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하 臣下
류기성 지음 / 바른북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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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 류자광에 대한 이야기 이다  간략 개요를 살펴 보기 위해 그의 일대기 위키 백과 참조를 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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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자광(柳子光, 1439년 ~ 1512년 6월)은 조선의 초기의 무신, 군인, 교육자, 유학자, 작가이다. 본관은 영광(靈光), 자(字)는 우후(于後)이다. 1467년 이시애의 난의 토벌에 참여하여 공신이 되었다. 이후 이시애의 난, 남이의 옥 등으로 익대공신에 책록되었고 1506년에는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이 되었다. 서얼(庶孼) 출신으로서 무사가 되었다가 이시애의 난의 진압 때 세운 공로로 세조의 총애를 얻어 1468년(세조 13년) 병조정랑으로 온양별시문과(溫陽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관직은 병조판서, 판한성부사, 황해도경상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그 뒤 의정부 좌찬성 등을 거쳐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좌찬성, 겸 영경연사, 충훈부 당상에 이르렀으며, 무령군(武靈君)에 봉작되었다가 무령부원군(武靈府院君)으로 진봉되었다. 남이를 시기하여 그 남자의 시를 문제 삼아 사형까지 이르게 하였다. 학자 김종직과 벌인 감정싸움이 발단이 되어 이극돈 등의 무오사화에 동조했으며, 이후 사림파 공격에 가담했다. 특히 임사홍 등과 함께 연산군갑자사화를 도왔다. 사림파 집권 이후 역적으로 단죄되었으나 1910년 이후 그를 옹호하는 견해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의술, 음악, 지리에도 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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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속의 류자광  무령부원군으로도 불리는 그는 , 그간 세간의 많이 회자 되면서 충신과 간신을 오고 가는 신세 엿으나 , 제대로된 왕조실록의 해석과 자료로 , 다시금 충직한 신하라는 입지에서 살펴본 글이다..


조선초 ㅡ 토 이시에의 난에 공적을 세워 공신이 된후 이후 1506년 중종 반정의 정국 공신, 1468년 세조때 병조 정항으로 무신이면서 문신으로 장원급제 하여 세조의 총애를 얻은 신하 , 그리고 병조판서, 부사 관찰사 , 의정부 좌찬성을 거쳐 웅훈부 당상까지 오른 무령군 ,,, 그러나 당시 조선조 시대의 파벌과 신분제에 대한 고착화는 왕과 신하인 그도 넘지 못할 벽을 쳐 놓았고 번번이 실력으로 나아감에도 불구 하고 많은 당상관, 좌우의정, 그박의 신하들에게 견제의 대상과 질시의 대상이 된 류 자광 ,,, 서얼 출신이라는 굴레에서 평생 벗어나지를 못한 그엿지만 당대의 실력만큼은 출중 하고 왕조시대의 신하라는 직책에 걸 맞게 오로지 공과 사를 구분 하여 왕에 대한 충직함을 지켜 나간 그이다.


그리하여, 두어번에 걸친 사화와 연산을  웅립 하면서도 충언을 아끼지 않은 그였지만 마지막에 나라의 백성을 구한다는 마음으로 연산군의 갑자사화에 무언의 지지를 보내 나라를 구해 낸다.


오늘날로 보자면 매우 불합리하고 1인통치 시대의 사회상으로 이해 하기 어려운 구석도 있지만 만 백성을 위하여 왕이 존재 하고 왕권과 신권이 대립 하는 상황에서 왕권을 지켜 내기 위해 오로지 혼자 외로운 싸움을 하여야만 하였던 무령군 ,, 그래서 세자나 기타 다른 왕세손에대해서도 특별이 이사람을 다시 써 달라는 선왕의 필지가 늘 있어 왔지 않을까.

무려 5대에 걸친 왕위를 보필 하고 지근 거리에서 지켜내는 신하는 보기 드문 일이나 당시의 신권이 왕권을 견제 하는 상황 특히나 3정승과 3 대간들의 견제와 정치는 현제 시점에서도 그들만의 치세로 보인다..


조선의 개국이후 왕의 세습과 그 이후 중국의 변화 명에서 청으로이 이행기 이전을 조망한 것이라 임진왜란 일어나기 약 100여년전의 일이지만 이미 왜구들의 해안선 침범 사례는 꽤나 많이 조선왕조 실록에도 언급이 되어 있엇던 듯 하여 새롭고,, 특히나 중국의 만리장성 축조를 신년하레사를 보내면서 보고 와서 조선에서도 그러한 방비책을 세워야 하는 보국의 견지에서 그리고 북방 여진족의 침입을 미리 방비하는 축조성을 쌓는 것에 상당한 혜안을 가지고 있엇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다른 신하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지마는 , 이러한 준비가 이후 일어난 역사적인 사테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대비책이 되었음은 나라의 존망과 당시 왕조를 키우거나 지켜 나가는데에는 매우 중대한 일이 었음이다..


다시 책으로 돌어오면 , 늘 그러하듯이 , 다른 반대파의 모함을 받거나, 심지어는 서얼 출신이 당상관 이상의 벼슬을 하였다라는 것만으로도 다른 이류를 달아 유배형을 보내버리고야 마는 신권의 성장,,, 당연히 왕으로서는 그럴수록 주변에 자신의 생각을 충분이 지지하고 보듬어줄 충신이 필요한 법이다.


