1949.4)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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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생은 대단히 불운 하다고 밖에 표현 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인 듯 하다 . 책을 읽은 내내 10세도 안된 여아가 감내 하기 에는 너무도 불쌍하고 가녀린 사연들이 가슴을 후벼판다...  그녀의 일대기 요약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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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가나가와 현 요코하마 시 출생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모두 양육을 거부당해 출생신고가 되지 못했던 그녀는 무적자(無籍者)라는 이유로 학교를 제때 다니지 못하는 등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 자랐다. 일본의 친척집에 맡겨져 자라던 중 1912년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에 살고 있던 고모의 집에 들어가 할머니의 학대를 받으면서 약 7년간 조선에서 살며 부강심상소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그 동안에 3·1 운동을 목격한 뒤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를 확인하고 이에 동감하게 되었다.

1919년 일본으로 돌아왔으나 어머니는 여전히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고 있는 불안정한 상황에서 어머니가 자신을 술집에 팔아넘기려 하자 혼자 도쿄의 친척집으로 올라와 신문배달, 오뎅집 점원으로 일하면서 영어 교습소에서 공부했다. 이때 사회주의자들과 만나 교류하면서 이들의 영향을 받게 되어 무정부주의자가 되었고, 1921년에는 도쿄에 유학한 한국인 사회주의자들과도 알게 되었다. 1922년 박열과 만나 동거를 시작했으며, 흑도회흑우회에 가입하고 기관지를 함께 발행하는 등 그와 뜻을 같이 하게 되었다.

1923년 박열과 함께 아나키즘 단체인 불령사를 조직했는데, 그해 가을 관동대지진이 일어나면서 보호 검속 명목으로 연행되었다. 그는 일왕을 암살하려한 대역죄 명목으로 1926년 사형 판결을 받았다. 일본 내에 시신을 거둬줄 사람이 없어서 박열과 옥중에서 결혼서류를 작성하고 서류상 박씨 집안의 사람이 되었다.[1] 며칠 뒤 무기징역형으로 감형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우쓰노미야 형무소에서 끈으로 목을 매어 자살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옥중에서 서류상 결혼을 했기에, 박열의 형이 유골을 인수하여 고향인 문경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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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부터 무적자 였기 때문에 제대로된 교육을 받지 못하엿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라도 읽고 배우려던 그녀의 뭄부림은 안타카움을 자아 낸다...  우여 곡절끝에  조선의 외할아버지의 호적에 적을 두고 지금의 충북 청원 , 부강리의 고모집의 생활은

그야 말로 노예 이하의 대우를 받은 것으로 묘사 된다.... 할머지가 일본에서 데리고 올때는  정식 입양을 시겨서 정규 교육도 시기고 나름 잘 키워줄 것을 약속 했으나 조선 땅에서 그녀가 받은 것은 허름한 무명 저고리 하나에 몇년 세월에 바삭 말라버린 육신과 피폐 헤진 정신 이다...   일본으로 돌아온 그녀는 온전치 못한 집안 사정으로 고학생의 길을 가고자  토쿄로 무조건인 탈출을 시도 하지만  도시에서의 생활 또한 고난의 연속,  신문배달 , 가루 비누 행상 , 식모살이 ,노점등 안해 본것 없이 몸으로 부딛히며  세상을 이겨 나가는 동시에 스스로도  사상의 열림에 눈뜨게 되엇고 이러한 고학생의 과정속에서 만난 아나키스트의 사회주의 동지인 박열과  그들의 모임인 < 흑도회> 이다..  처음 사회주의 사상에 점차 몰입 하는 그녀는 이러한 사상으로 무언가 역사를 바꿀 , 그래서 힘없는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걸고 서라도 지켜 져야만 하는 당위성을 가지고 권력 계급에 대한 투쟁의 운동을 모색 하지만 , 결국 이러한  권력 이동을 통해서도 지배 하는 자와 지배 받는 자의 이분 법적 구조는 혜어 날수 없다는 것에 절말 하고야 만다... 마치 자신의 지난 20여년의 고난과 고통의 세월이 아무리 해도 바뀌어 질 수 없는 굴레와도 같다는것을 인식한 순간  철저히 자유주의적인 개인 주이적인 아나 키스트로서의 일본 제국주의 , 천황제의 폐지에 대해서도 반기를 들게 되고 이러한 일련의  행동과 준비 과정에서 1923 년 , 천황 폭탄 살해 입수 계획이라는 ? 계획이 발각되어 박열과 함께 사형 언도를 받게 된다...

