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직 상점 - 상 - 한국 자본주의의 첫발을 떼다
박상하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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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종로 피마골을 다녀왔다...모임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사동 골목길을 간만에 찾아본 것 또한 좋았다.. 조선 시대 종로편에 있엇던

육의전을 위시해서 대로변, 양반행차시 말들을 피하게 위해 샛길을 맏들었던곳 , 그곳에 백성들의 애환이 서려있고 지금은 서민들이 자주 찾는 단골 안식처가 되엇다... 이번의 서평책 배경이기도 하다.

'박승직 ( 1864 ~ 1950 ) 상점' - 이름 만큼이나 근대화의 냄새가 물신 풍겨난다 , 현재 두산그룹의 시초이기도 하고 박용만 회장 ( 1955~ )의 조부 이다.

책 의 배경이 되는 시기는 제물포 개항이후의 봉건제가 무너지며 외세에 개화 사항과 서양 문물이 들어오던 바로 그시기 , 옆 중국에서는 청나라가 서양 세력에 아편전쟁에 몸살을 알고 있던 동아시아적으로 보면 복잡 다단한 근대사의 조류이다.. 역사적 관점을 잠간 짚고 넘어 가자면 , 제물포항 개항은 1876 .2 월이다.. 이에 앞서 흥선 대원군의 집권이 막을 내리고 ( 1974. 11월 ) 2년되 1876 년 일본과의 병자 수호 조약을 채결하면서 발생된 개항 이다... 당시 종로 바닥에서는 아직도 육의전이 있었는데 곧 이어서 새로운 상인 개층의 탄생의 시발점이 된 금난전권 ( 육의전을 비롯 한성외 37개 시전들이 도성 안팍 10리 내에서 난전을 금지 할 수 있는 권리) 의 폐지이다 . 다시 말한 다면 특정 계층에게 집중 되어 있던 도매등의 거래에 일반 백성들도 자본이 있다면 상거래를 할 수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책의 주인공 '승직'이 처음 한양에 모습을 나타낸것은 1881 년 즉 제물포 개항 이후 5 년이 지난 시점이고 , 그의 나이 17세때 이다 .. 아무 세상 물정 모르는 그이지만 평생 농꾼으로만 살아 가기는 싫다는 그의 염원을 담아 한성에 도달 하고 육의전에서 석유전에서 첫 품팔이를 해 본다.. 남들이 마다하는 망우재고객를 넘어 무사히 ? 완판을 한 그의 첫 실적은 좋았으나 석유전의 수장인 행수의 규율 ( 판금액을 그대로 돌려옴) 을 어기는 바람에 다시 내쳐지는 신세가 된다.. 농사 일꾼이 필요한 아버지의 수소문끝에 다시 집으로 돌아간 그였으나 결국 해남 땅긑으로 부임받아 가는 신관사또의 책실 신분으로 잔 심부름을 하면서 3년을 버틴다. 차곡 차곡 모은 돈은 집안의 큰 형님에게 보낸돈은 나중에 종로 네거리 현재 4가에서 첫 그의 이름을 내건 포목점 - 박승직 상점-을 차리는데 종자돈이 되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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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오개의 상인으로 불리기도 하는 그는 우선 장사 근성이 있었다. 당시 로서는 전국을 떠도는 장돌뱅이나 제물포 개항지에서 신물건들을 떼어다가 다른 쪽으로 팔아서 이문을 남기는 장사치가 많았으나 그가 한것은 그다지 이문이 남지도 않은 포목 이엇고 , 전국적으로 좋은 포목 이라면 수백리 길도 마다 않고 달려갔고 , 또한 함경 이북이나 수도권등지 강원도 오지 등을 할것없이 포목을 찾는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 든지 달려서 상인으로서의 신뢰를 샇아 나간다... 그러한 그의 인생에 3가지 큰 만남이 있다고 한다면 한양 상단의 장대경이란 자와의 만남이고 , 평안도 천석군의 지주 아들 만봉과의 조우이었다.

해남 땅끝 마을 신임 사또의 책실로 있으면서 생사의 도움을 주었던 ' 쌀녀'와 '맹추'의 한성에서의 조우 또한 아이러니 였다.. 필사적으로 쌀녀의 아버지를 구해내고서 보은 으로서 받은 찬잔의 비밀이 나중에 포목점의 장사가 어려워졋을때 하나의 깨달음을 던저 주는 스토리는 드라마틱 하기 까지 하다..