사람을 잘 쓰는법, 조선조 왕의 많이 바뀌었지만 근본적인 사람을 쓰는 왕의 자세에 대해서는 바뀐 바가 없으니 그것의 결과는 류자광이라는 신하가 혹은 무령군이 그렇게도 오랜 기간 연속 하여 왕위를 보필 할 수 잇다라는 것에 있다.


사간과 사간헌들의 기록이 혹여나 자신들의 생각이 섞여 들어갈 수는 엇어도 , 4-5대 왕과 왕손을 지켜낸 신하로는 그밖에도 내시관 김처선이 있을까....  어느 이름없는 묘비명에 당시 나라의 쳬게에 걸 맞게 올바른 정치를 하고 간 한 신하의 영전에 축원을  보내다.  책력거99 .


Value up tip ; 류자광

생애 후반[편집]

무오사화와 갑자사화[편집]

복수할 기회를 노린 류자광은 1498년(연산군 4년)음력 7월 성종실록을 편찬(編纂)할 때 김일손이 사초에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실은 사실이 알려지자 상소를 올려 세조가 한 왕위 찬탈(簒奪)을 비유(譬喩)한 문장이라고 보고하여 무오사화를 일으켜 수많은 사림 인사를 처벌하라고 건의하였다.

김종직의 문하생들이 끌려와 의금부형조에서 고문당할 때 류자광은 김종직의 문집을 입수하여 사본을 내놓으면서 이 중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찾아내 여러 추관(推官)에게 보여주었다.

이것은 세조를 가리켜 지은 문장인데 김일손(金馹孫)의 악한 것은 모두 김종직이 가르쳐서 만든 것이다.

라고 말하였으며, 원본은 연산군에게 바쳤다. 연산군에게 바치는 김종직의 문집에서 류자광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스스로 주석(註釋)해 문구마다 해석하여 연산군으로 하여금 알기 쉽게 하고 이어 "김종직세조에게 부름받았는데도 감히 은혜를 저버리고 우리 세조를 비방(誹謗)하고 헐뜯었으니 이는 마땅히 대역부도(大逆不道)로서 논죄하고 그 남자가 지은 글은 후세에 전파(傳播)되어서는 아니 되니 아울러 모두 불살라 없애야 될 것입니다."라며, 김종직의 저서와 작품의 압수와 관련자 처벌을 건의하였다.

무오사화 이후 사림파를 처벌할 증거 자료를 입수하여 연산군에게 바친 공로로 종1품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진하였으며, 1498년 11월 함경도에 붙은 연산군을 비방(誹謗)한 벽서를 조사하고자 파견(派遣)되었다.

그 해 말 산릉 제조[山陵提調]에 임명되었으나 부당하다고 양사(兩司)에서 비판받았고 1499년(연산군 5년) 1월 생전복과 굴조개를 연산군에게 사사로이 헌납했다가 지평 권세형 · 정언 윤은보에게 탄핵받았으나 연산군은 이를 듣지 않았고 윤은보는 3개월간 계속해서 상소를 올려 사사로이 진상물을 바친 류자광을 탄핵했다. 1504년(연산군 10년) 사옹원 제조가 되었다.

유지광은 자신이 여종의 아들이라 미천한 종이나 악공(樂工)과 화원(畵員) 등의 고통을 덜어주려 노력하였고 왕에게 도공(陶工)들을 아끼라고 건의하기도 했다. 1504년 10월, 사옹원 제조(提調)로 있을 때 류자광은 수라청의 나인들이 수라상(水剌床)을 힘들게 옮기는 것을 보고 동정하여 그해 10월 1일 왕에게 '음식을 올리는 큰 소반이 매우 무거워 들기 어려우니 두 소반에 나누어 차려 드리기 편하게 할 것'을 건의하며 하인들을 아끼라고 청하였다.

"신하로서 인군 앞에서 공경하고 조심(操心)한다면 어찌 들기 어려우랴? 류자광이 말할 것이 아니요, 승지도 아뢸 것이 아니다. 류자광을 국문(鞠問)하라."

이때 연산군의 노여움을 받아 국문당하였으나 남이의 옥사를 다스리고 이시애의 난의 진압에 훈공을 세웠으며, 여진족(女眞族)과 왜구(倭寇)를 토벌한 공로가 인정되어 불문율에 붙여졌다.

1501년 서거정(徐居正)이 자신의 저서에서 류자광이 한명회를 비판한 일을 잘못이라고 기술하자 자신은 잘못이 없으며 대왕대비의 옹호(擁護)를 예로 들어가며 서거정의 저서를 비난(非難)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류자광의 서거정 비판이 문제시되어 그 해 11월 사헌부사간원에서 줄기차게 탄핵당했다. 1503년 사옹원 제조를 거쳐, 그해 9월 왕에게 고을의 수령들이 진상한다는 이유로 항상 강무장(講武場)에서 사냥하는 것과 사사로이 사냥하는 것을 금하게 할 것을 건의하여 왕이 받아들였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평소 그와 절친했던 임사홍과 관련되어 사림에게 비난(非難)받게 되었다.