 

-베르그손

-스펜서

-헤겔

-슈티르너

-니체 등

 

그 당시 그녀가 절박 하였던 상황에서도 정신적 , 사상적으로 의지 하였던 철학, 사상가들의 이름이다. 그중 특히  [ 슈티르너]에게서 정신적 영도를 받았다고 전해지는데 그의 이력은 잠간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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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카스파르 슈미트(Johann Caspar Schmidt, 1806년 10월 25일 - 1856년 6월 26일)은 필명인 막스 슈티르너(Max Stirner)로 더 잘 알려진 프로이센청년 헤겔학파 철학자였다. 그의 철학은 허무주의개인주의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로 분류되기도 한다.

요한 카스파르는 독일 바이로이트의 신교도 집안에서 태어났다. 1807년 플루트 장인이었던 아버지가 결핵으로 사망하고 어머니가 약사 발레슈테트(Ballerstedt)와 재혼하자 그를 따라 프로이센의 쿨름으로 이주했다. 1818년 요한 카스파르는 고향으로 되돌아와 대부의 집에 살면서 김나지움에서 교육을 받았다. 1828년부터 1835년까지 에를랑겐 대학, 쾨니히스베르크 대학, 쿠르수스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베를린에 정착했다. 1835년 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해 학교에서 라틴어 대리 교사로 생활했다. 1837년 아그네스 클라라 쿠니군데 부츠(Agnes Clara Kunigunde Burtz)와 결혼했으나 다음해 출산중 죽었다. 1844년까지 베를린의 사립 여학교에서 일했다. 1843년에 마리 빌헬미네 댄하르트(Marie Wilhelmine Dähnhardt)와 재혼했다. 1845년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썼으며 낙농업에 뛰어들었으나 실패하여 아내에게 버림받고 부채로 두 차례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다. 1856년 벌레에게 물린 후 이차 감염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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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꼿 처럼 살다간 그녀 ,  [가네코 후미코 ]는 그녀의 생애 마지막 몇년간을 진실로 사랑 하고자 햤던 남자  [박열]과의 동거및 생활에서 과연 행복 하였을까 .....   향년 23 세의 ,,지금이라면 마악 대학생의 티를 벗어난 사회인으로 첫발을 내어 디딜 그럴 청춘의 나이에  차디찬 형무소의 한켠에서  자신의 생을 스스로 마감해 버린 ( 이부분은 아직 논란이 분분 하다고 함) , 그녀의 정신 사상 한켠에는 어떤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았을까 ,,  지독히도 헐벗고 , 때로는 학교 교육에도 강제로 배제되고 식사 마져 3-4 일을 굶겨 가면서 학대 받은 그녀의 어린 시절의 마음은 결고 가족이나 집안이라는 따스한 울타리를 느끼기에는 너무나도 거리가 있는 그림일 터이다... 1910 년이면  한일 합방이 되던 해이다... 일제가  조선의 침략야욕의 정점을 찍고 문서로서  합병의 야욕을 드러낸 그 시절엔 일반 민초들 모두가 불운 하고 , 고통 받고 ,억압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한 사회, 가족사적인 배경또한

그녀의 니힐리스트 혹은 아나키스트 적인 의식 구조가 싹트고 발현 하는데에 일조를 하였는 지도 모른다...  일본 신민으로서

반도의 사나이 , 어쩌면  적대시 하는 조선인  [박열]과의 아무 꺼리낌 없는 사랑의 맹세 앞에는 그 시절이 19세기 였다는 것이 믿어 지지 않을 뿐이다...   그녀의 옥중 수기에 의하면 거구로 박열에게 프로프즈 한것으로 되어있는 데  중요 질문은 3 가지로 요약 된다...