'진리는 결코 먼곳에 있지 않다 ' 라는 '至道無難' - 지극한 도란 어렵지 않다 - 라는 화두를 던져 주어 1896년 첫 상점을 열어서 어느 정도 장사가 커지고 나서 일본 상인들까지 가세한 포목점은 포화 상태 였다.. 이를 타개한 사업군이 바로 ' 박가분'이란 오늘날 애기하는 여자들의 화운데이션의 시초가 아니었나 추측해 본다.. 1910년대 부터 약 10여년간 박승직 상점의 버팀목은 박가분이었지만 이후 일본의 신시장 개척에 따른 새로운 화장품들이 급속히 시장에 전개 되면서 명맥은 빛을 바래게 된다.. 결국 1920 년도 박승직 상점을 정리하여 상점을 공개, 주식회사 박승직 상점으로 제2의 도약기의 발판을 마련한다.

. 아직 2권이 남아 있어 더이상의 극전개는 차후로 남겨 놓더라도 파란 만장했던 역사의 질곡 속에서도 굿굿이 상인의 정도를 걸어서 어느정도의 근대화의 기틀을 만들어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초기 , 육의전에서 석유전으로 만남의 인연이 있었던 수장 -행수의 가르침이 크다고 보았다... 상인의 도를 알기 위해 찾아간 곳에서 더욱 마음 씀을 올바로 학고 배품을 알고 , 정도를 갈 수 잇는 책읽기를 주선 하였던 것도 그였고 무엇 보다도 개성 상인의 다섯 가지 상략에 비추어 보면 - 도덕 정신 , 근검 절약 , 정직과 믿음 , 협력과 동료 우선 . 기회의 포학과 발굴 , 권력과의 거리 유지 가 그것이었다 .. 나아가 노장 사상에서도 상인의 도를 이끌어 내었는데 '상선 약수 ' (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 즉 가장 이상적인 생활 방식이랴 말로 곧 물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책의 내용을 빌려오면 손자는 물의 형상을 보고서 이상적인 방법을 찾은데 반해 , 노자는 물의 형상을 보고서 이상적인 생활 방식을 찾은 것이라고 보았다.. 즉 , 물은 만물에 혜택을 주면서도 상대를 거스르지 아니하고 사람들이 꺼리는 낮은 곳으로 흐른다. 낮은 곳에 몸을 두고 심연과 같이 깊은 마음을 품는 것이고 배풀때는 차별을 두지 아니 하고,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때로 큰일에 나설 적에도 파란을 일으키는 법이 없이 모든 일에는 상대에 따라 다영하게 대응 하는 유연성을 보여 주며, 시기를 보아 적절한 떼에 행동 한다. 이것이 바로 다름 아닌 물의 형상이 아니 겟는가 ( p193 ) .

요즘의 말로는 멘토가 되겠지만 당시로서는 상인의 길을 가는데 있어 큰 등대 역할을 한 사람이 석유전의 행수이었다... 박승직 상점이 탄생 하고 나서도 많은근대화된 상점들이 문을 열고 닫고를 반복 했겠지만 , 줄기차게 흐르는 그의 상인의 기본 도에는 개성 상인의 정신과 중국 고전 , 노/ 장 사상의 만물에 따라 배우는 '격물치치 ' 의 혜안이 있지 않았을까 추론을 해본다.. 그리고 일화 에서도 언급 되었지만 엄동 설한 강원도 영월에서 정선읍 객주의 재화 물품을 조달 하기 위해 야밤 눈보라 날리는 산길을 기어이 내어달려 개주가 원하는 기일에 도착 하고야 만다.....그리고 한성에서 재물포 개항 까지 가는 길에 무수히 많은 주막집의 유혹을 떨쳐 내면서 묵묵히 목적 했던 물건들을 손에 넣고 다시 길을 재촉하여 기일을 맞추는 그의 성실함과 끈질김은 훗날 큰기업으로의 모태 정신이 아니었을까 .. 이 부분은 조선의 거상 ' 임상옥'( 1779 ~ 1855 ) 을 생각 나게 하는 대목 이다... 시가와 때를 기다리는 끈질김,, 상인의 도의 , 약속을 끝까지 지키는 신의 이러한 것이 어우러져 종로 네거리에 포목점이 열렸을때 전국 각지에서 주문이 쇄도 하지 않았을까 .

격동기 , 구한말 , 청나라의 스러짐과 같이 찾아온 또다른 외세 일본 제국 - 그 앞에서 정치권으로서도 많은 부침이 있었겠지만 상인의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도 어려움은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누구나가 종로 큰사거리에 상점을 내걸로 싶고 가게를 키우고자 하는 야망은 있었겠지만 제데로된 인맥과 거래처 관리를 통해서 차근 차근 하나 하나 기틀을 쌓아 올린 상점은 소수 이었지 않았을까 생각 해본다..

' 박승직 상점 ' 이러한 근대적인 상점의 토대가 이루어 져서 또다른 기업의 탄생신화가 시작 되었지 않았을까 가늠을 해보며 제2권이 기다려 진다..

2013 / 6/ 30 ... 137 년전 제물포 개항장의 생경한 모습은 어떠 하였을까 풍경을 그려보며 글을 맺다 - 책력거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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