김종직에 대한 보복 과정[편집]

김종직이 생전 류자광이 쓴 글과 현판들을 떼어내 불살라버렸을 때 류자광은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류자광은 오히려 김종직이 사망하자 제문을 지어 애통해하면서, 김종직중국의 옛 문장가인 한유(韓愈)에 비교하기까지 했다. 이를 두고 당시 사람들은 당시 김종직에 대한 성종의 신임이 두터웠고 또 그 제자들이 득세하고 있었기에, 오히려 류자광이 그런 감정을 가볍게 드러내지 않고 그들과 교분을 트려는 속셈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김일손의 사초 문제가 외부로 알려지면서 문제가 비화되자, 류자광은 성종이 걸어놓게 한 김종직의 당기를 떼어 불살랐다. 그리고 여기저기에 걸려 있는 김종직이 지은 현판을 모조리 없애게 했다. 그리고 류자광은 김종직을 역적으로 몰았다.

류자광은 김종직을 가리켜 "간사한 신하가 몰래 모반할 마음을 품고 옛 일을 거짓으로 문자에 표현했으며, 흉악한 사람들이 당을 지어 세조의 덕을 거짓으로 날조해서 꾸며 나무라니 난역 부도한 죄악이 극도에 달했다."고 비판했다. 또한 류자광은 간사한 신하 김종직은 나쁜 마음을 몰래 품고 그 무리들을 모아 음흉한 계획을 시행하려 한 지가 오래 되었다고 했다. 류자광은 김종직이 세조의 찬탈을 비판하면서도, 그가 세조의 부름을 받고 조정에 출사한 것을 계속 걸고 넘어졌다.

그밖에도 류자광은 김종직이 성종의 명으로 지은 환취정 기문을 인멸하려 했다.

중종반정에 가담[편집]

1501년 겸 오위도총관(兼五衛都摠管) 등을 지냈다.

서기 1504년 연산군 재위 10년에는 이극돈의 형제인 이극균과 사귀었다는 것으로 언관들에게 탄핵받아 임사홍(任士洪)과 함께 직첩을 몰수당하고 경기도에 충군(充軍)되었으나 곧바로 취소되었다. 그 뒤 무오사화갑자사화의 원흉이라는 공론 때문에 대간들에게 여러 차례 탄핵되어 한때 파직되었으나 판부사로 복직되었다.

1505년 1월 석결명(石決明)을 왕에게 사사로이 바친 일로 언관들에게 탄핵받자 연산군은 간관들의 거듭된 탄핵에 못 이겨 당시 탄핵한 언관들을 조사하게 하였고 4월 의금부에서 류자광이 굴과 전복(全鰒)을 진상한 것을 비난한 언관들을 조사하여 앞장선 안윤덕(安潤德)은 율(律)이 장(杖) 80에, 김계행(金係幸)· 윤은보(尹殷輔)· 이곤(李坤) 등은 장 70을 논정하여 보고했다. 연산군1506년 1월 1일부로 류자광을 복직시킨다.

1506년 박원종에게서 거사(중종반정) 가담 제의가 들어왔다. 류자광은 성희안 · 박원종 등과 함께 중종 반정에 동참하여 자신이 섬긴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을 추대(推戴)하였다. 중종 즉위 직후 정국공신 1등에 무령부원군에 봉해졌으며 9월 26일 겸영경연사(兼領經筵事)로 제수되었으나 10월 10일 왕명으로 영경연사에서 체직(遞職)되었다. 중종 반정의 주동자는 박원종유순정, 성희안으로 반정 이후 실권은 이들에게 넘어갔으나 류자광은 부원군이었고 반정공신들도 류자광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이듬해 보국숭록대부로 승진했다가 충훈부(忠勳府) 당상이 되었다.

유배 생활과 죽음[편집]

그러나 1507년(중종 1년) 1월 왕실에서 사찰을 건립하려 하자 영가부원군 김수동, 고양부원군 신준, 능천부원군 구수영, 해평부원군 정미수, 연창부원군 김감, 영의정 유순, 좌의정 박원종· 우의정 유순정(柳順汀)· 고양 부원군(高陽府院君) 신준(申浚)· 창산 부원군(昌山府院君) 성희안(成希顔)· 공조 판서 권균(權鈞)· 예조 판서 송일(宋軼)· 좌찬성 박안성(朴安性)· 우찬성 노공필(盧公弼), 판의금부사 민효증· 진천군(晉川君) 강혼(姜渾)· 호조 판서 이계남(李季男)· 형조 판서 이집(李諿)· 이조 판서 장순손, 병조 판서 신윤무, 지의금부사 김응기, 지중추부사 윤금손, 좌참찬 박건, 우참찬(右參贊) 이손(李蓀), 대제학 한사문 · 도총관 박열, 판윤(判尹) 전임(田霖)·이조 참판 유응룡(柳應龍)· 호조 참판 박영문(朴永文)· 예조 참판 김전(金詮)· 형조 참판 신용개(申用漑)· 병조 참판 허집(許輯)· 공조 참판 유빈(柳濱), 대사헌(大司憲) 이계맹(李繼盲),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이자건 · 좌윤(左尹) 안윤덕(安潤德)· 우윤(右尹) 하한문(河漢文), 인천군 채수, 서원군 한순, 참찬관 성세순, 특진관 한형윤, 겸지춘추관사 성세명,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임유겸 · 풍양군(豐陽君) 김무(金碔) · 대사간 안윤손, 대사성(大司成) 이점, 이조 참의(參議) 조계상(曺繼商)· 예조 참의 김안국, 병조 참의 박의영(朴義榮) · 공조 참의 유숭조· 형조 참의 최인(崔潾)· 병조 참지 이세정(李世貞), 부제학 정광필, 도승지 홍숙, 승지 이예견, 좌승지(左承旨) 손중돈, 우승지 안당, 좌부승지 남곤, 우부승지 이과, 동부승지(同副承旨) 심정, 장례원판결사 이자견, 성균관사성 조원기, 사간원사간 김당, 홍문관전한 성몽정, 사헌부집의 이유청, 홍문관응교 김세필, 사헌부장령 이희맹, 홍문관부응교 김극핍, 사헌부지평 윤희인, 홍문관교리 이행, 이조정랑 이사균, 예조정랑 신상, 홍문관수찬 한효원, 형조좌랑 김양진, 성균관전적 유여림, 성균관직강 이자, 홍문관부수찬 홍언필, 규장각대교 윤인경, 봉교 이희증, 김영, 정충량 예문관검열 권벌, 진사 임유겸, 생원 정옥형 등과 합동으로 사찰 건립을 반대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1월 3일 검소(儉素)와 수신(修身)에 관한 상소를 올렸다.