 

" 당신에게는 배우자나 연인 이라고 할수 있는 사람이 있나요 ? "  만약 있다면 나느 당신과 단지 동지로서만 교제 해도 상관 없습니다만 .. 어떠 신가요 ..

 

" ..저는 일본인 입니다.. 그러나 저는 조선인에 대해 달리 편견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나에게 반감을 가지고 계신가요 ?

 

" 당신은 민족 운동가 입니까 ? ' 나는 조선인이 아니어서 조선인처럼 독립운동을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만약 독립 운동가라면 유감 스럽지만 나는 당신과 함께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

 

박열은 이에 대해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이야기 하였고 그 후로 둘이는 동지가 되었다..  그녀가 단 한번에 반한 박열의 시 [ 개새끼 } 이다..

 

개새끼 - 박열 -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것 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1922 년 2월 일본 유학생들이 펴년 잡지 < 조선 청년> 에 실린 그의 글을 본 직 후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 하기전 약 1 여년에 걸친 불꽃 같은  사랑을 하지 않았을까 .... 그렇다면 아마도 내세에서는 조금이라도 더 긴 행복의 여운을 찾았기를 바라마지 않겠다......    지금은 자신의 고향이 아닌  조선의 땅 문경 의 어느 지역에 박열 기념관 옆쪽에 그녀의 묘소가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2013/ 8/4 일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날 ,  그와 같은 사회주의자 아니 아니키스트들의 혁명적 사상들은 어떤 제 각각의 배경을 가지고  그 당시 사회와의 대립과 소통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 한번 생각 하게 만드는 묘한 책 이었습니다.... 책력거99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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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직 상점 - 상 - 한국 자본주의의 첫발을 떼다
박상하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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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종로 피마골을 다녀왔다...모임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사동 골목길을 간만에 찾아본 것 또한 좋았다.. 조선 시대 종로편에 있엇던

육의전을 위시해서 대로변, 양반행차시 말들을 피하게 위해 샛길을 맏들었던곳 , 그곳에 백성들의 애환이 서려있고 지금은 서민들이 자주 찾는 단골 안식처가 되엇다... 이번의 서평책 배경이기도 하다.

'박승직 ( 1864 ~ 1950 ) 상점' - 이름 만큼이나 근대화의 냄새가 물신 풍겨난다 , 현재 두산그룹의 시초이기도 하고 박용만 회장 ( 1955~ )의 조부 이다.