"들으니, 이 달 초1일에 명하시어, 신을 문채(文彩) 나게 꾸미는 데 단자(段子)를 쓰지 말고 면주(綿紬)로 대신하게 하였다 합니다. 전하의 이 마음은 실로 종사(宗社) 신민 억만 년 한없는 복입니다. 자고(自古)로 제왕(帝王)이 일어날 때 처음에는 검약(儉約)한 덕으로 힘쓰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태평세월이 오래되고 천하에 일이 없게 되면 풍습이 자연히 교만(驕慢)과 사치(奢侈)를 숭상하고 물욕이 서로 마음을 가리게 되어 마음을 바로하지 못하고 몸을 닦지 못하며 집과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여 그만 망하게 되는데 우리 전하께서는 생각하심이 검박한 덕에서 출발하였고 령(令)하심은 미물에까지 미치십니다. 미물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시는데 전하께서 만일 이 마음을 잘 지켜 잃지 않으신다면, 어찌 마음을 바로하지 못하고 몸을 닦지 못하며 집과 나라를 다스리지 못할 것을 근심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 점을 생각하시고 실천하시어, 검박한 덕을 힘쓰시고 백년대계를 생각하소서"

1월 4일 대광보국숭록대부로 승진하였다. 이어 대간(臺諫)이 류자광의 대광 임명을 반대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1507년 2월 김종직(金宗直)의 여당(餘黨)이 비밀리(秘密裏)에 중상(中傷)하려 하니 안심하고 서울에 있을 수 없다며 낙향하겠다고 상소를 올렸다. 한편 유자광을 싫어하던 김세필(金世弼)은 그가 간사하다면서 박원종(朴元宗)에게 여러번 거듭 알렸다.

그해 2월부터 4월 사이에 대간(臺諫)과 사헌부, 홍문관의 계속된 탄핵으로 관동의 흥양에 유배되었고 양사(兩司)는 류자광을 극형에 처하라고 왕에게 건의하였으나 왕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손자 유승건(柳承乾)· 유승곤(柳承坤)까지 함께 유배되었다. 이후 류자광은 양사(兩司)에서 계속 탄핵받았고 배소(配所)가 해평으로 다시 이배(移配)됐다가 변군으로 재이배(再移配)되었다가 장님이 된 후 곤궁하게 살다가 1512년 6월 배소에서 병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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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신해철! - 그에 대한 소박한 앤솔러지
지승호 지음 / 목선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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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해철] 그가 돌아 온다면,,, 사람들은 다시 열광 하고 마왕 신해철을 새벽 비디오 자키 , 고스트 스테이션에서 청취자들의 고민과 동거 동락 하며 살아 왔던 20여년간을 반추 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1988년 대학 가요제에 처음 대뷔 하여 , 그룹으로는 90년대를 휘어 잡았지만 아이돌 세대와, 서태지와 아이들에게 약간을 밀린 위치,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 하고 정치인 혹은 소설가 못지 않은 입담으로  2002년 대선에도 돌풍을 불러 일으켯고, 그가 하는 행위와 언어또한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 되며 호불로가 갈리기도 한다..


지승호 라는 작가의 변을 통해 전달된 그의 못다한 이야기와 다른 사람들의 인터뷰어로 묶여져 출간된 이들은 어찌보면 그가 살아 왓던 내밀한 흔적의 표식이고 가족이고 , 그 주변의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의 추모기가 도래 할때면 그다지도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웃음 지으며, 생애 기뼛던 날이 그대의 노래와 위로를 들을 수 있엇노라고 당당히 애기 하게 만드는 사람,  그이다..


이제는 자류로운 영혼으로 떠나버린 사람이지만 ,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는 녹아져 있고 노래 가사는 시인의 음률이 되어서 유튜브를 통하면 언제든지 들어 볼 수 있다.


단절 , 사람의 죽음이 안타깝고 아쉽고 못내 절망 스러운 것은 , 그 시간이 이후 그 사람의 다른 이야기와 목소리를 라이브로 들어 볼 수 없다라는 점이다.. 팬들과의 단절도 그렇게 생겨 나고 , 생전에 이것저것 논란과 이슈도 많았던 그였지만

한가지 반듯한 길은 음악에 대한 열적이고 그것도 한국의 인디 음악 , 그룹 사운드에 대한 열정이다.


20000년대  MP 3 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불법복제가 판을 흔들었고 이는 지금도 현제형이지만 문화의 선진국이 되기를 바랬던 그의 간절한 마음만큼 우리는 진보 되었을까... 


자유, 자율란 것은 그것을 지킬 능력이 있을때야라면 가능한 자율 , 힘이 있는 자유 이지만, 없어도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정신적 맘적 자류는 존재 하는가 ,, 그가 혹은 그의 팬들이 지속적인 영혼의 울림을 따라 가는한 그가 원했던 자유로운 영역은 어쩌면 저 세상 너머에 존재 하는 지도 모르겠다..


음악을 반추 하던, 뮤지션을 반추 하던, 나의 살아 가는 공간에서 그러한 사람이 하나 사라졌다라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정치 이해 관계를 떠나서 생각이 나고 그리워 한다..


희망, 자신에게 희망을 가지고 믿는자만이 누군가에게도  희망을 주어 볼수도 있도 믿음을 쥐어 줘 볼 수도 있다.

확인 하지 않는 미래에 희망을 부여 하는가  .  현실 세계에 부당함과 절벽이 잇더라도 부단히 노력 하여 그 천장을 유리를 깨어 보려 했던 사람으로도 기억 하는자.. 


신해철은 어쩌면 향후 보통 명사가 될지도 모르겠다.. 서태지와 이이들 처럼 ,,, 책력거99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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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게임
에마 퀴글리 지음, 김선아 옮김 / 리듬문고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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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 게임 ] ..작가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학교라는 작은 공간에서도 사회와 마찬가지로 사고 팔고, 거래를 하며, 은행의 자본이 유통 될 수 있다라는것을 몸소 , 이야기속 주인공들을 통해서 보여 준다. FFP 은행 설립자인 핀 피스 패트릭과 그의 친구 루크 모리세이, 가브리엘 오루크, 에밀리, 파블로, 코비 등 , 저마다 맡은 역할은 다르지만 합심 해서, 이 이상한 은행의 출발 점이 된다..


처음 간단히 돈이 필요한 학생들에서 약 10%의 이자를 붙여 자금 회전을 하지만, 시간이 갈 수록 , 다른 투자 및 수익형에도 기웃 거리게 되고 , 마침내 태그드라는 매칭 게임엠에 투자 하기에 이르고 이는 성장 곡선을 그리며 대박 나는듯 하다가 자금 운영 등 주변 여건 상황으로 패쇄 일보 직전 까지 가면서 핀 패트릭 은행에도 위기가 찾아 온다...


위기는 곧 기회이다.. 행동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주인공들은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며 일을 벌여 간다.

마치 가상 세계에 와 있는 듯한 빠른 이야기의 전개는 학교내외에서 발생 할 수 잇는 모든 공간과 시간을 연결 하며 촘촘히 구성을 이어 나간다..


머니게임, 제목 만큼이나 돈에 관련된 이야기가 주제 이지만, 이와 관련된 사람들의 심리적인 변동과 군증의 움직임도 함께 감지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아이들의 상상력이 커져서 현실이 되기에는 무리라는 사실은 잘 알지만 어른의 입장에서 상상력이 현실이 되기 위한 장벽은 넘어야 할 산이 더욱 많다.. 첫번쩨가 귀차니즘,, 무언가를 시도 한다라는 것 자체가 자신이 살와 왔던 라이프 스타일을 거스르는 일이고, 그 일이 잘될까 여부를 늘상 고민 하여야 한다라는것, 그리고 실패와 성공 사이 안주 해버리게 되는 현실상의 대중들의 관성이 있고 무언의 중력이 더이상 점프를 막아 버린다..


하지만 , 세상은 놓여져 있는 것만으로는 존재 하지 않는다, 무엇이든 동사적인 어귀로 움직이고 명사적인 명상이 가능할때 세로운 창조상이 발생 하는 것이다..


아직도 현제진행형인 우리들의 미래 혹은 글속의 아이들의 미래 처럼 , 자유 분방한 사고를 지니고 , 실패에 대한 두려움 없이 도전을 해본다면 일부 시행 착오적인 오류를 격을 수는 있겟지만 하지 않고도 생각이 남는다면 다가올 시간에 대한

후회에 대한 단상이 남을 뿐이다... 책력거99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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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한국이 열광할 세계 트렌드 - KOTRA 글로벌 비즈니스 전망
KOTRA 지음 / 알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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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한국이 열광할 세계 트랜드]  2020 트랜드 , 바로 2개월 후면 내년 달력이 넘어가지만 , 세계 트랜드변화는 시간을 기다려 주질 않는다. 이미 빠른 변화와 빛의 속도로 첩첩이 쌓여지는 기술과 빅 데이타 속에서 과거 우리나라가 70년대 유선 전화기로 부터 시작 해서, 80년대 카폰 , 90년대 삐삐와 시티폰 , 90년대 후반 개인 휴대폰 2000년대 중반에 전세게는 스마트폰 시장으로 새로운 혁명을 맞이 했고,, 어느 나라오지의 경우는 그러한 세대를 다들 건너 뛰어 인공위성에서 전파를 받아 바로 스마트폰 QR 결제를 할 수 있는 시대 손안의 컴퓨터 시대에 와 있고, 도시 곳곳에 수많은 사람들의 안면인식을 통해