책 의 배경이 되는 시기는 제물포 개항이후의 봉건제가 무너지며 외세에 개화 사항과 서양 문물이 들어오던 바로 그시기 , 옆 중국에서는 청나라가 서양 세력에 아편전쟁에 몸살을 알고 있던 동아시아적으로 보면 복잡 다단한 근대사의 조류이다.. 역사적 관점을 잠간 짚고 넘어 가자면 , 제물포항 개항은 1876 .2 월이다.. 이에 앞서 흥선 대원군의 집권이 막을 내리고 ( 1974. 11월 ) 2년되 1876 년 일본과의 병자 수호 조약을 채결하면서 발생된 개항 이다... 당시 종로 바닥에서는 아직도 육의전이 있었는데 곧 이어서 새로운 상인 개층의 탄생의 시발점이 된 금난전권 ( 육의전을 비롯 한성외 37개 시전들이 도성 안팍 10리 내에서 난전을 금지 할 수 있는 권리) 의 폐지이다 . 다시 말한 다면 특정 계층에게 집중 되어 있던 도매등의 거래에 일반 백성들도 자본이 있다면 상거래를 할 수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책의 주인공 '승직'이 처음 한양에 모습을 나타낸것은 1881 년 즉 제물포 개항 이후 5 년이 지난 시점이고 , 그의 나이 17세때 이다 .. 아무 세상 물정 모르는 그이지만 평생 농꾼으로만 살아 가기는 싫다는 그의 염원을 담아 한성에 도달 하고 육의전에서 석유전에서 첫 품팔이를 해 본다.. 남들이 마다하는 망우재고객를 넘어 무사히 ? 완판을 한 그의 첫 실적은 좋았으나 석유전의 수장인 행수의 규율 ( 판금액을 그대로 돌려옴) 을 어기는 바람에 다시 내쳐지는 신세가 된다.. 농사 일꾼이 필요한 아버지의 수소문끝에 다시 집으로 돌아간 그였으나 결국 해남 땅긑으로 부임받아 가는 신관사또의 책실 신분으로 잔 심부름을 하면서 3년을 버틴다. 차곡 차곡 모은 돈은 집안의 큰 형님에게 보낸돈은 나중에 종로 네거리 현재 4가에서 첫 그의 이름을 내건 포목점 - 박승직 상점-을 차리는데 종자돈이 되어 준다...

.

베오개의 상인으로 불리기도 하는 그는 우선 장사 근성이 있었다. 당시 로서는 전국을 떠도는 장돌뱅이나 제물포 개항지에서 신물건들을 떼어다가 다른 쪽으로 팔아서 이문을 남기는 장사치가 많았으나 그가 한것은 그다지 이문이 남지도 않은 포목 이엇고 , 전국적으로 좋은 포목 이라면 수백리 길도 마다 않고 달려갔고 , 또한 함경 이북이나 수도권등지 강원도 오지 등을 할것없이 포목을 찾는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 든지 달려서 상인으로서의 신뢰를 샇아 나간다... 그러한 그의 인생에 3가지 큰 만남이 있다고 한다면 한양 상단의 장대경이란 자와의 만남이고 , 평안도 천석군의 지주 아들 만봉과의 조우이었다.

해남 땅끝 마을 신임 사또의 책실로 있으면서 생사의 도움을 주었던 ' 쌀녀'와 '맹추'의 한성에서의 조우 또한 아이러니 였다.. 필사적으로 쌀녀의 아버지를 구해내고서 보은 으로서 받은 찬잔의 비밀이 나중에 포목점의 장사가 어려워졋을때 하나의 깨달음을 던저 주는 스토리는 드라마틱 하기 까지 하다..

'진리는 결코 먼곳에 있지 않다 ' 라는 '至道無難' - 지극한 도란 어렵지 않다 - 라는 화두를 던져 주어 1896년 첫 상점을 열어서 어느 정도 장사가 커지고 나서 일본 상인들까지 가세한 포목점은 포화 상태 였다.. 이를 타개한 사업군이 바로 ' 박가분'이란 오늘날 애기하는 여자들의 화운데이션의 시초가 아니었나 추측해 본다.. 1910년대 부터 약 10여년간 박승직 상점의 버팀목은 박가분이었지만 이후 일본의 신시장 개척에 따른 새로운 화장품들이 급속히 시장에 전개 되면서 명맥은 빛을 바래게 된다.. 결국 1920 년도 박승직 상점을 정리하여 상점을 공개, 주식회사 박승직 상점으로 제2의 도약기의 발판을 마련한다.