지문인식이나 폰 결제가 아닌 안면 결제 혹은 전철역 승, 하차 시 통과 시간 2초 이내를 자랑 하여 인구 많은 도시의 병목 현상을 없에 주고, 범죄에 취약한 도시 곳곳에 개개인의 정보는 오픈 되더라도 철저한 검거가 가능한 빅 브라더 시스템 , 먼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중국의 어느 도시 이야기 이다.. '


한국 코트라 현지 직원들이 발로 뛰고 손으로 느끼고 오감으로 체험한 현장 기술은 그 어떤 특파원의 보고 보다도 따끈 하고 신속히 현지 상황을 전달해 준다.


전체 12 쳅터로 구성된 소주제들은 저마다의 특색이 있는데 , 뉴 모빌리티와 왭 시티는 최근의 이동에 대한 간편성과 편리성으로 도심 곳곳에 우버와 카카오 택시 같은 대중 수단 외에도 개개인이 걸어서 가기엔 좀 멀고 택시를 타기엔 기본 요금 조금 넘어 나오거나 도심지 교통 체증으로 도달 거리가 애매 할때 , 개개인 전동 퀵 보드가 덩답이다..


두바이 같은 경우 하늘 규제를 어느 정도 풀어서 드론으로 사람을 실어 나르는 서비스도 곧 제공 한다고 하고, 베트남 현지의 경우는 기존 워낙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와 인력거 등 2인승 3인승 운송 수단을 이용 하는 관계로 미니 전기차와 전기 스쿠터, 이박에 첨단 모빌리티의 실험장이 되어 가고 있다....


파트 3,4 장의 경우 직장맘을 위한 스마트 모유 보관및 전달이 가능한 시스템, 간단한 센서 칩 하나를 등 뒤에 붙이고 있으면 숙이고 허리가 꺽이는 각도를 체크 해서 알람을 주기도 하고 모니터링 해주는 척추 교정 가이드 .. 일본의 후쿠오카 시같은 경우 인공 지능 기술로 손목 밴트 하나로 개개인 수면의 질과 분석을 용이 하게 피드백 해 줄 수 있다..


파트 5.6 의 경우 재생 , 혹은 B급의 재발견이라는 이름으로 스마트 링크를 활용한 , 그날 그날 버려져야 하는 막대한 음식물들이 그날 당일 소비 될 수 있도록 슈퍼와 개개 레스토랑등 지역적인 연결을 통해 , 재고 소진 100% 에 나서고 있고 시민들의 효용 가치도 높다..


그린 다이닝의 여러 방편중의 하나로 버려지는 농작물을 다시 수거 재 분리하여 건강한 식탁으로 돌아 오게 만든다던가,, 채식 주의자들을 위한 콩과 식물성분만을 사용한 우유도 개발 되엇다...


버려지는 해조류와 해양 쓰래기의 수거및 분로 친환경 신발을 탄생시킨 맥시코 시티의 한 회사도 있다... 또한 개인 일인사용자들을 위한 공유 주방 혹은 배달, 그리고 1인 가구를 위한 맞춤형 가구 렌털 서비스 까지... 오사카의 경우는 당장 사용 하지는 않지만 버리기는 뭐한 물품들을 일정한 비용을 받고 보관 해주는 클라우드 수납 또한 도심지 좁은 주거 공간에서 생활 하는 도시민들에겐 새로운 아이디어 이다..


이박에도 직원들의 복지 정책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복지 서비스와 구직자를 위한 채용 플랫품 , 요즘 세게적인 대도심지에선 플라스틱 리사이클을 유도 하고 있고 이를 교통 카드에 대신 적립액을 충전 해주는 서비스로 해당 도시로서는 막대 하게 버려지는 플라스틱 재활용을 체계적으로 수거 할 수 있고 낭비 되는 인력 또한 줄이고 , 해당 수익으로 시민들의 복지를 위해 사용 되는 많큼 더욱 좋은 효과가 있다..


노령화되는 도심과 도시에도 점차 도심형 실버 타운이 자리를 잡아 가고 있고,, 실버 산업이 부상 하며, 이에 따른 소비패턴에 따른 비지니스도활발 하다.. 집안에서 손목 밴드형으로 차고 있으면 자동으로 혈압과 맥박, 심전도 까지 원격으로 전달 할 수 있고,, 위급시에 알람을 울리게 하여 신호를 보내기 까지 스마트 워치의 기능을 십분 활용해 볼 수도 있다...


스마트 시티의 출현으로 머지않은 장래에 ,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인공 지능이 미리 인지 하여 반응을 나타 내어 선 주문을 하거나 집안 온도를 맞추거나, 라디오와 TV 또한 보던 패턴으로 유도 하여 쾌적함을 더할 날이 올지 모른다..


지구상의 간격이 점차 좁아 지는 세상에서 변화의 흐름과 받아 들이는 속도는 도시 마다 각기 다르 겠지만 어떤 방식으로 제대로 안전하게 바뀌게 되기 까지는 그래도 인간의 손길을 닿아 움직여야 할 여지는 아직 남아 있는 듯 하다.. 그래서 오늘 또한 이러한 트랜드 들을 보고 느끼며 배우고자 한다... 2020은 머지 않은 미래이고 곧 오늘이다. 책력거99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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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란의 미녀
백시종 지음 / 문예바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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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란의 미녀] 중국의 서인 끝단에 있는지역  ,정식 명칭은 신장 위구르 자치구 이고 ㅡ 중화인민공화국 북서쪽에 위치 하는 자치구로서 면적은 166만 평명 km^2 이어서 우리나라 전체 면적 약 20만 평망 km^2의 8배 , 남한만의 면적으로 16배가 넘는 지역 이다. 워낙 땅덩어리가 넓은 중국이지만 이지역도 에외는 아니어서 , 예전 비단길로 통하던 서역지역 이기도 하다.

중국 대률의 거의 1/6 에 해당 하는 면적이고 지하자원의 보고 로도 알려져 있어서 중국으로서도 절대 자치독립을 묵인 해 줄 수 잇는 지역은 아닌것이다.


신장 위구르 족은 대부분이 모스렘이라고 하고 ,, 신장이란 말씃은 새로운 영토를 뜻하며, 위구으의 뜻은 그들의 말로 ㅡ 단결과 연합을 위미 한다. 전체 인구 약 2천여만명이 실제 거주 하며 중국 한족으로보터의 차별과 압제로 인해 분리 독립을 주장 하는 목소리가 유엔 및 기타 세계 인권 기구및 다른 경로로 통해서도 꾸준히 제기 되고 있는 실정이다.


다시 책으로돌아가면 이글의 모티브가 되었던 위그르 그리고 누란의 미녀라는 수천년도 더된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발견된 미이라를 현실 세계에서 다시 환생 해서 본다면 혹은 만난다면이란 상상력을 가지고서 써내려간 대하 소설이다.


1755년 몽골을 패퇴시킨 청 재국에의 완전 복속 되엇고,, 1884년 신강성이 설치되어 중국의 영토로 합병 하였다..

나라잃은 위구르의 비통한 심정을 글로 담아 독립 결사대를 비밀리에 협조 운영하는 누란의 미녀와 , 한국에서 이찌 할바 없이 밀려 나듯이 의료 선교 사업을 따라 나선 조진표 , 그가 그녀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는 날은 시위가 한창인 도시 한복판 시가지 현장이었고 , 우연찮게 뛰어 들은 그녀를 보호 하느라 한품을 내어준것이 운명이라면 운명이엇다.

에벤엣셀이라는 한국 자선 회사의 기부로 대내외적인 인지도는 있으나 비정규직 차별화의 언론의 못매를 맛거나 이를 조종하는 사측의 부당한 처사로 결국 분신에 이르는 후배 .


다시 미국 으로 떠난 그 앞에 나타난, 위그르 망명 정부의 큰손들을 통해 알게된 이들만이 가지는 유력한 관계망과 협력에 의해 또다른 폭탄 테러를 하게되고 , 누란의 미녀와 필생의 약속을 하며 기독교에서 무슬램으로 개종 까지 하게된 조진표의 파란의 인생, 아직 끝나지 않는 그들의 이야기는 어떠면 , 그나라의 독립운영 투쟁사와 다르지 않을 듯하다.

마치 100여년전 우리 선조들이 일제의 압박에 맞서서 , 무던히도 피를 흘리고 고통 스럽게 독립 한국을 이겨 내려고 앴던 것처럼 그들 2천만 민족들도 자신들 고유의 문화와 언어 그리고 종교를 인정 받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텐샨 산맥과 엄청난 크기를 자랑한는 타클라마칸 사막,  그 와중에 중국의 지하 핵실험으로 그 어느 지역 보다 번성 하였던 쌍봉 낙타는 자취를 감추게 되고 , 호수의 물은 지하 어디론가로 빠져 버려 이제는 모래 먼지 흙바람만이 남아 있고 사람이 거주 할 수 없는 사막화가 되어 버렸다..


전 지구적 재앙이 따르는 핵 실엄 장소를 신장 위그로로 택한 중화인민공화국, 그들의 의도데로 , 세계 3번쩨 핵 보유국이 탄생한 순간이기는 하나 , 그로 인해 한민족의 문화의 지역, 풍습 까지도 완전히 망가 뜨리게 된 오늘날 그 피해에 대한 보상은 누가 할 것인가.


아무도 들어 주지 않고, 주장 하여도 제대로된 반향이 없는 그러한 자치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오늘도 그들은 굿굿하게 모래 바람 사이로 그들만의 생존 방식으로 실크로드를 지나고 있다....


한번즘 소수 민족 이야기에 귀 기율려볼 만한 주제 글 입니다.. 또한 지역적으로 신장 위구르에 대한 첨가를 따로 올립니다... 책력거99  적다.