. 아직 2권이 남아 있어 더이상의 극전개는 차후로 남겨 놓더라도 파란 만장했던 역사의 질곡 속에서도 굿굿이 상인의 정도를 걸어서 어느정도의 근대화의 기틀을 만들어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초기 , 육의전에서 석유전으로 만남의 인연이 있었던 수장 -행수의 가르침이 크다고 보았다... 상인의 도를 알기 위해 찾아간 곳에서 더욱 마음 씀을 올바로 학고 배품을 알고 , 정도를 갈 수 잇는 책읽기를 주선 하였던 것도 그였고 무엇 보다도 개성 상인의 다섯 가지 상략에 비추어 보면 - 도덕 정신 , 근검 절약 , 정직과 믿음 , 협력과 동료 우선 . 기회의 포학과 발굴 , 권력과의 거리 유지 가 그것이었다 .. 나아가 노장 사상에서도 상인의 도를 이끌어 내었는데 '상선 약수 ' (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 즉 가장 이상적인 생활 방식이랴 말로 곧 물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책의 내용을 빌려오면 손자는 물의 형상을 보고서 이상적인 방법을 찾은데 반해 , 노자는 물의 형상을 보고서 이상적인 생활 방식을 찾은 것이라고 보았다.. 즉 , 물은 만물에 혜택을 주면서도 상대를 거스르지 아니하고 사람들이 꺼리는 낮은 곳으로 흐른다. 낮은 곳에 몸을 두고 심연과 같이 깊은 마음을 품는 것이고 배풀때는 차별을 두지 아니 하고,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때로 큰일에 나설 적에도 파란을 일으키는 법이 없이 모든 일에는 상대에 따라 다영하게 대응 하는 유연성을 보여 주며, 시기를 보아 적절한 떼에 행동 한다. 이것이 바로 다름 아닌 물의 형상이 아니 겟는가 ( p193 ) .

요즘의 말로는 멘토가 되겠지만 당시로서는 상인의 길을 가는데 있어 큰 등대 역할을 한 사람이 석유전의 행수이었다... 박승직 상점이 탄생 하고 나서도 많은근대화된 상점들이 문을 열고 닫고를 반복 했겠지만 , 줄기차게 흐르는 그의 상인의 기본 도에는 개성 상인의 정신과 중국 고전 , 노/ 장 사상의 만물에 따라 배우는 '격물치치 ' 의 혜안이 있지 않았을까 추론을 해본다.. 그리고 일화 에서도 언급 되었지만 엄동 설한 강원도 영월에서 정선읍 객주의 재화 물품을 조달 하기 위해 야밤 눈보라 날리는 산길을 기어이 내어달려 개주가 원하는 기일에 도착 하고야 만다.....그리고 한성에서 재물포 개항 까지 가는 길에 무수히 많은 주막집의 유혹을 떨쳐 내면서 묵묵히 목적 했던 물건들을 손에 넣고 다시 길을 재촉하여 기일을 맞추는 그의 성실함과 끈질김은 훗날 큰기업으로의 모태 정신이 아니었을까 .. 이 부분은 조선의 거상 ' 임상옥'( 1779 ~ 1855 ) 을 생각 나게 하는 대목 이다... 시가와 때를 기다리는 끈질김,, 상인의 도의 , 약속을 끝까지 지키는 신의 이러한 것이 어우러져 종로 네거리에 포목점이 열렸을때 전국 각지에서 주문이 쇄도 하지 않았을까 .

격동기 , 구한말 , 청나라의 스러짐과 같이 찾아온 또다른 외세 일본 제국 - 그 앞에서 정치권으로서도 많은 부침이 있었겠지만 상인의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도 어려움은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누구나가 종로 큰사거리에 상점을 내걸로 싶고 가게를 키우고자 하는 야망은 있었겠지만 제데로된 인맥과 거래처 관리를 통해서 차근 차근 하나 하나 기틀을 쌓아 올린 상점은 소수 이었지 않았을까 생각 해본다..

' 박승직 상점 ' 이러한 근대적인 상점의 토대가 이루어 져서 또다른 기업의 탄생신화가 시작 되었지 않았을까 가늠을 해보며 제2권이 기다려 진다..

2013 / 6/ 30 ... 137 년전 제물포 개항장의 생경한 모습은 어떠 하였을까 풍경을 그려보며 글을 맺다 - 책력거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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