Reference : 신장 위구르 자치구 - 위키 백과


신장 위구르 자치구(شىنجاڭ ئۇيغۇر ئاپتونوم رايونى/Shinjang Uyghur aptonom rayoni , 新疆维吾尔自治区, 新疆維吾爾自治區, Xīnjiāng Wéiwú'ěr Zìzhìqū )는 중화인민공화국 북서쪽에 위치하는 자치구이다. 중앙아시아 위구르족의 자치구이며, 그 영역은 위구르족에게는 동튀르케스탄(شەرقىي تۈركىستان ) 지역으로 불리고 있다. 아울러 신장(新疆)은 "새로운( ) 영토( )를 뜻하며 "위구르"(ئۇيغۇر)의 뜻은 위구르어로 "단결"과 "연합"을 의미한다.

중화인민공화국시간대베이징 시간(北京時間)으로 통일되어 있으므로 공식적인 중국 내의 시차는 존재하지 않지만,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는 비공식적으로 베이징 시간보다 2시간 늦은 신강 시간(영어판)(新疆時間)이 사용되고 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는 출퇴근 시간을 현지 시간에 맞게 조정한다. 가령, 베이징에서 9시 출근에 5시 퇴근이라고 치면 신장에서는 11시 출근에 7시 퇴근이 되는 식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탄압 때문에 규모는 작지만 일부에서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18세기 이전[편집]

신장(新疆 )은 고대 중국인들이 서역이라고 부르던 지역의 일부분으로 비단길이 이 지역을 지나갔으며, 역사적으로 오랜 기간 유목민족-흉노족, 돌궐족, 몽골족 등의 지배를 받았다. 한나라당나라 때와 같이 중국의 왕조가 강성했던 시기에는 관부를 설치해 직접 지배하기도 했으며 이 지역의 민족들과 나라들을 영향권 아래 두기도 했다.

왕조 이후 중국은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으며, 이 지역은 위구르 제국의 영역이 되었다. 위구르인들은 10세기에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이후, 차가타이칸국의 지배하에서 급속히 이슬람화되었다. 이곳에서 모굴리스탄이 나타났고, 여기서 독립한 위구르인들은 야르칸드 칸국이라는 위구르인들의 마지막 왕조를 세웠다. 그리고 이 국가는 중가르 칸국에게 멸망당했다.

청의 지배[편집]

1755년 몽골을 완전히 정복한 제국이 이 지역을 침략하였다. 중가르 칸국의 지배하에 있었던 신강(동튀르케스탄)은 청나라에게 멸망당하면서 청의 지배를 받았고, 그곳에 있었던 위구르인들 혹은 청나라 조정으로부터 이주한 위구르인들은 이에 저항하였으나 1759년 이 지역은 청의 군사적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위구르인들의 저항은 계속되었고, 19세기 중반 청 제국이 혼란에 빠지면서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자 1864년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나 청의 군대는 이 지역에서 철수하였다.

반란세력들 간의 내전 결과, 야꿉 벡이라는 인물이 통일 국가를 수립하였다. 그는 이슬람의 수호자를 자처하면서 근대식 소총과 화포를 구입하여 무력을 증강하였고, 영국러시아의 승인을 받기도 하였으나 1876년 청군과의 전투에서 패한 직후 급사하였다. 이후 청은 1884년 이 지역에 신강성을 설치하여 자국의 영토로 합병하였다.

동튀르케스탄 공화국[편집]

1933년 11월 동튀르케스탄 제1공화국이 처음으로 건국되었으나 3개월 만에 소멸되었고, 1944년에 다시 설립되었다. 그러나 공화국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에 병합되었고, 1955년 신장 위구르 자치구가 되었다.

지리[편집]

타림 분지

신장은 크고 인구가 희박한 지역으로 면적은 160만km2가 넘고 중국 전체 면적의 6분의 1을 차지한다. 남쪽은 티베트 자치구(시짱 자치구), 남동쪽은 칭하이 성간쑤 성, 동쪽은 몽골, 북쪽과 서쪽은 러시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에 접해 있다. 예전에는 인도 카슈미르라다크 지방에 속했던 아크사이친의 거의 대부분을 관할하고 있으며 인도는 1962년 이래 이곳의 지배권을 주장하고 있다.

동서로 뻗어있는 톈산 산맥이 북쪽의 준가얼 분지와 남쪽의 타림 분지를 분리한다. 중가르은 건조한 스텝 지대이다. 타림 분지는 오아시스 도시로 둘러싸여있고 타클라마칸 사막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동쪽에는 신장에서 가장 해발고도가 낮은 투르판 분지가 있고 서쪽은 톈산 산맥이 쪼개져 이리 강 계곡을 형성한다. 신장에서 가장 해발고도가 높은 곳은 8611m의 K2로 파키스탄과의 경계이다. 다른 산맥들로 남서쪽의 카라코람 산맥, 서쪽의 파미르 고원, 북쪽의 알타이 산맥이 있다.

신장의 대부분은 지질학적으로 어린 곳으로 인도판유라시아판이 충돌하여 톈산 산맥, 쿤룬 산맥, 파미르 고원을 형성하였다. 결과적으로 신장은 주요 지진 발생 지대이다.

신장은 바다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지점으로 중가르 분지의 거얼반퉁구터 사막(古尔班通古特沙漠)은 유라시아에서 접근하기 어려운 곳으로 꼽히며 가장 가까운 해안선에서 2648km 떨어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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